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미국 중앙은행(Fed)의 태도 변화에 양당 후보로 확정된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 전현직 대통령이 ‘제롬 파월 의장에 대해 갖고 있는 불만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Fed는 피벗의 근거로 이번에 내놓은 수정 전망에서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상승률이 목표치(2%)에 근접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Fed는 금리 변경과 같은 중요한 통화정책을 결정할 때 소비자물가지수(CPI)보다 PCE 물가를 중시한다. PCE는 특정품목 가격변동에 따른 소비자의 반응, 즉 대체효과를 감안하지 못하는 CPI의 한계를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CPI 상승률은 3.1%이지만 1월 PCE 가격상승률은 2.4%로 PCE로 본다면 Fed의 피벗 결정을 뒷받쳐준다.
시장에서는 6월 FOMC 회의부터 금리가 내릴 것으로 보고 있다. 3월 점도표에서 나타난 중립금리 수준인 4.6%를 고려하면 물가 재발 우려가 남아 있는 만큼 ‘인하(go)→동결(stop)→인하(go)’ 방식으로 올해는 기준금리 밴드 폭을 현재 5.25∼5.5%에서 4.5∼4.75%로 낮추는 선에 그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3월 FOMC 회의에 앞서 열렸던 유럽중앙은행(ECB) 회의에서도 피벗 추진 가능성을 시사했다. 전통적으로 물가안정을 중시하는 ECB의 목표와 관행을 고려하면 ECB의 결정은 Fed보다 의미가 더 크다. 같은 수위라 하더라도 ECB의 피벗 의지가 Fed보다 더 강하게 시장에 비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유럽 경제는 미국 경제보다 훨씬 부진하다. 체감적으로 ‘침체국면’에 빠졌다는 시각이 나오는 것은 독일 등 유로 핵심국가(good apples)일수록 경기가 안 좋기 때문이다. 물가가 통제권에 들어오면 곧바로 ECB의 통화정책 우선순위를 ‘경기부양’ 쪽으로 선회해야 할 상황이다.
물가부담이 선진국 중앙은행보다 덜한 신흥국 중앙은행은 피벗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인민은행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2년 전부터 금융완화를 추진해 왔다. 올해부터는 증시를 살리기 위해 정책금리를 포함해 모든 금융완화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시진핑 장기집권체제 강화를 위한 금융완화 정책이 중국 경기와 증시를 살릴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작년 1월 이후 금리를 동결해온 한국은행도 3월 금융통화회의에서 피벗 추진 가능성을 내빚쳤다. 오랜만에 만장일치의 결정방식을 깨고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금통위 위원도 나왔다. 시장에서는 Fed의 금리인하 시기 전후에 올해 안에 최소한 두 차례 정도 금리가 내릴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출구전략, 비전통적 통화정책 역순으로 추진해야예외적인 중앙은행도 있다. 바로 일본은행(BOJ)이다. 작년 4월 취임 이후 수익률곡선통제(YCC) 상향 조정을 통해 마이너스 금리 탈출을 위한 사전정지작업을 추진해온 우에다 가즈오 총재는 증시 거품과 높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할 입장이다. 마침내 취임 1주년을 앞두고 열렸던 3월 일본은행 회의에서 마이너스 금리제를 해제했다.
12년 전 일본은행은 ‘잃어버린 30년’까지 우려될 정도로 위기에 몰렸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추진해 왔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 구로다 하루히코 전 일본은행 총재의 주도로 △긴급 유동성 공급 △마이너스 금리 △YCC 순으로 엔화 약세를 유도해 수렁에 빠진 경제를 구하려 했던 것이 ‘아베노믹스’다.
출구전략은 비전통적 통화정책의 역순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중앙은행의 묵시적 관행이다. 우에다 총재가 취임 이후 YCC를 꾸준히 정상화시킨 점을 고려하면 올해 3월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올리고 상징지수펀드(ETF)와 부동산신탁(REIT)을 통한 유동성 공급을 중단하는 조치는 어느 정도 예견돼왔다.
문제는 1990년대 이후 일본은행이 통화정책을 ‘긴축’ 기조로 변경할 때마다 고개를 들었던 ‘대장성(지금은 재무성) 패러다임’과 ‘미에노 패러다임’ 간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3월 회의가 끝나고 벌써부터 재연될 조짐이 일고 있다. 전자는 ‘엔화 약세 유도와 수출 진흥’으로 상징되나 후자는 ‘물가안정과 중앙은행 독립성 유지’로 대변된다.
1990년대 들어 일본 경제는 1980년대 고성장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남아 있는 여건에서 인구고령화, 높은 저축률, 자산 거품 붕괴 등이 겹치면서 복합 불황에 빠졌다. 이때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자민당 요구에 당시 미에노 야스시 일본은행 총재는 물가안정을 고집했다. 결과는 1930년대 대공황을 초래했던 에클스 실수에 비유해 ‘미에노 실수’를 낳았다.
현재 일본 경제도 1990년대 상황과 비슷하다. 장기간 아베노믹스 추진과 코로나 사태가 겹치면서 작년 하반기 성장률이 -1.9%(작년 3분기 -3.3%, 4분기 +0.4%)로 떨어지고 소비자물가승률은 2∼3%대가 지속되고 있다. ‘준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다. 경기부양과 물가안정을 놓고 자민당 패러다임과 미에노 패러다임 간 갈등이 재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상황과 다른 점이 있다. 당시 내각과 자민당은 여전히 높은 국민의 지지도가 최후 버팀목이 됐으나 현재 기시다 내각과 자민당은 ‘아오키의 법칙’에 걸려 있다. 아오키의 법칙이란 내각과 집권당의 지지도가 50%를 밑돌아 어떤 정책도 추진할 수 없는 좀비(zombie·죽은 시체)화된 상황을 말한다.
우에다 총재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루빈 독트린(강달러 유도)’과 아베노믹스로 엔저 효과가 없다고 거듭 확인된 만큼 비정상적인 통화정책을 방치할 수는 없다. 일본의 수출입 구조는 마셜-러너 조건, 즉 외화표시 수출수요의 가격탄력성과 자국통화표시 수입수요의 가격탄력성을 합한 것이 ‘1’을 넘지 않아 엔저가 지속되더라도 경기부양 효과보다 인플레이션 등의 부작용이 더 크게 나타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에다 총재가 과감하게 출구전략을 모색하면 고민이 없어질까 하는 점이다. Fed가 피벗을 시사한 여건에서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리면 ‘안전통화 저주’에 걸릴 확률이 높다. 미국 버클리대의 배리 아이컨그린 교수가 처음 주장했던 안전통화 저주란 경기침체 속에 엔화마저 강세가 돼 일본 경제를 더 어렵게 하는 현상을 말한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엔저든 엔고든 환율이란 매개변수를 통해 당면한 현안을 푼다면 일본 경제는 더 어려운 국면에 몰릴 수 있다. 환율정책은 대표적인 근린궁핍화 정책으로 인접국과 경쟁국에 피해를 주는 이기적 게임이기 때문이다. 어렵더라도 공생적 게임인 내수 확대책을 추진해야 한다.
기시다 정부가 재정지출에 한계가 있다면 일본 국민에게 ‘저축이 미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라는 구호를 내걸고 ‘부(負)의 저축세’와 같은 제3의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 일본은행도 기시다 정부가 내수 확대책을 추진하면 그 성과에 따라 고민하고 있는 디플레이션 탈출속도를 결정해야 한다.
우에다 총재도 대폭적인 금리인상과 같은 급진적 출구전략은 ‘제2의 미에노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 올해 대기업 임금 상승률이 1991년 이후 33년 만에 가장 높은 5.28%에 달함에 따라 임금과 물가 간의 악순환 고리를 우려해 2016년 2월에 설정했던 마이너스 금리제를 해제했다 하더라도 상당기간 금융완화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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