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이후라면 누구나 알 법한 명대사가 있다. 2000년 KBS 2TV가 방영한 미니시리즈 ‘가을동화’에서 원빈이 송혜교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대사다. 당시만 해도 사랑을 돈으로 산다는 어불성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며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최근 이 “얼마면 돼”가 새로운 화두가 됐다. 나왔다 하면 소위 ‘백플’, ‘천플’은 기본이다. 바로 시간을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을 산 지가 언제 적인데,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고 있냐고 묻고 싶다면 다음 질문은 어떨까.
Q. 코로나 증상으로 이비인후과에 들른 A 씨. 그 앞의 45명이란 대기인원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병원 진료 예약까지 걸리는 시간을 살 수 있을까, 그 값어치는 얼마일까.’
Q. 놀이공원에서 자이로드롭을 타기 위해 줄을 선 B 씨. 앞으로 2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에 문득 ‘줄 서는 시간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값어치는 얼마일까. 월 1100원에 산 진료 대기경기도 송산신도시에 거주하는 성은 씨는 지난 12월 중순 A형 독감 유행으로 이비인후과에 방문했다가 대기명단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대기자만 73명. 오전 진료 시작 후 20분 만에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자가 많아 당일 접수가 어렵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직원은 성은 씨에게 “다음에는 ‘똑닥’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예약하고 오는 게 좋다”고 권고했다. 똑닥은 병원 접수·예약을 중개하는 앱이다.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시간에 진료 예약을 하고, 그 시간에 맞춰 병원에 찾아가면 된다. 처음에는 무료 서비스로 이용자의 편의를 도왔지만, 지난해 9월부터 멤버십 유료가입 후 병원 접수·예약을 가능하게 했다. 멤버십 비용은 월 1100원, 연간 1만1000원이다.
큰돈이 아니기에 가입 버튼을 누르려던 성은 씨는 “줄 서는 것도 돈을 내야 하나”는 생각에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월 이용권을 결제했다고 말했다.
똑닥 유료결제서비스가 불러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이용료는 월 1100원이지만 서비스의 목적이 병원 접수·예약이란 점에서였다. 쉽게 말해 진료 예약에 쓰는 시간을 월 1100원에 사는 격이다.
서비스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엇갈렸다. 줄을 서거나 시간을 들여야 하는 노력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다는 긍정 평가, 디지털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논란은 물론 “환자는 구분없이 모두 진료하겠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언을 어긴 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평가다.
논란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의 도마에 오를 정도로 확대됐다. 똑닥 서비스를 운영하는 비브로스 측은 “돈을 더 내면 먼저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상품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다”며 “진료 순서는 환자의 응급도, 의료진의 판단, 병원의 상황 등에 따라 결정된다”고 선을 그었다.
똑닥의 유료 앱 서비스는 단순히 똑닥과 연계된 병원의 접수·예약을 모바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 돈을 더 내면 먼저 진료를 받게 해주는 상품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 똑닥으로만 진료 접수를 받거나 현장 접수를 먼저 마감한 후 똑닥으로만 접수를 받는 경우에는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실상 의료 공공성을 해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용자가 서비스를 무시할 만큼 작은 규모도 아니다. 비브로스가 지난 2017년 4월 처음 서비스를 내놓을 당시 이용 가능했던 연계 병원은 600여 곳이었지만 현재는 1만3000곳을 넘는다. 누적 가입자 수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국민 5명 중 1명이 쓴다는 얘기다. 서비스의 인기에 유사 앱이 우후죽순 쏟아졌지만 똑닥 이용자 수가 압도적이다.
맘카페 등지에서는 “똑닥 안 쓰고 영유아 검사 예약가능한 곳 있나요?” 등의 질문이 꾸준히 올라온다. 특히 소아과가 많은 신도시에서 똑닥은 필수 앱으로 통할 정도로 이용자가 많다. 인천 검단신도시에서 5세, 3세 아이 둘을 키우는 최희진(37) 씨는 “최근 신도시로 이주한 뒤 무조건 사용해야 하는 필수 앱이란 소리를 들었다”며 “동네 대부분의 소아과, 이비인후과에서 똑닥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똑닥 서비스 논쟁은 1년 전 한 커뮤니티에 올라 지상파 방송까지 타며 큰 화제를 모았던 글을 떠올리게 한다. ‘놀이공원 매직패스에 분노한 아버지’의 글이다.
매직패스는 롯데월드가 2006년 도입한 놀이기구 탑승 예약 시스템이다. 하나의 놀이기구를 이용함에 있어서 매직패스를 구입한 이에게는 별도의 출입구를 제공함으로써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줄과 무관하게 바로 탑승할 수 있는 제도다. 5회 이용에 4만9000원, 10회에 8만9000원이다.
당시 자신을 초등학교 4학년, 1학년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그는 “매직패스는 불공정의 시작”이라며 “정상적으로 기다린 사람들과 달리 돈을 더 내고 특별한 혜택을 받는 일을 우리 아이들에게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문의 글은 삽시간에 큰 화제를 모았다. 자본주의에서 황당무계한 글이란 의견이 다수를 이뤘지만, 글쓴이에 동조하는 댓글도 꽤나 많았다. 다른 이의 시간을 돈으로 뺏은 게 아니냐는 논지였다. 매직패스 논쟁에 기름을 부은 건 2023년 4월 2일 한 지상파 방송에서 정재승 KAIST 뇌과학과 교수가 던진 발언이었다. 정 교수는 “(매직패스는) 새치기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이라며 “먼저 줄을 선 사람이 먼저 서비스받는 게 당연하다. 놀이공원에서 주로 줄을 서는 아이들이 어릴 때 그런 걸 보면 어떤 가치를 배우게 될까”라고 질문했다.
방송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 SNS 등에선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을 침해한 상품이라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자 흔한 가격 차별(동일한 상품을 구입자에 따라 다른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일 뿐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돈 내면 새치기도 괜찮다?”사실 정 교수의 발언은 한국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2012년 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주된 논지였다. 샌델 교수는 책에서 매직패스와 같은 우선 탑승권을 ‘새치기 권리’라고 비판했다.
한국에서는 2022~2023년에나 화제가 됐지만, 미국에서는 2010년대 초반부터 유니버셜스튜디오 할리우드를 비롯한 많은 놀이공원들이 매직패스와 같은 우선 탑승권을 돈 받고 팔았다. 놀이공원만이 아니었다. 세계 여러 나라의 공항에서 도입한 ‘패스트 트랙’ 서비스도 동일한 개념이다. 패스트 트랙이란 비싼 항공료를 지불하는 승객들이 여권과 국가의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설 필요가 없는 제도다. 한국은 없다. 정확히는 있다가 사라졌다. 자칫 일반석 승객에게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고 국민 여론이 부정적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서비스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사라졌다.
샌델 교수는 놀이공원이나 공항에 생긴 우선 탑승권이 공정성에 반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그는 “선착순이란 줄서기 윤리가 ‘돈을 낸 만큼 획득한다’는 시장 윤리로 대체되고 있다”며 “이러한 변화는 한때 비시장 규범이 지배했던 삶의 영역에 돈과 시장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격을 지불하는 행위와 기다리는 행위는 재화를 분배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고, 가격을 지불하려는 마음이, 줄 서서 기다리려는 마음보다 더 나은 가치 평가 기준이라고 추정할 근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샌델의 이론을 바탕으로 누리꾼들도 새치기 매매권에 대해 이 같은 의견을 던진다. 비즈니스 클래스나 이코노미 클래스처럼 공간을 나눠 편의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돈으로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는 개념이기에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었지만 이제 시간도 돈으로 사는 시대가 왔다”며 “문제는 그 시간이 타인에게서 뺏은 시간이란 데 있다”고 말했다. “시간에 매긴 가격, 효용의 극대화”반면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줄서기는 낭비이자 비효율적 행동이다. 이들은 공항, 놀이공원에서 좀 더 빠른 서비스를 받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에 가격을 매김으로써 경제적 효용을 높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장 논리로 명품백을 사기 위해 대신 줄 서는 ‘대리 줄서기 사업’이 성행하고, 미국에서는 값비싼 전담 의사 서비스가, 중국에서는 진료예약권 암거래가 수백 달러에 팔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 또한 원하는 재화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거기에는 단서가 붙는다. ‘타인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이란 중요한 조건이다.
2000년대 “사랑 이제 돈으로 사겠어”로 이어진 원빈의 대사는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보여줬다. 물, 공기, 시간 등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이 돈 주고 사는 시대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평한 시간마저 사고팔게 된 시대, 이제 다음은 무엇을 사고팔까.
“줄서기와 같은 비시장적 방식이 시장논리로 대체되는 경향은 현대 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우린 더 이상 그러한 현상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공항, 놀이공원, 의사 진료실에서 벌어지는 새치기 권리 구매 현상은 30년 전만 해도 거의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장이 침범하고 있는 영역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샌델 교수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시대가 왔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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