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 개미’가 울상이다. 미국채 10년물 금리는 심리적 저항선인 4.5%를 돌파하더니 4.7% 가까이 치솟았다. 전문가들은 10년물의 금리 상단을 4.8%까지 올려 잡았다. 긴축의 마무리 국면에서 채권 매수에 나선 투자자들은 끝나지 않는 긴축에 수익은커녕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위기에 처했다. 연말연시 ‘기승전 사자(매수)’ 분위기는 축제를 한순간에 악몽으로 바꿔버렸다. 예상보다 길어진 고금리 여파다. 시기상조 금리인하? “금리 인하기에는 채권 투자입니다.”
재테크에 관심이 없는 투자자라도 연말연시 한번쯤은 이 문구를 봤을 것이다. 올해 초 재테크 시장의 중심에는 채권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긴축의 마무리 국면’에서 채권 비중을 높이라고 조언했다. 채권 가격은 금리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에 금리인하 시기에 채권가격이 오른다. 따라서 비중 확대는 재테크의 필수지침과도 같았다. 전문가들은 특히 금리가 정점을 기록할 올 상반기에 채권 투자가 유효한 전략이라고 추천했다.
**[금리가 인하되면 장기채 가격은 오르기 때문에 차익 실현을 할 수 있다. 만기 1년 채권은 금리가 1%포인트 내리면 가격이 약 1% 오르지만 10년 채권은 10%, 20년 채권은 20% 정도 오른다.]
연말연시 발 빠른 한국 개인 투자자들이 채권 매수에 집중했고 ‘안전자산’이란 우산 아래 슈퍼 리치의 자산이 채권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장의 금리인하 기대치는 대단히 높았다. 올해에만 최소 4회, 많게는 6~7회 금리인하 단행을 예상했다.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도 지난 3월 7일 “물가상승률이 2%를 향해 안정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확신이 더 생기길 기다리고 있다”며 “그 확신을 갖기까지 멀지 않았는데(not far from it) 확신을 갖게 되면 긴축의 강도를 완화하기 시작하는 게 적절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파월 의장의 발언에 3월 시장은 ‘축제’를 준비했다. 파월 의장 발언 이후 6월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은 58.2%까지 치솟았다. 미국의 금리 추이를 예측할 수 있는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페드워치는 Fed가 6월 첫 번째 금리인하를 시작해 올해 0.25%포인트씩 총 4번(총 1%포인트) 낮출 확률이 가장 높다고 예상했다.
채권시장도 반색했다. 파월 의장 발언 직후 10년물 미국채 금리는 전 거래일 대비 0.05%포인트(p) 하락한 4.1%로 거래를 마쳤다. ‘고금리 막차’를 타려는 투자자들이 채권시장으로 밀려들었다. 최근 한 달간 개인 투자자들은 미국 장기채 ETF를 총 2526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이는 같은 기간 개인이 가장 많이 사들인 종목 5위에 해당하는 규모다. ‘엔비디아’ 못지않은 인기였다.
시장의 기대가 무너진 건 4월 초 미국의 3월 고용 및 물가 지표가 나오면서다. Fed의 금리 방향을 결정짓는 고용과 물가 지표가 예상을 뛰어넘자 시장은 백기를 들었다. 페드워치에 나타난 6월 기준금리 동결 확률은 81.1%로 뛰었다. 물가 발표 전날 52% 이상의 확률로 6월에 미국 기준금리가 내려갈 것으로 봤던 시장이 급히 마음을 돌린 것이다. 시장이 예상한 인하 시기는 이제 6월이 아니라 9월로 늦춰졌다.
채권 금리도 치솟았다. 미국의 물가지표(CPI)가 공개된 4월 10일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심리적 저항선인 4.5%를 돌파했다. 4월 17일 기준으로 4.6%대에서 움직이며 4.7% 상단을 넘보고 있다. 이는 작년 11월 이후의 최고치로 5개월 만의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의 경기가 견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채권 투자자에게는 부정적이다. 미국의 경기가 견고한 모습을 보일수록 Fed의 금리인하 기대감이 후퇴하기 때문이다. 경기가 좋을 때 ‘안전자산’으로 평가 받는 미국 국채의 몸값이 떨어지는 이유는 굳이 안전자산에 투자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고용, 물가 그리고 미국채 10년물 금리 등 미국의 경기지표가 이를 보여준다.] 마이너스 ETF, 추격 매수 신중해야 고금리가 유지된다는 건 채권 투자자들에게는 비보다. 금리인하를 예측한 한발 앞선 투자자들은 아직까지 손실을 보고 있다. 특히나 미국 장기채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한 개인 투자자들은 최소 2~3년가량 버티기에 나서야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 장기채에 투자하는 대표 상품인 한국투자신탁운용의 ‘ACE 미국30년국채액티브(H)’ ETF는 최근 한 달간(3월 17일~4월 17일) 하락률이 13.38%다. 이 종목은 상장 1년 만인 지난 3월 27일 순자산액 1조원을 돌파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연초 이후 해당 ETF에 유입된 자금 5106억원 중 2172억원이 개인투자자로부터 들어올 정도로 ‘채권 개미’들의 대표 상품이었다.
같은 기간 장기채 ETF인 KB자산운용의 ‘KBSTAR 미국장기국채선물레버리지(합성 H)’(-10.76%),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미국채30년스트립액티브(합성 H)’(-10.35%), ‘TIGER 미국30년국채프리미엄액티브(H)’(-7.03%), ‘ACE 미국30년국채액티브(H)’(-6.81%) 등도 약세다. 이는 코스피 지수가 같은 기간 0.83% 오른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6월 금리인하를 기대하며 연말연시 미국채 홍보에 집중적으로 나선 증권가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KB증권은 올해 1분기 리테일채권 판매액이 4조3000억원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이 중에서도 개인 투자자 대상 국채 판매액은 1조1000억원 이상을 기록했다. 이는 KB증권 전체 리테일채권 판매액의 약 3분의 1 비중을 차지한다. 이 기간 브라질 국채는 2014억원, 미국 국채는 2218억원의 판매액을 기록했는데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65%, 34% 증가한 수치다.
이 밖에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 등도 쏠쏠한 실적을 올렸다. 삼성증권은 올초 이후 2월 15일까지 약 한 달 반 만에 지난해 한 해 동안 판매액(1조7500억원)의 약 35%에 해당하는 금액을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는 웃었지만 상당수 투자자는 ‘비자발적 장기투자자’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주가 상승의 2~3배를 추종하는 레버리지 상품을 담은 투자자라면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제 채권 투자자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Fed의 금리인하 시나리오다. 현재 시장은 6월을 넘어서 9월 인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미국 대선이 11월이란 점은 최대 변수다.
임재균 KB증권 애널리스트는 “Fed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독립성을 지킬 것으로 예상되지만 대선이라는 큰 정치 이벤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현재 시장은 9월 인하를 반영하고 있지만 9월은 미 대선 전 열리는 마지막 FOMC 회의다. 대선을 앞두고 금리인하를 단행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으며 대선이 끝난 직후인 11월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임 애널리스트는 “금융시장 입장에서 12월 인하 혹은 2024년 인하를 완전히 배제하는 시나리오를 고려해야 한다”며 “금리인하를 기대하면서 장기물 채권에 투자했던 투자자 입장에서는 올해 금리 하락폭의 기대를 낮춰야 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금리인하에 대한 보수적 접근이 강해지면서 추격 매수에 대한 신중론도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채권은 시간과의 싸움인 것을 양지하고 긴 호흡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금리 하락에 대한 확실한 시그널이 관측될 때 투자를 해도 늦지 않다”고 조언했다.
정채희·김영은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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