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숙 전 사장, 1·2심 이어 대법원 무죄

[법알못 판례 읽기]
2018년 12월 16일 충남 태안군 태안읍 한국서부발전 본사 정문 앞에 태안화력발전소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 씨를 추모하려고 동료들이 갖다놓은 작업화에 시민들이 국화를 꽂아두었다. 사진=연합뉴스
2018년 12월 16일 충남 태안군 태안읍 한국서부발전 본사 정문 앞에 태안화력발전소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 씨를 추모하려고 동료들이 갖다놓은 작업화에 시민들이 국화를 꽂아두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하청업체 근로자인 김용균 씨가 사망한 사고에 대해 원청 대표가 형사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 확정됐다.

법원은 원청 대표가 안전·보건 방침을 설정·승인하긴 하지만 개별적인 설비 현황이나 작업 방식의 위험성 등 현장의 세세한 상황까지 직접 점검하고 예방조치를 이행할 의무까지는 없다고 판단했다.

법조계에선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는 계기가 됐던 이 사건이 원청 대표의 무죄로 결론 나면서 향후 중대재해 사건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장 위험 구체적으로 알긴 어려워”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2023년 12월 7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받는 김병숙 전 한국서부발전 사장에게 원심대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에 업무상 주의의무 위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에서의 안전조치 의무 위반, 인과관계에 관한 법리 등을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한국서부발전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 소속 상하탄설비 운전원이던 김 씨는 2018년 12월 새벽에 석탄운송용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장의 안전 위협 요인은 복합적이었다. ‘2인 1조’ 작업 매뉴얼이 지켜지지 않았고, 컨베이어벨트의 안전 덮개가 열려 있었으며, 야간인데도 컨베이어벨트 통로 부근의 조명이 꺼져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긴급정지를 위한 풀코드 스위치도 불량이었다.

김 씨의 유족과 시민대책위원회는 원청까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서부발전과 한국발전기술 관계자들을 고소·고발했다. 김 전 사장도 고소·고발 대상에 포함됐다. 진상 조사를 해오던 검찰은 2020년 8월 서부발전과 한국발전기술, 김 사장을 포함한 이들 기업 임직원 14명을 재판에 넘겼다.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1·2심은 모두 김 전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2심 재판부는 “김 전 사장이 컨베이어벨트 설비의 현황이나 운전원들 작업 방식의 위험성에 관해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태안발전본부의 개별적인 설비 등에 대해서까지 작업환경을 점검하고 위험 예방조치 등을 이행할 구체적·직접적 주의의무는 없다”고 밝혔다.

권모 전 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장은 1심에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판결이 뒤집혀 무죄를 인정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 씨가 사망한 원인으로 지목된 석탄 취급설비와 위탁용역관리 관련 업무는 기술지원처가 담당한다는 점을 판단 근거로 삼았다.

1심에서 벌금 1500만원을 선고받았던 서부발전 법인 역시 “김 씨와 실질적 고용 관계가 아니다”는 이유로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에서도 이 같은 판단이 유지됐다.

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기술지원처장, 연소기술부·석탄설비부 책임자들, 백남호 전 발전기술 사장, 태안사업소장 등 10명과 한국발전기술 법인은 원심대로 유죄가 확정돼 징역형 집행유예 또는 금고형을 받았다.

이들의 경우엔 업무상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아 김 씨를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최소한 산업안전보건법상 요구되는 안전조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 법정에서 인정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은 누구 한 명의 결정적인 과오가 아닌 각자의 업무상 주의의무를 태만히 한 결과가 서로 중첩돼 발생했다”며 “개개인의 과실 정도가 매우 중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인 고(故)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가 12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5주기 추모대회에서 추모발언을 하고있다. 사진=뉴스1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인 고(故)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가 12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5주기 추모대회에서 추모발언을 하고있다. 사진=뉴스1
유족·노동계는 반발…“노동자·시민의 가슴에 대못”

이 사건은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비롯해 산업 현장의 안전규제를 대폭 강화한 산안법 개정안이 제정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산안법 개정안은 2018년 12월 27일 국회를 통과해 2020년 1월 16일 시행됐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산재가 발생한 기업의 대표이사까지 형사처벌이 가능한 중대재해법이 지난해 1월 도입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중대재해법은 사망자나 두 명 이상 중상자가 나오면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에 1년 이상 징역이나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김 씨 유족은 이번 판결을 두고 “기업이 만든 죽음을 법원이 용인했다”고 비판했다. 김 씨의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대법원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다른 기업주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을 안전 보장 없이 죽여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말했다.

노동계도 “노동자·시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판결”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노총은 같은 날 설명을 내 “원청의 책임을 묻지 않음으로써 ‘위험의 외주화’라는 갑질이 산업현장에 만연하는 구조를 법원이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지현 한국노총 대변인도 “젊은 노동자가 밤에 혼자 일하다 사고가 나서 목숨을 잃었음에도 결국 ‘원청의 책임은 없다’는 판결은 ‘왜 중대재해처벌법이 필요한가’를 반증한다”며 “이제라도 김 씨와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해 중대재해법이 더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돋보기]
중대재해법 시행 2년…재판 간 11개 기업 모두 유죄

김용균 씨 사망을 계기로 도입된 중대재해처벌법이 한 달 후면 시행 2년째를 맞는다. 이 법이 적용된 이후에도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으면서 기업 대표이사(CEO)들이 줄줄이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받고 있다.

법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최소 1심 선고가 종료된 중대재해 사건은 총 11건으로 모두 기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중견 철강사인 한국제강의 경우 대표가 1·2심에서 연이어 실형(징역 1년)을 선고받고 구속돼 있다.

한국제강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은 대표가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형량은 징역 1년~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이하였다. 중견 건설사 온유파트너스의 대표는 1심 판결 후 항소를 포기해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됐다.

이 같은 판결 추세에도 “중대재해법 위반으로 기소된다고 반드시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위법 정황이 명확한 중소기업의 재판만 있었지만, 앞으로는 큰 비용을 들여 안전사고 예방체계를 구축했던 대기업들의 재판도 예정돼 있어서다.

실제로 중대재해법 위반 혐의로 조사받던 대기업이 기소되지 않는 사례가 나오면서 법조계 안팎에선 재판에서도 대기업이 무죄를 인정받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전주지검은 지난 11월 전주공장 근로자가 작업 중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최근 현대자동차를 기소하지 않고 수사를 종결했다. 수사팀은 현대차가 중대재해법이 요구하는 안전보건 확보의무를 이행했다고 판단했다.

앞서 지난 8월엔 울산지검이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온산공장 폭발사고와 관련해 에쓰오일의 후세인 알카타니 전 대표(CEO)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 회사의 정유생산본부장과 생산운영본부장 등 13명이 산업안전보건법 및 화학물질관리법 위반 혐의로만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동부지검도 비슷한 시기 LG전자의 자회사인 하이엠솔루텍의 에어컨 수리기사 추락사 사건도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 검찰은 수리기사의 과실이 사고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