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뒤집고 한국 법원 재판권 인정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에 눈이 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에 눈이 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국내 법원에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에서 일본 정부가 피해자 한 명당 2억원씩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앞서 이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한 국가의 주권 행위를 두고 다른 나라가 재판할 수 없다는 ‘국가면제(주권면제)’ 원칙에 따라 “소송 요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소송을 각하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최근 변화한 국제 관습법과 사례 등에 비춰 볼 때 다른 나라의 주권 행위에 대해서도 필요에 따라 재판권을 가질 수 있다”는 취지로 1심 판결을 뒤집고 일본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1심 “국제법 준수도 인권 못지않게 중요”

서울고등법원 민사33부는 2023년 11월 23일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및 유족 등 16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2차 소송)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들이 청구한 금액 전부를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소송 비용도 일본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원고들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 의해 불법 차출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다. 일본은 이들을 중국·일본·대만·필리핀 등 당시 점령지역의 위안소에 배치해 일본 군인들과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를 갖도록 했다. 원고들은 2016년 12월 “일본제국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1인당 2억원을 지급하라”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사건은 국가의 주권 행위를 두고 다른 나라가 재판할 수 없다는 국가면제 원칙의 적용 여부가 쟁점이 됐다. 피고인 일본에 대해 국가면제 원칙이 적용될 경우 대한민국 사법부는 재판을 진행할 수 없게 되는 만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불법행위와 그에 따른 손해배상 여부도 심리할 수 없게 된다.

2021년 4월 열린 1심 재판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는 “일본에 국가면제 원칙이 적용된다”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을 각하했다.

현시점에서 유효한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 관습법과 대법원 법리에 따라 다른 나라 국가인 일본을 상대로 그 주권적 행위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게 당시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못지않게 국제법과 국제 질서를 준수하는 것도 중요한 헌법상 가치”라고도 밝혔다.

2심 “국가면제는 절대적 면제 아냐”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일본에 대한 국가면제를 인정할 수 없다고 보고 1심 판결을 취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한 국가의 영토 내에서 그 국민에 대해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선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 관습법이 존재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이어 항소심 재판부는 “국가면제의 법리는 외국의 행위에 관해 다른 국가의 법원이 재판권을 일절 행사할 수 없다는 절대적 면제에서 제한적 면제로 점차 변경·발전돼 왔다”고 덧붙였다. 위안부 피해자인 원고들에 대한 일본의 행위는 한 나라의 영토 내에서 그 국민에게 자행된 불법행위이기 때문에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의 불법행위도 대부분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들은 최소한의 자유조차 억압당한 채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당했고, 그 결과 무수한 상해를 입고 임신·죽음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며 “종전 이후에도 정상적인 범주의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없는 손해를 입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일본의 전신이자 직접적인 가해자인 일본제국은 당시에도 국제 조약 및 국제법규를 성실하게 준수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것도 위법이라고 지적했다.

항소심 판결 직후 서울고법 관계자는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 관습법의 동향을 면밀히 분석·파악했다”며 “소송이 시작된 나라에서 그 국민을 상대로 벌어진 불법행위에 관해 국가면제를 인정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판례”라고 설명했다.

소송을 제기한 이용수 할머니는 항소심 승소 결정이 나오자 만세를 부른 뒤 “일본은 원고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판결에 따라 법적 배상을 해야만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 할머니는 이날 항소심 선고 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 역사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이고 역사를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며 교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2016년 1월 같은 취지로 손해배상 소송(1차 소송)을 제기한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도 2021년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가 진행한 1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은 일본 정부가 무대응 원칙을 고수하며 항소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확정됐다.

당시 재판부는 일본에 대한 국가면제를 인정할 수 없다고 보고 일본 정부에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제공동체의 보편적인 가치를 파괴하고 반인권적 행위로 인해 피해자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가했을 경우까지도 최종적 수단으로 선택된 민사소송에서 재판권이 면제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설명했다.


[돋보기]
일본 정부의 ‘무대응’ 고수…실제 배상 어려울 듯

대한민국 사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으나, 실제 배상까지 이어지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법조계는 보고 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에 대해 무대응 전략을 고수해온 데다 이용수 할머니 등이 제기한 2차 소송의 항소심 판결에 대해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강하게 내비쳤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2차 소송의 항소심 판결 소식이 전해진 뒤 윤덕민 주일대사를 초치해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의 뜻을 전했다. 오카노 마사타카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은 윤 대사에게 “판결은 극히 유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는 결단코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한민국 정부에 시정조치를 요구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배상 문제에 두고 ‘주권면제’ 원칙을 내세워 무대응 입장을 고수해왔다. 1차 소송의 당사자인 배춘희 할머니 등은 민사소송에 앞서 2013년 8월 “일본 정부는 위자료로 피해자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며 조정신청을 냈으나 일본 정부가 응하지 않아 2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정식 재판을 제기한 이후로도 일본 정부가 소장 등 서류 접수를 거부한 탓에 첫 변론기일이 열리는 데만 4년 3개월이 걸렸다. 대한민국 법원이 1차 소송에서 일본의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했지만, 피해자들은 지금까지 배상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1차 소송 피해자들은 2021년 4월 손해배상금을 강제추심하기 위해 법원에 일본의 한국 내 재산을 공개해 달라고 신청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51단독은 2021년 6월 일본 정부에 “이듬해 3월까지 강제집행이 가능한 한국 내 재산 목록을 공개하라”고 명령했다.

사실상 법원이 일본의 국내 재산을 압류, 매각하기 위한 강제집행 절차를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 측은 정해진 기일에 법원에 출석하지 않았고, 관련 서류도 송달받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2022년 9월 ‘주소 불명’을 이유로 피해자들의 재산 공개 신청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렸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국내에 있는 일본 정부 재산을 강제로 받아내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방법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개인이나 기업이 아닌 다른 나라의 재산을 강제집행할 경우 해당 국가의 주권과 권위에 손상을 줄 우려가 있고,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커 현실적으로 이행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항소심에서 승소한 2차 소송 피해자들도 이 같은 이유로 일본 정부로부터 실제 배상금을 받아내기가 어려울 것으로 법조계는 보고 있다.

민변 위안부 문제 대응 TF 단장 이상희 변호사는 2차 소송 항소심 선고 후 “국제사회가 일본에 자발적 사죄와 이행을 촉구하는 데 이 판결을 활용할 것”이라며 “강제집행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열어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