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국 경제 짓누른 ‘新 3고’①]
환율이 1400원으로 치솟은 4월 16일 명동의 환전 거리.
환율이 1400원으로 치솟은 4월 16일 명동의 환전 거리.
한국 경제가 고물가·고환율·고금리란 ‘신(新) 3고(高)’ 위기에 직면했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청구서’가 들이닥치고 있고, 중동 리스크는 유가 압력을 다시금 높이고 있다. 총선 리스크에 고유가까지 겹치며 한국 경제의 인플레이션 파고는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1400원을 터치한 고환율 시대는 물가의 복병으로 작용할 터다.

미국에서는 기준금리 인하 대신에 더 높은 수준에서 장기간 유지되는(higher for longer) 상황이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연내 금리 인하가 확실시 되었던 예측은 틀린 것일까. 오늘을 만든 장면들을 짚었다. 고물가의 시작, ‘아메리카 퍼스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슬로건이 적힌 모자를 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슬로건이 적힌 모자를 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그러니까 모든 시작은 이 구호에서 출발한다. 8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2016년 11월 8일 밤 미국 최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앞세운 제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했다.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 ‘MAGA’는 세계화와 맞물린 자유무역과 국경을 넘는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주를 비판하는 게 핵심이었다. 당시 선진국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화가 선진국 내 불평등과 빈곤층을 확산하고 있다’는 회의론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노동이민과 자유무역으로부터 미국 시민(러스트벨트의 백인 기층민)을 보호하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은 상상 이상의 힘을 얻었다. ‘미국 물건을 사라, 그리고 미국인을 고용하라(Buy American and Hire American).’

이날 미국 대선의 결과는 곧 유럽과 북미 지역 그리고 아시아 지역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글로벌 공급망의 문제로 번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이 2020년 9월 9일 미시간주 워런의 전미자동차노조(UAW) 본부에서 '바이 아메리카'를 슬로건으로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이 2020년 9월 9일 미시간주 워런의 전미자동차노조(UAW) 본부에서 '바이 아메리카'를 슬로건으로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트럼프에 이어 미국 대통령에 오른 조 바이든은 의원 시절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만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를 더 강경하게 이어갔다.

2021년 4월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3개월 만에 연 ‘반도체 대응 최고경영자(CEO) 화상 정상회의’는 한국이 미국의 공급망 문제에 중요한 일원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이었다.

이 자리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웨이퍼를 집어 들며 반도체를 미국 기반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국(삼성전자)과 대만(TSMC)이 있었다. 미국 기반 사업으로 키우려면 반도체 강국인 한국과 대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하에 해외 기업의 생산공장을 미국 본토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코로나19에 따른 반도체 등 핵심 부품 공급 차질과 중국의 성장은 이 같은 공급망 재편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도 대만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뿐 아니라 ‘칩스법’으로 불리는 반도체법을 잇따라 발표하며 전 세계 설비 투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백악관은 지난해 11월 “‘바이드노믹스’의 영향으로 전 세계 국가들이 미국으로 모여들고 있다”며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유의미한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고 밝혔다. 무려 2000억 달러(약 258조6000억원)에 가까운 투자가 2021년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아태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 중심에 한국 기업이 있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 SK온과 삼성SDI, 한화큐셀과 LG화학, 씨에스윈드 등. 백악관 측은 “특히 한국 기업의 최근 대미 투자 규모는 아태 지역 투자의 4분의 1을 넘는 최소 555억 달러(약 71조800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한국과 아태 지역의 투자금은 미국 전역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미국 제조업의 부흥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다. 2022년 한 해에만 한국 기업이 미국에 만든 일자리는 3만5000여 개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공급망 재편으로 이뤄낸 미국의 성과는 황홀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재임 2년 동안 350만 개의 일자리가 나왔고, 미국 제조업은 활황을 맞이했다.

미국 인구조사국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제조업 관련 건설 지출은 사상 최대인 1080억 달러(약 142조원)를 기록했다. 공장 건설 지출이 학교나 의료센터, 사무실 건물보다 더 많았다. 신설 공장의 절반가량은 전기차 배터리와 반도체 관련 산업이었다.

크리스 스나이더 UBS 애널리스트는 “2022년 미국의 생산능력은 2015년 이후 가장 강력한 성장세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여기엔 미국 정부의 각종 보조금과 세액공제 등 대규모의 재정지출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 기간 한국이나 대만 내에서 이뤄진 대규모 투자는 거의 없었다.

②편에서 계속…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