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승계의 원칙, CEO의 자격 [EDITOR's LETTER]
문득 정도전을 떠올렸습니다. 조선의 설계자, 조선의 1호 시민 정도전.

역성혁명을 주도한 그는 ‘사대부의 나라, 재상이 정치의 중심이 되는 나라’를 꿈꿨습니다. 논리는 명쾌했습니다.

“군주의 재능에는 어리석음도 있고 현명함도 있으며 강력함도 있고 유약함도 있어 한결같지 않다.” 왕은 세습되기 때문에 몇 대에 걸쳐 계속 능력 있는 왕이 나올지 장담하기 힘들다는 얘기였습니다.

반면 재상은 선발과정이 있기 때문에 능력 있는 자가 발탁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이어 “군주의 임무는 한사람의 재상을 논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군주가 재상을 잘 뽑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100%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강력한 왕의 나라를 꿈꿨던 이방원과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결국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맞아 죽고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올해 주총 시즌이 마무리됐습니다. 한미약품 등에서 벌어진 경영권 분쟁과 일부 무능한 오너들의 승진을 보며 왜 정도전이 생각났을까. 왕위를 상속받는 것과 기업 총수 자리를 상속받는 것이나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왕위가 잘못 세습되면 나라가 기울 듯, 후계자를 잘못 선택하거나 큰 분쟁이 나면 기업도 어려움에 처하기 마련입니다.

통계가 말해줍니다. 가족기업이 2세대까지 생존할 확률은 30%, 3세대까지 생존할 확률은 14%, 4세대로 가면 이 확률은 4%까지 떨어진다는 해외의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물론 기업환경과 높은 상속세 등의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가족기업의 실패를 20%밖에 설명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후계자 준비 및 능력부족, 가족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등이 대부분 가족기업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유럽의 교훈입니다.

현재 한국의 기업들은 세대교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삼성, 현대차, LG, SK 등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많은 기업들이 1930~40년대에 태어난 창업자들에 의해 1950~80년대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이 창업자들이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상속과 경영권 분쟁이 더 많아질 것을 예고합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1세대가 살아 있을 때도 이 분쟁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국내에서 경영권 분쟁을 겪지 않은 대기업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치밀한 상속 준비와 엄밀한 후계자 선택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경비즈니스의 이번 주 커버스토리는 ‘승계의 시간, 분열의 시간’입니다. 국내 대기업들의 승계 상황 등을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기업 승계와 관련, 많이 거론되는 기업이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입니다. 이 가문이 소유한 기업들은 한때 스웨덴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정부가 환경, 복지제도와 함께 발렌베리를 스웨덴의 3대 자랑거리로 꼽을 정도로 국민의 응원도 받았습니다.

이 발렌베리 가문에서 태어난다고 다 CEO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명문대를 졸업해야 하고, 유학을 다녀와야 한다. 스웨덴의 전통에 따라 해군에 복무해야 하고,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발렌베리 그룹이 만든 CEO스쿨에서 쟁쟁한 인재들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

아마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스웨덴 국민들은 ‘발렌베리 보유국’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기업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오너건 전문경영인이건 회사를 키우고 고용을 확대하고 사회와 함께 성장할 기업을 만드는 경영자가 필요할 뿐입니다.

한국에서도 젊은이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킬 경영자가 나올 수 있을까요? 정주영, 이병철, 이건희를 계속 불러내야 하는 상황은 한국 경제에 비극이 될 것입니다.

김용준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