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와 2000년대. 신문에서 큰 관심을 사던 코너가 몇 개 있었다. 퍼즐 그리고 매달, 매주 사회 분야별로 선정하는 ‘인물’ 순위 코너였다.
지금은 한국갤럽에서 5년마다 진행하는 여론조사가 거의 유일하지만 과거에는 여론조사 대표기관에서 선정하기도 했고 각 언론사마다, 다양한 기관에서 뽑기도 했다. 정치·사회·문화부터 경제·경영까지 시대의 인물들이 매주 차곡차곡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반짝 스타이기도 했고 수년째 똑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여론조사가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든 탓일까. 그 많던 영웅은 다 어디로 갔을까. ‘회·빙·환’ 없이 만든 세계 최강국 영웅물의 원조 격인 ‘슈퍼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인 1938년에 탄생했다. 당시 미국은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을 시작으로 닥친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던 시기였다. 배트맨도 캡틴 아메리카도 1939년과 1941년 이 즈음에 태어났으니 영웅 콘텐츠의 범람 시대였다.
문화심리학자 한민은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에서 “1938년 미국의 슈퍼맨은 경제공황에 시달리던 대다수 미국인들의 욕망이 표출된 것”이라며 “미국 사람들이 슈퍼맨이란 가상 영웅의 활약을 통해 억눌렸던 욕구를 해소했다”고 썼다.
심리학에서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또는 충족될 수 없을 때 개인은 불안이란 감정을 느끼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고 한다. 이 방어기제 중 하나가 바로 ‘투사’다.
한민 작가는 “어떤 대상이 기대 이상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현상은 사회 구성원들의 욕구가 그 대상에 투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는 콘텐츠에는 동시대 사람들의 욕망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처럼 슈퍼맨의 시작은 대공황에 시달리던 소시민들의 욕망 해소에 불과했다. 하지만 먼훗날 슈퍼맨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지금의 미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변신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캐릭터가 아닌 진짜 영웅들의 탄생이었다.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막아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들의 첫 슈퍼맨이다.
그는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 대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2월의 연설은 특별했다. 국민들에게 세계 지도를 준비하라고 했다.
루스벨트는 연설 도중 여러 차례 “지도를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역사가 된 한마디를 남긴다.
“고립주의의 착각 속에 살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이들은 독수리가 타조의 전술을 모방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독수리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높이 날고 강하게 공격할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이런 방식으로 전쟁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며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초능력은 없지만 강한 영웅이었다.
또 다른 슈퍼맨은 현대 미국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그는 많은 이슈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하는 능력 그리고 이를 관철하는 설득력까지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젠다도 간명했다. 감세, 예산 절감, 국방력 강화였다. 다시 말해 ‘작은 정부’와 ‘힘의 미국’이었다.
모든 것이 경제 문제였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더 중요한 성공 비결은 취임 1년 내에 이를 실행했다는 점이다.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도 경제 문제를 풀어낸 미국의 영웅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등장부터 ‘영웅의 여정’이었다.
허름한 빈민가에서 꿈을 키워오던 흑인 청년은 부모의 이혼, 마약 경험까지 ‘아웃사이더’의 조건을 고루 갖추고도 정치의 최정상 무대에 올랐다. 오바마는 ‘아메리칸 드림’의 ‘21세기 버전’으로 통했다.
지금은 이견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오바마 열풍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가 교회 총기 난사 사건에서 희생된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 장례식에서 부른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는 인종주의에 대한 증오를 넘어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종차별의 갈등을 봉합하는 해결사이자 상처를 어루만지는 영웅이었다.
경영으로 눈을 돌리면 미국인이 존경하는 스타는 셀 수도 없다. 아니, 세계인으로 확장해도 그렇다. 대표적 인사가 스티브 잡스다. 21세기 그는 신적 존재로 평가받았다. 정보기술(IT)을 비포(before) 잡스, 애프터(after) 잡스로 나눠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종교 외에 전 세계를 하나로 묶은 IT는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에 ‘커피제국’을 세운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는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태어나 세계적 기업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198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커피바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들어 주고, 사람들은 대화를 하는 커피바. 당시 미국에는 없는 모델이었다. 그는 이 커피바를 미국에 6개 매장밖에 없던 스타벅스와 접목해 지금의 전설을 만들었다.
아메리카 영웅의 계보는 현재진행형이다. 전기차 회사 테슬라의 CEO인 일론 머스크는 인류를 구할 비전을 제시하며 일명 ‘머스크 신화’를 만든 인물이다.
머스크는 마치 진짜 슈퍼히어로가 되려는 듯 지구의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를 과감히 선언한다. 그는 배기가스를 줄이기 위한 청정 에너지 개발은 물론 인류의 멸종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할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약속한다. 그가 인류의 구원자로 남을지 아니면 역사적 사기꾼으로 기억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영화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의 실제 모델로 알려질 정도로 영웅 캐릭터에 가깝다.
최근에는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오픈AI CEO의 행보가 주목 받는다. 스마트폰에 이어 차세대 혁신 기술로 주목받는 생성형 AI 시장의 영웅으로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릴 정도다. 신화가 된 K-영웅…10년째 동일 한국에도 존경 받는 영웅이 있다. ‘코리아 드림’을 이룬 창업자들이다. 유사 이래 우리나라처럼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는 없다.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 가난 등 현대사의 아픔을 모두 겪었지만 한국의 실질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해방 직후인 1946년 916달러에서 2018년 3만7928달러로 4000% 이상 성장했다.
기적의 시간, 1세대 창업자들은 폐허에서 제조업에 도전했다. 자본도 기술도 자원도 없었다. 때로는 미국, 일본 등에 기술을 구걸하고 때로는 밤을 새우며 기술개발에 매진했다. 국산화에 성공하자 이내 눈을 해외로 돌렸다. 무역 강국의 시작이다. 창업자의 시대에 조선업은 세계 1위에 올랐고 현대 정주영 창업주는 신화가 됐다.
이어받은 2세대들은 주요 무대를 한국에서 글로벌로 옮겼다. 이들의 손에 의해 한국의 기업들은 글로벌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이 대표적이다.
이 전 회장은 석양이 질 때 운동장에 애써 만든 휴대폰에 불을 질러버림으로써 직원들의 머릿속에 품질이라는 단어를 각인시켰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신경영은 삼성을 넘어 한국 경영사를 바꾼 획기적인 전기가 됐다.
IT 업계에서도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카카오의 김범수, 네이버의 이해진, 다음의 이재웅, 고인이 된 넥슨의 김정주 등은 스타트업을 창업한 후 한국 인터넷과 게임 산업의 역사를 쓴 ‘벤처 1세대’ 전설들이다.
2012~2013년대에도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 왔다. 이때 배달의민족(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 토스(비바리퍼블리카)의 이승건, 컬리의 김슬아 등 신예들이 스타트업의 황금기를 열었다.
하지만 이 역시 10년 전이다. 지금은 이렇다 할 스타 CEO가 부재하다. 존경할 만한 CEO에 이름을 올린 신예 스타는 찾기 어렵다.
한국갤럽이 5년마다 진행하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사람 편’의 최신호 2019년 기준 자료에서 기업인은 △정주영 전 회장(24%) △이건희 전 회장(15%)이 압도적인 표를 받았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6%),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4%), 구본무 LG그룹 전 회장(4%) 등이 뒤를 이었다. 10년 전인 2014년, 20년 전인 2004년에도 비슷한 결과다.
전 분야에서 존경하는 한국인에는 현대인보다 과거의 위인들이 더 많았다.
1위는 이순신 장군(14%), 2위는 세종대왕(11%)이다. 2014년의 1, 2위도 같았다. 공동 3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각 5%로 동일한 지지를 받았다.
이 밖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3%), 중증외상분야 권위자인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1.4%), 전 피겨 국가대표 김연아 선수(1.0%) 등이 존경하는 인물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이 병원장은 해적에게 피격됐던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의 생명을 끝내 살려내면서 ‘아덴만 의료 영웅’으로 전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바뀌지 않은 인물들 중에서 유일한 신규 영웅이기도 했다. 2024년 새롭게 평가한다면 누가 이름을 올릴까. 가수 BTS(방탄소년단), 블랙핑크, 영화감독 봉준호, 축구선수 손흥민 정도가 신드롬급 국민적 지지 후보자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보인다. 이마저도 최근의 신드롬은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컨설턴트 A 씨는 “10~20년 전으로 돌아가보면 ‘안철수 신드롬’과 같은 한 인물에 대한 국민적 성원이 있었다”며 “지금은 ‘네임드’가 사라진 지 오래”라고 평가했다.
그는 원로가 사라진 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처럼 사회 갈등을 봉합하려고 나서는 중재자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현대사에서 몇 안 되는 정신적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던 성탄미사 강론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 움직임을 겨냥해 “인간존엄성과 공동선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라고 비판할 만큼 용감했다. 사회갈등이 격화될 때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은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갔다. 지금 한국의 원로는 누구인가.
오죽하면 1800년대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현대인의 해결사로 등장해 맹활약 중이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쇼펜하우어 관련 도서 전체 판매량은 2023년에만 전년 대비 14.5배, 올해 1월에는 전년 동기 대비 26.5배 폭증했다. 예스24 관계자는 “서점가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쇼펜하우어 열풍”이라며 “염세주의 철학자가 전하는 삶의 고통에 대한 통찰이 현시대 사람들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울림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지금 어느 때보다 ‘영웅’이 필요한 시기다. 미국의 영웅물 시리즈들이 최초 개봉지로 한국을 선택했을 때 문화심리학자 한민 작가는 “유별난 한국인들의 영웅물 사랑은 현실에서 충족하기 어려운 욕구를 초능력을 지닌 슈퍼 영웅들에게 투사한 결과는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1998년 이후 25년째 쓰고 있는 자살률 1위란 오명도, 흙수저와 N포세대로 여겨지는 부의 격차도, 5100만 국민을 가르는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 젠더 갈등 등 한국 사회의 산적한 문제들은 초능력을 지닌 슈퍼 영웅들에서 현실의 영웅들로 해결책이 전이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1800년대 서양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도, 웹 콘텐츠를 장악한 강력한 캐릭터 ‘먼치킨’도 아니다. 대공황에 빠지기 전에 한국 경제를 부흥시킬, 다양한 사회 갈등을 중재할 진짜 영웅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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