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년 만에 수입차 판매 역성장
올해는 판매량은 더욱 꺾여
판매 부진에 연초부터 할인 경쟁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이런 공식에 금이 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벤츠를 누르고 수입차판매 1위를 기록한 BMW다. 심지어 작년 10월 출시한 주력 모델인 5시리즈(풀체인지)까지 현재 1000만원 이상의 할인을 해주는 등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BMW가 출시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차급 모델을 1000만원 이상 할인해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녹록하지 않은 수입차 업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다”고 말했다.
수입차 업계가 연초부터 때아닌 할인 경쟁에 돌입했다. BMW뿐만이 아니다. 벤츠, 볼보 등 주요 수입차 업체들도 연초부터 파격 프로모션 카드를 꺼내들며 할인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유는 국내에서 수입차를 찾는 소비자들이 급격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경기침체 속에서 불어닥친 고금리와 고물가에 더불어 수입차에 대한 한국 소비자들의 인식이 급변한 것이 ‘수입차 외면’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길고 길었던 ‘수입차 전성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수입차 업계가 긴 호황기를 마치고 사실상 불황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은 지표에서도 나타난다.
‘카푸어’ 이미지 덧씌워진 수입차수입차 판매와 관련된 통계는 국내에서 판매하는 수입차 브랜드들을 회원사로 거느린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서 집계한다. 수입차협회가 집계한 작년 수입차 브랜드의 성적표는 업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수입 승용차 신규 등록 대수가 27만1034대를 기록하며 2022년(28만3435대) 대비 1만2401대가 감소한 것이다. 4년 만에 기록한 역성장이다.
애초 수입차 업계는 작년에 국내에서 30만 대 이상의 수입차가 판매될 것으로 전망했었던 만큼 실망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올해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수입차 업체들은 올해 1~2월 국내 시장에서 총 2만9320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전년 동기(3만7844대) 대비 22.5% 감소한 수치다.
1월 실적(1만3083대)의 경우 약 11년 만에, 2월 실적(1만6237대)은 5년 만에 각각 최소 판매량을 기록했다. 수입차 업계의 위기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하다.
한 수입차 딜러는 “수입차 양강인 BMW와 벤츠가 올해 들어 베스트셀링 카인 5시리즈와 E클래스 풀체인지 모델의 본격 판매에 들어간 데다가 이례적으로 연초부터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양사 모두 판매량이 역성장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BMW의 올해 2월까지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6.4%, 벤츠는 22.5% 각각 감소했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5시리즈 등록대수는 올해 1~2월 3286대, E클래스는 1604대를 각각 기록했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입차 판매량이 빠르게 감소하는 것은 국내 경제 상황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고착화된 저성장 기조 속에서 최근에는 금리와 물가까지 치솟으며 소비자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며 지갑을 닫았다는 진단이 제기된다. 게다가 믿었던 부동산 불패 신화마저 깨졌다.
한 수입차 업계 관계자는 “집값이 치솟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자산이 증가했다는 생각에 빠져 수입차를 쉽게 구매하는 성향을 보였다”며 “부동산 침체기가 찾아오면서 고객들의 발길도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강력한 ‘대체재’의 등장도 악영향기하급수적으로 수입차가 늘면서 ‘성공의 아이콘’이었던 수입차 위상이 크게 떨어진 것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국토교통부와 카이즈유에이터 연구소 등에 따르면 국내 수입차 등록 대수는 지난해 300만 대를 돌파했다. 총 승용차 등록대수(2270만 대)를 감안하면 도로를 달리는 차량 10대 중 1대 이상이 수입차인 셈이다.
실제로 서울 강남 지역에서는 현대차의 쏘나타보다 BMW 5시리즈, 벤츠 E클래스 등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어 두 모델을 ‘강남 쏘나타’로 부르기도 한다. 웬만한 고가의 수입차가 아니면 더 이상 ‘하차감’을 느끼기 힘들다는 얘기다. ‘카푸어’들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다. 무리해서 수입차를 사는 사람들이 급증하며 ‘수입차는 부자만이 타는 차’라는 이미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유튜브에 ‘카푸어’라는 단어만 쳐봐도 알 수 있다. 대출을 받거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대부분의 소득을 수입차에 쏟아붓는 ‘카푸어 스토리’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추세가 나타나면서 약 2~3년 전부터 카푸어들이 범접하기 힘든 포르쉐, 페라리, 벤틀리, 람보르기니 등 1억원이 넘는 ‘슈퍼카 구매 열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올해 들어서는 이마저도 시들해졌다.
정부가 1월부터 8000만원이 넘는 고가 법인차에 ‘연두색 번호판’을 달도록 제도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금 혜택을 보기 위해 법인 명의로 차를 구매해 개인 용도로 타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이를 막고자 정부는 연두색 번호판 제도를 시행했고 이는 곧바로 슈퍼카 판매에 타격을 안겨줬다. 1억원 이상의 고가 차량만 판매하고 있는 벤틀리, 람보르기니, 롤스로이스 등의 브랜드가 일제히 판매량이 급감한 것에서도 그 효과를 엿볼 수 있다.
수입차협회에 의하면 올해 1~2월 8000만원 이상의 수입차 브랜드 법인차의 등록대수는 6292대로 전년 동기 대비 26.1% 감소했다.
자동차 관련 온라인 게시판을 보면 “촌스러운 연두색 번호판을 달아야 해 슈퍼카 구매가 고민된다”, “법인차 번호판을 달고 주말에 드라이브를 어떻게 다니냐”와 같은 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수입차 ‘대체재’의 등장도 이 시장을 얼어붙게 만든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현대차의 브랜드 제네시스다. 현대차는 해를 거듭할수록 급성장하는 고급차 시장을 겨냥해 2015년 제네시스를 독립 브랜드로 론칭했다.
이후 이미지 제고를 위한 마케팅, 차량 디자인과 성능 개선에 매년 큰돈을 투입하며 점차 제네시스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제네시스는 해를 거듭할수록 한국 시장에서 고급차 입지를 단단하게 굳히며 수입차로 쏠렸던 수요를 대거 유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제네시스 브랜드 판매량은 올 1~2월 전년 대비 21.5% 증가한 2만1931대를 기록했다. 수입차의 부진 속에서 거둔 성과라 더욱 값지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수입차 카푸어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오히려 제네시스 브랜드가 ‘성실한 직장인’, ‘성공한 샐러리맨’ 등과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진단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한국 수입차 시장은 올해도 반등을 이뤄내기 힘들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수입차 업계에서는 벌써부터 2년 연속 역성장이라는 ‘침체의 늪’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연초부터 수입차 업체들이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진행 중인 것도 이런 부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며 “프로모션 외에도 올해 많은 수입차 업체들이 고객 서비스 및 마케팅 강화를 이어가며 반등을 꾀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