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 기업 수익력과 미래 가치 '사람'에 기초
증권가, 엔터사의 앨범 판매량, 공연횟수, 아티스트 컴백 스케줄에 따라 미래가치 결정
4세대 아이돌 팬덤, 육성과 경쟁에 민감
이해관계자들도 다양하다. 한국과 중국의 팬, 기획사, 에스엠(SM) 주주, 그리고 일반인까지. 대중의 인기보다 CD 사는 팬덤이 중요하다아이돌의 연애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K팝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독특한 구조로 인해 기업과 주주에게는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엔터 기업의 수익력과 미래 가치가 ‘사람’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증권가는 매일 각 산업별 분석과 기업 전망을 담은 리포트를 쏟아낸다. 이때 제조업은 매출과 설비투자, 생산성, 자본 대비 수익의 효율을 숫자로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는 지표가 분명하다.
하지만 엔터 산업은 ‘사람 장사’다. 잘 키운 아이돌 그룹 하나가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이때 이 자산의 가치는 ‘인기’로 측정할 수 있다. 인기는 곧 매출과 순이익으로 직결된다. 엔터주의 가치평가가 들쑥날쑥해지는 이유다.
‘대중의 인기’는 핵심이 아니다. 대중은 아이돌을 위해 돈을 쓰지 않는다. 그저 즐길 뿐이다. 인기의 화력은 ‘팬덤’에서 나온다.
애널리스트들은 엔터사의 가치평가를 위해 ‘인기 아티스트’를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이때 앨범 판매량, 공연 횟수, 콘서트 시기 등 아티스트의 컴백 스케줄이 회사의 미래 가치와 수익성을 결정한다. 당장 인기 걸그룹의 재계약, 남자 아이돌의 군입대, 열애설, 갑질논란이 곧바로 주가에 영향을 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SM은 지난해 앨범과 음원을 64개 발매했다. 신규 앨범은 2100만장을 팔았다. 사상 최대치였다. 전년과 비교하면 67% 늘었다. 에스파의 미니 3집 ‘MY WORLD’는 더블밀리언셀러(200만 장 돌파)를 기록했다.
앨범은 말 그대로 CD다. 팬들은 스트리밍 플랫폼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여전히 CD를 구매해 엔터사의 수익을 올려준다. 앨범을 사는 행위 자체가 순전히 팬심에서 비롯된다는 얘기다.
앨범과 굿즈 판매량은 매출뿐 아니라 투자심리의 객관적 지표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SM 소속 가수들의 오프라인 활동도 활발했다. 콘서트는 340회를 개최했다. 2022년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그 결과 지난해 SM 매출은 13% 증가한 9600억원을 기록했고 영업이익은 27% 증가한 1154억원이었다.
결국 아이돌 산업은 ‘팬덤’의 화력이 숫자로 나타나는 싸움이다. 2000년대 들어 ‘팬덤’ 뒤에 ‘경제학’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도 엔터 산업 구조의 특성 때문이다. 팬덤의 힘은 막강하다. 앞서 말했듯 CD플레이어도 없는데 CD를 사고, 온 가족을 총동원해 콘서트 티켓을 치열하게 예매하고, 카페를 통째로 빌려 주인공 없는 생일파티를 열기도 한다. 연예인의 생일을 팬들끼리 자축하는 것이다.
배신의 대가도 크다. 단순히 더 이상 그 아이돌을 ‘소비’하지 않는 ‘탈덕’을 넘어 ‘안티’가 되기도 한다. 이제는 전광판이 달린 트럭에 하고 싶은 말을 써서 회사 앞으로 보내버린다. 최근 카리나 열애설이 뜬 이후 한 중국팬이 보낸 트럭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에스파는 중국 매출 의존도가 높다. 그 중에서도 카리나의 중국 팬덤이 가장 크다. 에스파의 미니앨범 3집의 총 판매량은 205만장이었다. 이 중 47만 6043장은 카리나 중국 팬 카페인 '카리나바'가 공동구매했다. 중국팬의 반발을 회사가 쉽게 흘려보낼 수 없는 이유다.
'육성'과 '경쟁'에 민감한 아이돌 팬덤 여기서 해당 가수의 팬이 아니라면 의문이 들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행복하면 팬도 행복한 거 아닌가?’, ‘어차피 너랑 사귈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분노를 하나?’
하지만 ‘K팝 아이돌’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중이 비난하듯 단순히 ‘유사연애’ 감정을 훼손해서 팬덤이 등을 돌린 것도 아니다. 에스파는 4세대 걸그룹 중에서도 여자팬덤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아이돌판에서 여자 팬덤은 ‘성적’에 민감하다. 내가 응원하는 연예인이 경쟁그룹보다 앨범 판매량이 떨어지거나 인기에서 밀려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K팝 아이돌은 말 그대로 ‘우상’인 동시에 ‘육성’의 대상이다. 한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두고 “아이돌 시장 팬덤은 스포츠 리그 팬덤과 성격이 비슷하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응원하는 야구 구단의 성적이 떨어지면 팬들이 가장 호되게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적을 위해 뜯지도 않을 음반을 한 사람이 수십 장, 수백 장씩 사들이는 것이다.
특히 에스파가 속한 4세대 걸그룹 시장은 K팝 격전지다. 아이브, 르세라핌, 뉴진스 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다. 그 와중에 에스파의 핵심멤버 카리나가 4세대 걸그룹 중 첫 열애설의 주인공이 됐다. 타 그룹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팬들의 타격은 클 수밖에 없다.
정리해 보면 아이돌 산업에서 팬덤 심리에는 친밀감과 참여, 경쟁심리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한다. 이는 곧 엔터 기업의 세일즈 포인트이기도 하다. 곧 친밀감과 참여, 경쟁심리가 떨어지면 이는 기업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팬들의 과한 압박이나 요구가 K팝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히기도 한다. BBC는 이번 카리나 열애설 관련 뉴스를 보도하며 "한국과 일본의 팝스타는 (소속사와 팬들의) 압박으로 악명 높은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짚었다.
에스파는 NCT, 라이즈와 함께 SM의 핵심 브랜드이자 자산이다. 아직 SM의 후속 걸그룹이 없는 상황에서 에스파의 입지는 독보적이었다.
그중에서도 대중성과 코어 팬덤을 모두 잡은 멤버가 바로 카리나였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열애설에 대한 SM의 대응이 아마추어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자필 사과문'은 SM 전략의 부재 카리나의 열애설을 둘러싼 논란의 주제는 다양하다. 한쪽에서는 “아이돌의 연애가 죄냐”는 입장과 “3년 차 아이돌로서 얼굴도 가리지 않고 열애설 사진이 찍힌 건 아이돌로서 최소한의 직업정신이 없는 행동이었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붙는다.
여기서 SM이라는 한국 엔터 산업의 ‘종가’와 같은 회사가 ‘삐끗’한 장면이 등장한다.
카리나가 열애설에 대한 사과문을 올린 뒤 일이 더 커졌다. 대중은 “이게 사과문까지 올릴 일이냐”며 팬덤을 비난했고, 그동안 SM의 수익 창출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던 팬덤은 “가수가 별 내용도 없는 사과문으로 팬덤까지 욕먹인다”며 분노했다.
추후 전략이나 대응책 없이 공개적인 플랫폼에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내용만 있는 자필 사과문은 부정적인 결과만 낳았다.
이를 두고 위기관리 전문가들은 잘못된 대처라고 분석했다. 유민영 플랫폼 9와3/4 대표는 “카리나 열애설이 뜨고 사과문이 올라운 전 과정에 걸쳐 전략적 대응은 없고 반응만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 위기관리의 기본으로 통하는 ‘빠른 사과, 직접 사과’의 원칙을 지킨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돌의 열애설은 기업과 전혀 다른 문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카리나가 아이돌 산업, 에스파라는 그룹 내에서 갖는 포지션을 이해했다면 기획사가 열애설을 막거나 세련된 방식으로 대응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엔터 산업에서 전략을 짜고 위기관리에 나서는 건 아티스트 본인이 아니라 기획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방시혁이었다면 이렇게 대응했을까”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BTS는 데뷔 9년 동안 열애설이 없었다. 데뷔 10년 차에 인기 멤버였던 뷔와 정국의 열애설이 불거졌지만 하이브는 무대응으로 대응했다.
한 엔터 업계 관계자는 “아이돌의 열애설에 관대해진 시대상을 반영해 SM이 열애설을 인정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열애설 선배’였던 블랙핑크, 트와이스는 연애 사실이 밝혀진 이후 응원해주는 분위기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핑크는 글로벌 시장에서 ‘진취적인 아티스트’로 입지를 굳혔고 트와이스는 연차가 오래된 3세대 걸그룹이다. 에스파는 블랙핑크와 달리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매출 의존도가 압도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데뷔 3년 만에 핵심 멤버 카리나의 열애설은 이전 걸그룹 열애설과 성격이 다르다는 입장이 많다.
자충수라 비난받고 있는 사과문 역시 하나의 전략이었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한 여자 연예인이 실언을 하고 큰 비난을 받았지만 사과문을 쓰자 오히려 여론이 ‘동정론’으로 바뀌었던 케이스가 있다”며 “연예인 이미지와 직결되는 인스타그램 피드에 사과문을 올리는 건 기획사의 결정이 아니라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전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