복권은 희망 인질극
“복권은 희망에 부과된 세금이다.” 극작가 버나드 쇼는 정곡을 찌른다. 희망은 낙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절박의 표현이기도 하다. 희망 이외에 기댈 곳이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기도 같은 것. 한편 해학의 달인 마크 트웨인은 “복권은 정부가 운영하는 비즈니스고 단골손님은 빈곤층이다”라고 일갈했다. 희망은 이 잔인한 비즈니스의 판촉물이고 거대 당첨금은 홍보전단임을.
복권과 저소득층의 상관성이 자주 언급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복권에 부과된 세율은 소득 대비 세금 하중이 큰 빈자에게 더 가혹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역진세(regressive tax)’라고 부른다. 소득이 늘수록 세금도 늘어나는 누진세율의 정반대다. 부가가치세, 종합부동산세처럼 복권도 역진세의 대표적 경우다.
2022년 최저 소득층인 1~2분위의 복권구매 비율은 전체의 21%였다. 복권구매 인구 2400만 명 중 500만 명 이상이다. 문제는 가계소득 316만원 미만 계층의 복권 소비가 전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는 점이다. 빈자의 복권지출과 복권세금 비중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는 뜻이다.
학자와 시민운동가들은 희망의 인질극인 복권 폐지를 요구해 왔다. 다른 학자군은 복권이 구매자의 자율적 선택이므로 복권소비에 발생되는 세금 역시 자발적 세금으로 봐야 한다고 맞서 왔다. 담배나 술 소비 같은 기호품이니 굳이 저소득층 운운할 필요 없다는 주장도 거세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낙관
복권 폐지론과 활용론의 대립은 꽤 긴 역사를 지닌다. 근대사회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다수 사상가와 정치인들은 회의론을 품었다. 대표적으로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복권이 ‘무지한 자들에 대한 세금’이라며 제도적 차별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영국 의회파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도 내전자금 복권 발행에 극렬히 반대했다. 왕정에 대항한 의로운 싸움에 대중의 자원을 투기적으로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근대 민주정의 초석을 다진 영웅이 되었지만 영국 의회는 결국 1655년 복권을 합법화했다.
계몽주의의 선구자였던 장 자크 루소도 복권을 경멸했다. 복권이 가난한 사람들을 수탈할 뿐 아니라 게으름과 악덕을 조장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사회계약론에 기초해 태동된 프랑스혁명, 그리고 혁명 후 형성된 의회는 1793년에 복권을 합법화하고 만다.
이에 반해 실용주의 성향으로 무장한 영미 사상가들은 일부 호의적 입장을 표명했다. 사회계약론의 존 로크는 적절한 규제가 동반된다면 선한 목적과 공공의 이익에 활용될 수 있다며 제한적 활용론을 내세웠다.
복권의 사회공헌 가능성을 백분 활용한 귀재는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100달러 초상의 주인공인 그는 원래 인쇄공 출신이었다. 몸소 복권 디자인, 인쇄, 광고까지 도맡을 만큼 열성이었고, 필라델피아의 토지 분배, 소방대 지원, 도로건설, 펜실베이니아 대학 도서관 설립, 민병대 창설 등 대다수 공공사업을 복권의 힘으로 추진했다.
그의 낙관에 기반해 1960년대 부활된 오늘날의 복권은 “공공선이란 목적을 위해 대중의 투기심을 활용한 국가의 징수법”으로 정의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까? 그러려면 공공선의 크기가 윤리적, 경제적 폐해보다 더 큰지를 따져봐야 한다.
복권대금과 세금 지출보다 더 큰 실질적 혜택이 공공, 특히 취약계층에게 주어지고 있는지 말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굳이 복권이란 변칙 세금으로 서민의 얇은 주머니를 털어가는 것 자체가 거대 모순이 된다. 애초에 주머니를 털지 않는 편이 더 합리적이니 말이다. 영수증복권 도입 국가들
엉뚱한 설정을 하나 해보자. 만약 복권이 공짜로 주어진다면 어떨까?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적어도 빈곤층 착취 논란은 피할 수 있고 나아가 사행성 조장, 도박심리 확산 등 윤리적 퇴행이라는 비난도 방어할 수 있다. 과연 공짜 복권은 가능한가? 가능하다. 영수증복권이 그 답이다.
일본 방문 여행객들의 불만 1위는 현금거래다.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며 신용카드와 페이앱 결제를 대폭 늘렸지만 여전히 현금만 고집하는 작은 상점들이 많다. 1엔에서부터 500엔까지 6종류 주화를 세어가며 거래하는 모습을 보면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소비자 불편도 문제지만 현금거래의 가장 큰 문제는 탈세다. 영수증 없는 거래가 가능하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매출 조작은 아주 쉬운 일이다. 이런 음성적 거래를 방지하고 세수 확보를 늘리는 묘수 중 하나가 ‘영수증복권’이다.
영수증에 무료복권 기능을 부가하면 된다. 소비자들은 복권인 영수증을 열심히 챙기게 되고 정부는 음성 현금거래가 줄어 세수 개선 효과를 본다. 불법상품 유통과 범죄도 억제할 수 있다. 늘어난 세입의 일부를 당첨금으로 소비자에게 되돌려주면 된다.
브라질, 칠레, 몰타, 포르투갈,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 여러 나라에서 이 제도를 시행해 왔다. 상파울루시는 2007년 영수증 신고 제도를 도입하면서 캐시백 보상과 함께 월간추첨 복권 기능을 부가했다. 제도 시행 4년 후 2011년까지 1300만 명이 세무당국 웹사이트에서 온라인 계정을 만들었고 4000만 건 이상의 누락 영수증 요청이 이뤄졌다.
이탈리아도 2021년 전자 영수증복권을 실시했다. 1~1000유로까지 온·오프라인 모든 구매에 온라인 복권 영수증이 발급된다. 1000유로 구매면 1000장의 복권이 지급되는 파격에 더해 매주, 매월, 연말 추첨을 진행해 열기를 이어갔다. 매주 15장의 2만5000유로, 매달 10장의 10만 유로, 매년 1장의 500만 유로(한화 70억원) 상금 추첨이 있다. 22세기로 날아간 대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낸 곳은 대만이다. ‘통이파피오(統一發票)’, 우리말로 번역하면 통일·통합 영수증이다. 8자리 복권번호가 적혀 있는 통이파피오는 대만 내 모든 상거래에 적용되고 외국인들도 당첨자가 될 수 있다.
2개월마다 (홀수 달 5일) 추첨하는 이 영수증복권은 놀랍게도 이미 70여 년 전 도입됐다. 1951년 세수증대를 위해 영수증 거래 강제를 고심하던 초대 재무장관 런셴췬(任顯群)의 뛰어난 지략이었다. 그 결과 1951년의 세금 징수액이 전년 대비 75% 증가하는 눈부신 성과가 드러났다. 그후로 중단 없이 지속되었고 전 세계 국가들의 모델이 되어 왔다.
끝 3자리를 맞춘 6등(당첨금 200 NTD, 한화 약 8200원)부터 8자리 수 모두 맞춘 1등(20만 NTD, 한화 820만원)까지 있지만, 특별 추첨일에 당첨된 1등은 최고 1000만 NTD(4억1000만원)를 받는다. 무료 복권인 데다가 각 영수증마다 별도의 당첨 기회가 주어지니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가 대단하다.
2006년부터는 종이 대신 디지털 영수증복권으로 전환했다. 이로써 매해 132억원을 절약하고 8만 그루의 나무를 보존해 탄소배출 감축에도 기여하고 있다. 앱을 다운받으면 영수증 자동저장과 당첨 사실 확인도 가능하니 남녀노소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발권 60주년이 된 2011년에는 총상금 규모를 70억 NTD(약 2880억원)로 33%늘리는 행정적 배포도 내보였다. 소액 당첨금의 경우 편의점에서 지불 받거나 물품 구매에 직접 사용할 수도 있어 편의성이 크게 강화됐다. 지난 9월 25일 추첨에서는 단돈 10 NTD를 주고 신문을 구매한 고객이 1000만 NTD에 당첨되기도 했다. 우리도 하자!
우리도 2022년 9월 ‘상생소비복권’이 실시된 바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전통시장과 소상공인을 위해 마련한 ‘동행축제’에서였다. 3만원 이상 결제시 1장의 복권영수증을 발행해 총 3500명 대상으로 12억원의 당첨금을 지급했다. 일회성 행사로 그친 이 사업은 선전은 요란했으나 평가와 후속조치는 없었다.
그보다 먼저 2000년부터 2005년 사이 신용카드, 현금영수증, 직불카드로 대상 범위를 넓혀간 영수증복권 추첨이 있었다. 2005년 지급된 상금이 총 480억원이었으니 꽤 큰 규모였다. 그러나 홍보도 부족했고 사업의 목적성도 뚜렷지 않아 그해를 마지막으로 종적을 감췄다.
무료 영수증복권을 전면 도입하자. 세수가 늘면 복권은 손 털어도 된다. 세수가 필요해 나선 것이지, 복권업 자체에 국가가 집념을 보일 이유 없지 않나. 조작론과 사행성 시비로 만신창이가 된 로또와 스피또는 손절이 상책이다.
현대 국가의 정당성은 공정한 세금에 기초한다. 복권장사 변칙세금 징수꾼이라는 정체성은 그 정당성을 침식한다. 다시 한번 주장한다. 국가는 복권판매 좌판 접고 무료 영수증복권을 전면 시행하라. 시행하라~ 시행하라!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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