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유통산업, 2000년대 초반까지 해외 기업 무덤으로 악명 높아
2010년대 '쿠팡' 등장하며 빠른 배송 시스템 자리 잡아
2020년대 들어 온라인 비중 커지고 오프라인 약화

한국, 아마존 성공 보고도 쿠팡 못 막았다[로켓 배송 10년, 유통의 변화①]
2014년 3월 쿠팡이 ‘로켓배송’ 서비스를 출시했다. 빠른 배송이 모토였다. 유통업계의 시각은 냉소적이었다. 물류센터를 짓고, 물류회사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배송까지 하면서 하루 이틀 빨리 배송해주는 게 비효율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10년 후 쿠팡은 한국 유통시장의 선두주자가 됐다. 4월 17일 기준 쿠팡의 시가총액은 네이버와 카카오의 시가총액을 합친 것보다 커졌다. 롯데, 신세계 등 기존 유통의 강자들은 10년간 견제다운 견제도 하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아마존이 급성장하고 월마트와 코스트코가 입지를 넓혀가는 사이 유명 백화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시어스, JC페니, 니만 파커스 등이 파산 리스트에 오른 전통의 백화점들이다. 166년 된 메이시스 백화점도 새 주인을 찾고 있다. 일본에서는 시부야의 상징인 도큐백화점 본점이 문을 닫았고 120년이 넘은 후지마루 백화점은 폐업했다. 아마존, 라쿠텐, 이베이재팬은 성장을 거듭했다.

지난 10년간 유통산업 변화의 핵심은 온라인과 모바일이었다. 승자도 그곳에서 나왔고, 그 변화에 적응한 월마트 등은 입지를 확대했다. 하지만 이 같은 변화의 결과가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유통산업은 또 다른 변화에 휩싸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쉬인 등 중국 업체들이 한국, 미국 등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높여가고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 미국, 일본의 유통산업 재편 과정을 살펴봤다. 무엇이 승자와 패자를 갈랐을까. 미래 유통산업의 재편에도 유사한 법칙이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해외 유통업체의 무덤 한국에 게임체인저 된 쿠팡 한국의 유통산업은 날고 기는 해외 기업들의 무덤으로 통했다. 세계 최대 유통공룡으로 불리는 월마트조차 이마트에 밀려 한국 진출 9년 만에 철수했다. 본사의 판단을 기다리는 등 상대적으로 느린 사업 속도 탓에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추지 못한 영향이다. 이로 인해 2010년대까지 한국 유통시장은 토종 기업들이 주도해왔다.

그 중심에는 전통의 유통 강자들이 있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주요 유통업체는 ‘백화점과 대형마트 3사’에 불과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하는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 자료에는 대형마트와 백화점 실적만 나왔다.

경쟁자가 없는 대형마트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정부는 2012년 골목상권 보호를 이유로 영업시간을 제한하기도 했다. 출점 제한과 의무휴업 등의 규제까지 겹치자 이마트와 롯데마트는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중국 온라인 시장과 베트남 등으로 진출하며 새로운 수익원을 찾기 바빴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10년 전 2014년이다. 2010년 설립된 쿠팡이 익일배송·직접배송 서비스 ‘로켓배송’을 선보이며 시장 균열을 만들었다. 쿠팡 이전까지는 전자상거래 업체가 물류센터를 구축하고 직접 배송하는 사례가 없었다. 쿠팡은 ‘세상에 없던 배송 서비스’를 선보이겠다며 20대 중반의 직원들로 택배 전담팀을 꾸렸다.

2015년 발생한 메르스는 소비자들의 관심을 온라인으로 돌리기 충분했다. 당시 전염병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이 몰리는 백화점, 대형마트 등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했기 때문이다.

이커머스 사용이 늘자 2016년부터 온라인은 주요 유통업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산업부도 이때부터 ‘온라인’을 주요 유통업체로 포함한 매출 실적을 발표했다. 당시 주요 업체는 △오픈마켓 △소셜커머스 △종합유통몰 등으로 분류됐고, 이들이 전체 유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2.4%에 불과했다. 산업부는 “새벽배송, 무료배송 확대 등 소비자들의 온라인쇼핑 편의 개선을 통해 온라인에 대한 소비자 선호도가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오프라인 회사들도 온라인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매장의 성장세는 둔화되기 시작했지만 2018년 온라인쇼핑 거래액은 113조원을 기록하면서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오픈서베이는 “오프라인은 전반적인 하락세인 반면 온라인은 성장세”라며 “오프라인에서 절대 내어주지 않을 것 같던 식료품까지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2020년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이 뜨거웠던 것도 온라인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이마트, 롯데쇼핑, 카카오, SK텔레콤 등이 인수전에 참여했으며 거래액이 20조원에 달한다는 이유로 몸값은 한때 5조원까지 뛰었다. 업계에서는 자체 사업을 키우는 것보다 인수를 통해 몸집을 불리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2021년 신세계그룹이 3조원에 인수, 사명을 지마켓글로벌로 변경했다.

온라인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해 온라인은 사상 처음으로 시장 과반(50.5%)을 넘어서며 주류 업태로 올라섰다. 한국 이커머스 시장 규모는 전 세계 5위 수준이다. 온·오프라인 종합 유통 시장에서 차지하는 이커머스 시장 비중은 한국이 35.8%로 1위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온라인쇼핑 거래액은 227조3470억원으로 전년 대비 8.3% 늘었다.
한국, 아마존 성공 보고도 쿠팡 못 막았다[로켓 배송 10년, 유통의 변화①]
10년 전 아마존 성공 보고도…온라인 유통시장의 성장을 주도한 것은 쿠팡이다. 쿠팡이 단시간 내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국 단위로 빠르게 구축한 물류센터다. 물류와 기술에 대한 투자는 아마존이 미국 유통업계를 장악한 전략이기도 하다.

당시 쿠팡의 결정은 ‘도박’에 가까웠다. 2014년 쿠팡이 물류센터에 15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업계는 쿠팡의 선택을 부정적으로 봤다. 기존 물류 회사들이 시장을 주도하는 상황에 자체 물류를 확보하겠다는 선택 자체가 무모하다는 판단이었다. 특히 다음 날 도착하는 ‘빠른 배송’을 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데 물류센터에 투자하는 것은 불필요한 지출이며 수익성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쿠팡 이전까지 대다수의 회사들은 물류회사와 협업하는 방식으로 상품을 배송해왔다.

그러나 쿠팡의 생각은 달랐다. 쿠팡은 초기 투자 대부분을 물류센터에 집중했다. 당시 쿠팡은 만년 적자를 내던 오픈마켓에 불과했지만 경쟁자를 ‘대형마트’로 겨냥했다. 물류가 차세대 성장동력이 되면 소셜커머스를 넘어 아마존과 같은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2015년에 이미 경기, 인천, 대구 등에서 7개 물류센터를 확보했으며 9만㎡ 이상의 인천물류센터도 구축했다. 2016년까지 물류센터를 10개로 확대하겠다고 공언했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2015년 말부터다. 빠른 배송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맘카페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쿠팡 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2016년 쿠팡은 소셜커머스 사업을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직매입 서비스를 강화해 상품과 배송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판단이었다. 마진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매출은 늘었지만 수천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이때부터 쿠팡은 ‘계획된 적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투자 역시 줄이지 않았다.

반면 기존 유통업체들의 투자 속도는 비교적 느렸다. 이마트는 2014년 경기도 용인에 온라인 전용 물류센터 1호점인 보정센터를 구축하고 2년이 지난 2016년 들어서야 김포에서 두 번째 온라인 전용 물류센터를 가동했다. 2020년까지 구축하겠다고 발표한 온라인 물류센터 수는 ‘6개’에 불과했다.

롯데마트도 마찬가지다. 쿠팡이 이미 7개의 물류센터를 확보했을 때 2015년 롯데마트는 김포에 온라인 전용 물류센터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향후 3년간 수도권에 한해 온라인 전용 물류센터를 2~3개 추가로 오픈하겠다고 발표했다. 2016년 쿠팡의 물류센터는 이미 16개로 확대됐고 2024년 현재 쿠팡이 보유한 전국 물류센터 규모는 100여 개에 달한다.

결국 오프라인은 온라인에 완전히 패배했다. 이마트, 롯데마트 등은 코로나19 이후 비효율 점포를 정리하기 위해 지난 4년간 22개 점포를 폐점했다. 롯데마트는 코로나 직후인 2020년에 전국 12개 매장을 폐점했으며 이마트는 지난해에만 4개 점포를 폐점했다. 또 쿠팡, 이마트 등에 밀려 고전하는 롯데쇼핑은 사업 통폐합과 축소를 시도하고 있다. 2022년 마트와 슈퍼 사업부를 합친데 이어 지난해에는 롯데슈퍼 온라인 사업을 중단하는 결단까지 내렸다.

대전 향토백화점인 ‘백화점세이’는 경영난이 악화되면서 2022년 초 자산관리회사인 투게더투자운영에 매각됐다. 백화점세이는 오피스텔로 용도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현대백화점 부산점이 매출 부진을 견디지 못하고 오는 7월을 기점으로 영업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업모델은 존재한다. 대규모 부지를 활용해 초대형화를 진행한 백화점과 복합쇼핑몰 등은 온라인 시대에도 버텼다. 신세계 센텀시티점(2009년), 신세계 대구점(2016년), 스타필드 하남(2016년) 등이 대표적이다. 올해 오픈한 스타필드 수원 역시 축구장 46개 크기로, 수원 지역의 최대 쇼핑몰이다. 2021년 개장한 현대백화점의 더현대 서울도 마찬가지다. 더현대 서울의 영업면적은 8만9100㎡(약 2만7000평)에 달하며 서울 내 단일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백화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배송 품질은 고객 재구매 의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이커머스의 핵심”이라며 “유통업의 미래는 ‘라스트 마일’에 달렸다”고 설명했다. 라스트 마일이란 주문한 물품이 배송지를 떠나 고객에게 직접 배송되기 바로 직전의 마지막 거리 또는 순간을 위한 배송을 의미한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