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돌아왔지만 배운 건 별로 없었습니다. 대학 갈 때가 되자 아버지는 다시 이 회장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제대로 선진국을 배우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건희의 삶은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회장은 “승계를 준비하는 17년은 아버지와 장인으로부터 거의 듣기만 하며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회장이 된 후에도 그는 세계적 기업의 CEO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습니다. 배우기 위해 일본 기술자들에게 큰돈을 주고 주말에 초청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삼성전자에 일본 고문들이 많았던 배경입니다.
삼성전자는 이 배움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다른 한국 기업들도 미국, 일본 기업들을 배워가며 추월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덴마크의 농촌부흥운동을 모델로 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해외로 나갔던 1970년대, 1980년대 유학생들은 이후 국내로 돌아와 산업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은 배움의 열기로 가득 찼던 나라였습니다.
이 같은 한국의 발전 모델을 따라 배운 나라가 중국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하지 말라는 국가주도의 성장모델을 벤치마킹하며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는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
산업 경쟁력도 높아졌습니다. ‘중국산’이라고 무시하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국내에서 중국 브랜드의 TV, 와인셀러, 스피커, 헤드셋 등은 흔히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최근 중국 브랜드 제품이 100만원을 호가하는 국내 로봇청소기 시장에서 압도적 1위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미국의 제재로 중국은 끝났다’는 얘기를 많이 했지만 중국은 조용히 전기차, 스마트폰, 고가 가전 시장, 우주산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습니다. 카피만 하던 중국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들여다보니 중국의 발전 과정도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아편전쟁으로 비참한 패배를 맛본 중국은 1870년대 체계적 학습을 시작합니다. 120명의 유학생을 뽑아 미국으로 보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몇십 년 후 베이징대, 칭화대 등의 초대 총장과 수많은 해군제독이 이 유학단에서 나왔습니다. 미국이 중국인 유학을 막아버리자 일본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1906년 1만여 명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일본으로 유학생을 파견했습니다. 과학기술 발전이 목표였습니다.
공산화 이후 배움의 장소로 선택한 국가는 소련이었습니다. 핵기술과 기초과학 등 소련이 강점을 갖고 있던 분야의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대학에 과학기술번역학과라는 것을 만들어 미국, 유럽의 논문과 과학기술 문헌을 40여 년간 중국어로 모조리 번역했습니다. 배움의 소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수교를 한 1979년, 수교의 조건으로 가장 먼저 제시한 것도 유학생을 다시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989년 잔혹한 천안문 사태 때도 수많은 대학생들을 처형하는 대신 ‘중국의 보물’이라며 해외로 추방하며 인재를 보존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중국 본토에 들어온 기업들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고급 기술을 갖춘 해외 유학파들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중국으로 끌여들여 기술력을 축적했습니다.
중국에 추격당하는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배움의 시스템이 작동을 멈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공에 도취한 기업들은 배움에 대한 집착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배우고 고민하는 정책가는 사라지고, 정치공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정치꾼이 득세하는 듯합니다.
가장 많이 배워야 하는 싱크탱크에서 새로운 정책이 나와 화제가 됐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시 중국 얘기입니다. 중국의 기술발전이 정체돼 있던 시기가 있었으니 문화혁명기였습니다. 3만8000명의 해외 유학생을 본국으로 송환하고, 공대가 강했던 칭화대 문을 닫는 일도 벌였습니다. 중국 과학기술 발전의 암흑기라고 합니다.
개인, 기업, 국가 모두 새로운 세상 앞에 겸손하지 않으면 오만하게 되고, 이 오만은 배움을 멈추게 합니다. 배움을 멈추는 순간 도태는 시작되는 게 세상의 원리인 듯합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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