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가업승계 전략]
한국형 ‘패밀리 오피스’ 등장과 한계는[한국형 가업승계 전략⑤]
팬데믹은 전 세계 부(富)의 지형을 바꿔 놓았다.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전통 자산에 투자하던 과거 세대와 달리, 다양하고 새로운 투자처를 통해 부를 일군 고액 자산가가 늘고 있다. 특히 가업 매각이나 인수합병 등을 통해 수백억원대 뭉칫돈을 손에 쥔 슈퍼리치가 많아지는 추세다.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딧 스위스가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순자산이 5000만 달러(약 700억원) 이상인 한국의 슈퍼리치는 3886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 세계에서 11번째로 많은 숫자다. 고액 자산가 늘며 확산…싱가포르 ‘설립 붐’고액 자산가가 많아지면서 이들의 자산증식 방식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대표적인 예가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다. 가족 사무실로 직역되는 패밀리 오피스는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 발전해왔으며 가족기업의 자산증식과 가업승계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최근 패밀리 오피스는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시아 금융허브’로 떠오른 싱가포르에서는 몇 년 새 패밀리 오피스 설립 붐이 일고 있다. 싱가포르 금융당국인 통화청(MAS)에 따르면 싱가포르 내 패밀리 오피스는 2020년 약 400곳에서 올해 2월 기준 872곳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싱가포르 정부가 2020년부터 금융활성화 대책의 하나로 시행 중인 ‘가변자본기업(VCC)’ 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제도를 통해 싱가포르에서 자금을 운용하는 법인은 법인세, 소득세 등을 면제받고 공시 의무나 승인 절차 없이 각종 금융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한국형 ‘패밀리 오피스’ 등장과 한계는[한국형 가업승계 전략⑤]
국내에서도 고액 자산가의 자산 운용 수요가 늘며 이를 위한 수단으로 패밀리 오피스가 주목받고 있다. 2008년 종합유선방송사업자인 씨앤엠을 매각한 이민주 회장이 매각 자금 1조5000억원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에이티넘파트너스가 국내 패밀리 오피스의 시초로 꼽힌다. 최근에는 화장품업체 카버코리아를 2017년 글로벌 화장품 회사 유니레버에 매각한 이상록 전 회장이 패밀리 오피스를 세우고 비상장사에 투자하고 있다. 허재명 전 일진머티리얼즈 사장도 지분을 롯데그룹에 매각한 후 패밀리 오피스를 설립하겠다고 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패밀리 오피스는 크게 싱글 패밀리 오피스(SFO), 멀티 패밀리 오피스(MFO), 가상 패밀리 오피스(VFO)로 나뉜다. 싱글 패밀리 오피스는 개인 지분으로 설립돼 특정 가문에만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주로 재단이나 신탁, 헤지펀드 등의 형태로 운영된다. 대표적인 예가 스웨덴 발렌베리 재단으로, 이 재단은 발렌베리 가문의 모든 지분을 갖고 있으며 중간 지주회사를 통해 각각의 기업을 지배한다.

멀티 패밀리 오피스는 증권사, 보험사, 은행 등 금융회사가 여러 자산가의 자산관리를 해주는 방식이다. 싱글 패밀리 오피스에 비해 운영 비용이 적고 여러 전문가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상 패밀리 오피스는 정보 플랫폼을 통해 자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팬데믹 이후 비대면 환경에 관심이 많아지고, 가문 구성원의 거주 지역이 다양해지면서 생긴 방식이다.
한국형 ‘패밀리 오피스’ 등장과 한계는[한국형 가업승계 전략⑤]
규제와 이중과세 벽에 부딪힌 ‘한국형 패밀리 오피스’최근 전 세계 자산가들은 신탁을 설정한 후 지주사 형태의 중간 회사를 설립해 외국에 패밀리 오피스를 두고 재산을 관리하는 방식을 많이 활용한다. 반면 국내에서는 여러 제약으로 인해 재단이나 신탁을 통한 싱글 패밀리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다.

가장 큰 이유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과 자본시장법 규제 때문이다. 현행 법에 따르면 공익재단은 의결권 있는 발행 주식 또는 출자 총액의 5% 미만으로 보유할 때만 증여세가 면제된다. 신탁 형태로 운영되더라도 신탁 재산에 속하는 주식이 발행 주식 총수의 15%를 초과하면 그 초과 분은 의결권이 제약된다. 이로 인해 재단이나 신탁 형태로 패밀리 오피스를 운영해 가업을 승계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형 ‘패밀리 오피스’ 등장과 한계는[한국형 가업승계 전략⑤]
이중 과세 문제도 패밀리 오피스를 운영하는 데 큰 걸림돌로 꼽힌다. 패밀리 오피스를 운영하면 법인 원천소득에 대해 법인세가 부과되고 세후 소득의 배당 과정에서 다시 소득세가 부과된다. 이런 제도적 제약으로 인해 국내의 싱글 패밀리 오피스는 개인 투자 회사나 자산운용사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때 자산가들은 프라이빗뱅커(PB)에 의존해 투자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잇따른 증권사의 일탈 사건에서 보듯이 사고 위험이 존재한다. 주먹구구식 운영이 아닌, 패밀리 오피스라는 큰 그릇을 통한 통합적인 서비스가 절실하다.

현재 국내 대다수의 패밀리 오피스는 금융회사가 여러 자산가를 관리하는 멀티 패밀리 오피스 방식을 취한다. 최근 고액 자산가의 자산 규모가 커지면서 금융사들은 단순히 자산관리만 하던 것에서 벗어나 회계, 법률, 부동산 등 여러 분야 전문가와 업무 제휴를 맺고 통합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자산관리에 방점을 두다 보니 해외처럼 가문의 부를 계승해 나가는 장기적인 플랜은 부족한 실정이다.

패밀리 오피스의 기원은 200여 년 전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도와 석유산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집사를 두어 자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도록 했고 이것이 패밀리 오피스의 효시가 됐다. 패밀리 오피스는 단순한 자산 관리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 가족의 자산을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통해 가문의 가치를 드높이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고액 자산가와 젊은 기업가의 부가 패밀리 오피스를 통해 건전한 투자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지혁(사진 왼쪽)∙김병국 삼일PwC 파트너. (사진=삼일PwC)
이지혁(사진 왼쪽)∙김병국 삼일PwC 파트너. (사진=삼일PwC)
이지혁·김병국 삼일PwC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