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현대로템의 K2 전차. 그래픽=박명규 기자·사진=현대로템
현대로템의 K2 전차. 그래픽=박명규 기자·사진=현대로템
폴란드에 30조원 규모의 2차 무기 수출을 앞두고 있는 국내 방산업계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폴란드와의 추가 무기 계약을 앞두고 정책금융 한도인 15조원이 소진돼 한도 증액을 위한 한국수출입은행법(수은법) 개정안 처리가 필요하지만 국회 논의가 지지부진해 계약이 축소되거나 일부 취소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무기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정책지원금 자본금 한도를 현행 15조원에서 50조원까지 늘리는 수은법 개정안이 연이어 발의됐지만 여야 정쟁에 가로막혀 표류 상태다. 1월 임시국회 처리가 불발됐고 오는 4월 총선 일정을 고려하면 2월 임시국회가 수은법 개정의 마지막 처리 시한이다.

국회서 잠자는 수은법…수출길 닫힐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박진 국민의힘 의원은 한도를 15조원에서 50조원으로 상향하는 법안을 지난 2월 5일 대표 발의했다. 현행법은 수출입은행의 자본금을 15조원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2014년 개정을 통해 증액된 이후 변동이 없는 상황이다.

2022년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상품수출액은 7517억 달러, 한국은 6905억 달러로 비슷한 수준이나 수출입은행의 법정 자본금은 15조원으로 일본 수출 신용기관(JBIC)의 법정 자본금 50조7000억원의 30% 수준이다.

박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에는 증가하는 수출금융 수요에 대한 금융지원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수출입은행의 법정 자본금을 일본과 비슷한 수준인 50조원으로 증액하자는 내용이 법안에 반영됐다.

앞서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도를 25조원으로,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은 30조원으로, 양기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35조원으로 상향 조정하는 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여야 모두 수은법 개정안을 발의한 만큼 방산 등 수출 산업 지원을 위한 자본금 한도 상향이 필요하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지만 정부 출자 방식과 수출입은행의 건전성 문제 등에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특정 국가, 특정 사업의 쏠림현상을 지적하며 소극적인 모습이어서 본회의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K9 자주포. 사진=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K9 자주포. 사진=한화에어로스페이스
잭팟 그후…더 큰 애프터마켓 시장 열린다

폴란드 정부와 2022년 맺은 경전투기 FA-50(한국항공우주산업, KAI), K9 자주포(한화에어로스페이스), K2 전차(현대로템) 등의 기본 계약 중 1차 물량은 총 17조원 규모였다. 1차 계약 물량은 양산과 인도가 진행 중에 있고 금융 지원이 완료됐다. 문제는 30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2차 계약 물량이다.

통상 인프라, 방산 등 대형 프로젝트는 정부 간 계약(G2G) 성격이 짙고 수출 규모가 커서 수출국에서 정책 금융·보증·보험을 지원하는 것이 관례다. 현행법상 수출입은행은 특정 대출자에 자기 자본(15조원)의 40%(약 6조원) 이상 대출할 수 없다. 폴란드의 경우 17조원 규모의 1차 계약 때 이미 금융 지원 한도를 모두 채운 상태여서 2차 계약을 위해선 증액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폴란드 방산 수출금융 지원을 두고 무기 구매국에 대한 과도한 퍼주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은 1차 계약에선 17조원 중 12조원의 수출금융을 지원했고, 폴란드의 요구대로라면 2차 계약에서도 30조원 중 24조원의 수출금융을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방산 수출은 정부 간 계약(G2G) 성격이 강하고 일단 체결하면 다른 신규 계약이 어려운 ‘록인효과’로 인해 초기 이윤이 적더라도 시장 진입 자체가 중요하다. 일단 무기 수출에 성공하면 이후 수십 년간 수리, 정비, 성능개량 등 애프터마켓 매출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방산장비를 완제품 한 단위를 판매할 때마다 필수적으로 사후정비(MRO), 부품 교체, 성능 개량 등 수요가 수십년간 발생한다. 이 시장이 애프터마켓이다. 애프터마켓 시장은 통상 무기체계 전 주기 비용의 60~80%를 차지하며 경제적 파급효과가 크다. 국내 방산 수출이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지금까지 수출한 무기에 대한 애프터마켓이 30조원 이상이 될 것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국산 무기를 대량 구매하며 2023년 방산 전체 수출의 72%를 차지하며 시장의 큰손이 됐다. 한국은 지난해 폴란드에만 1조5000억원 이상 규모의 방산 수출을 했다.

한국무역협회의 무역 통계 시스템 ‘K-stat’에 따르면 K9 자주포, K2 전차 등이 포함된 ‘무기류’ 수출은 6억4900만 달러로 전년보다 56.9% 증가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FA-50 수출 실적을 반영한 ‘항공기’ 수출도 5억23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무기류와 항공기 항목을 합친 지난해 한국의 전체 폴란드 방산 수출액은 11억7200만 달러로, 대규모 폴란드 무기 수출이 본격화한 2022년(4억1300만 달러)보다 184% 증가했다.

지난해 한국의 전체 방산 수출액은 약 140억 달러(약 18조6000억원)로, 2년 연속 세계 ‘톱10’ 방산 수출국에 이름을 올렸다. 방산 수출액은 최근 10년간 연간 20억~30억 달러에 머물다가 2021년 약 73억 달러, 2022년 역대 최고 수준인 173억 달러로 급증했는데 폴란드에 K9 자주포, FA-50 등 124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무기 수출에 힘입은 결과다.
프랑스 라팔 전투기. 사진=AFP·연합뉴스
프랑스 라팔 전투기. 사진=AFP·연합뉴스
한 대도 못 팔던 라팔의 ‘역주행’, 프랑스 정부 85% 장기 대출에 주문 폭주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자료에 따르면 2018∼2022년 한국의 세계 무기 수출 시장점유율은 2.4%로 9위를 기록했다.

세계 방산 수출 시장은 미국(40%)이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러시아(16%)와 프랑스(11%)가 2·3위다. 이어 중국(5.2%), 독일(4.2%), 이탈리아(3.8%), 영국(3.2%), 스페인(2.6%) 등의 순이다. 한국(2.4%)과 4∼8위 간의 점유율 격차는 크지 않다. 정부는 이 같은 성장세를 앞세워 2027년까지 세계 방산 수출 점유율을 5%까지 높여 ‘세계 4대 방산 수출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선 선진국 수준의 수출금융지원제도 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그간 K-방산은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기존 방산수출 강국들의 적극적인 수출금융지원에 밀려 수주에 수차례 실패했다.

2017년 한국은 태국의 잠수함 사업과 말레이시아 다연장로켓 사업에 도전했으나 장기(30~50년) 저리 금융지원과 저가를 내세운 중국에 밀려 수주에 실패했다. 2020년에는 필리핀 잠수함 사업에서 초저리(1% 미만) 금리를 제안한 프랑스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주요 방산 강국의 방산수출금융지원 체계. 자료=산업연구원
주요 방산 강국의 방산수출금융지원 체계. 자료=산업연구원
무기 수입국은 수출국에 저리 대출, 장기 분할상환 등 금융지원을 요구하는데 방산 강국들은 이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산업연구원의 ‘최근 K-방산 수출금융 주요 이슈와 향후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1위 무기수출국인 미국은 ‘해외군사재정지원(FMF)’ 제도를 통해 무기 구매 대금을 대출(차관) 형태로 지원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방산, 항공 등 국가전략산업에 한해 OECD 가이드라인이 아닌 별도의 자체 신용등급 제도 등을 적용해 수출금융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최근 선진국의 방산수출 금융지원은 대규모화, 패키지화되는 추세다. 프랑스는 이집트에 라팔 전투기를 수출하며 2015년 계약 금액 59억 달러의 50%, 2021년 계약금액 47억 달러의 85%에 달하는 대출을 통해 대규모 금융 지원을 제공했다.

프랑스어로 '돌풍'이라는 뜻을 가진 라팔 전투기는 이름과 무색하게 등장 초기에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2001년 실전 배치 후 10년 이상 판매되지 않아 '저주받은 전투기'로 불려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상황이 반전됐다. 유럽과 아시아의 군사비 증가와 러시아 제재에 따라 라팔 전투기 주문이 폭주하며 지난 2년간 세계 무기 시장에서 미국 록히드마틴의 스텔스 전투기 F-35 다음으로 많이 팔린 전투기가 된 것이다.

라팔 전투기가 많이 팔리게 된 데에는 프랑스 정부의 적극적인 수출금융 지원이 있었다. 프랑스 정부의 금융 지원으로 수출 물꼬가 트이면서 프랑스는 라팔의 인기에 힘입어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 무기 수출 국가가 됐다.

장원준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회 계류 중인 수은법의 신속한 개정 여부가 최대 300억 달러 폴란드 2차 이행계약 성공의 핵심”이라며 “향후 K-방산 수출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해서는 차별화된 수출금융지원시스템 구축, 수출금융창구 단일화, 한국형 방산수출차관(K-FMF) 제도 도입 등 선진국 수준의 수출금융제도 고도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