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국부와 K-방산[김홍유의 산업의 窓]
우리 산업의 역사를 살펴보면 혁신의 중요성과 국가 경제의 발전경로를 볼 수 있다.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할 때 우리에게는 자동차 산업 될 수 없다고 반대했으며,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시작할 때도 불가능하다고 반대했다. 포항제철 건설과 원자력발전소 건설도 반대했다. 하물며 산업의 대동맥 역할을 하는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반대했다. 우리 모두 불가능과 반대를 외쳤던 과거 역사다. 우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도 이 어이없는 계획의 비현실성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세계에 유례가 없는 성공했고, 누구나 다 아는 자랑스러운 신화가 되었다.

무엇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는가? 1960년대 인구는 2500만 명이었다. 그 당시 공대 출신을 다 합해도 오늘날 카이스트 한 해 졸업생 숫자에도 못 미친다. 자본은 없고 기술은 더 없었으며 기술자는 구할 수도 없었다. 신화의 궁극적 요인은 무엇인가? 당시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자산은 국가의 리더십과 못 배운 가난한 국민밖에 없었다.

1969년 1월 삼성전자는 이름도 모르는 후진국의 작은 회사 36명으로 설립되었다. 이병철 회장은 기업이 지속 발전을 하려면 오직 하이테크 산업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1983년 이병철 회장이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도쿄 선언을 발표하자 일본 미쓰비시연구소에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 5가지 이유는 협소한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작은 회사 규모, 빈약한 기술 등이었다. 우리나라에 많은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있지만 이런 기적 같은 성공의 궁극적 요인을 분석한 이는 드물다. 모두 ‘원인과 결과의 인식편향’에 사로잡혀 저것 때문에 이것이 발생했다고 편협한 사고를 한다.

196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 벤처 국가였다. 피터 드러커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한 세대 30년 동안 공무원과 선생보다 국가 성장을 위해 최고 인재를 이공계에 투입하였기 때문이다. 제조업 기반인 이공계 대학 졸업생 수가 인구 대비 가장 높은 나라이며, 미국 공대 졸업자와 비슷한 수를 배출했다. 고등학교 8개 반 중 6개 반이 이과이며, 전교 1등에서 10등이 공대를 선택한 것은 당연하였고 대입고사 전체 수석은 늘 공대 지망생이 차지했다. 이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글쓰기 잘하는 사람을 과거로 선발, 사회 최고 대우를 했던 사농공상 구조를 깨는 일이었다.

1997년 자본주의 속성상 거품은 늘 붕괴하기 마련이지만 그 이후 사회풍토는 ‘각자도생’으로 급변하였다.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엔지니어보다는 직업의 안정성에 더 민감한 반응을 하여 공무원, 의사, 변호사로 회귀하였다. 이공계의 위대한 산업 전사는 국가 성장의 부품으로 사용되고 버려졌다는 분노와 좌절감에 사로잡혔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직접 민주주의는 그 의도와 달리 조직과 권력을 가진 목소리가 큰 계층에게만 유리하게 작동하고 이들을 견제할 장치는 없다. 국가가 지속 성장에 역량을 얼라인먼트(alignment)하기보다는 포퓰리즘으로 나라 살림이 거덜 날 지경이다. 대기업이나 강소기업들은 틈만 나면 해외로 갈 궁리를 하고 있다. 지금의 국경은 사람 이동은 어렵지만 자본 이동은 쉽다. 또다시 질곡과 같은 조선 시대의 사농공상, 도덕주의로 회귀하려는 절망감마저 든다.

우리는 자유와 시장경제, 민주주의 체제를 되돌릴 수는 없다. 이것을 기반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그 많은 포퓰리즘 자금의 일부라도 지금 국가 경제의 신성장동력인 K-방산 투자해야 한다. 1960년대 자동차, 철강이 혁신의 이이콘이었다면 지금은 K-방산을 비롯한 스마트 방산이 혁신의 아이콘이다. 우리의 강점인 IT와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방위산업과 융합을 통한 새로운 국부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임무는 개인의 인센티브를 자극하고 한곳에 집중하도록 얼라인먼트하는 일이다. 이 길이 K-방산을 모티브로 잃어버린 국부를 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김홍유 경희대 교수(한국방위산업협회 정책위원, 전 한국취업진로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