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직 공무원 A 씨는 입사 후 첫 결재를 기안했다가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수기문서(공직사회는 놀랍게도 수기결재 문화가 일부 남아 있다) 결재란에 큰 글씨로 서명을 한 게 화근이었다. 상사는 A 씨에게 서명란의 바닥에 바짝 붙여서 최대한 작게 쓸 것을 권고했다. 직급이 오를수록 서명의 크기가 커져야 하니 기안자나 중간검토자는 바닥 부분에 붙여 쓰는 게 ‘관행’이란 지적이었다.
A 씨는 불현 듯 3년 전 기사를 하나 떠올렸다. 팬데믹이 한창일 당시인 2021년 재택근무가 시작된 일본에서 ‘겸양 도장 문화’가 화제가 되고 있단 소식이었다. 결재 도장을 찍을 때 상급자란을 향해 인사하듯이 기울여 찍어야 한다는 건데 계장은 90도, 과장은 45도, 부장은 30도로 직급이 오를수록 기울기가 줄어드는 문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상상하기 어려운 문화라 당시에도 한국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됐다. 물론 비웃음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관행이라니. A 씨는 “낮은 급여와 악성 민원만 해결하면 공무원의 인기가 오를 것이란 건 착각에 불과하다”며 “꼰대들이 조성하는 숨 막히는 조직문화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최근 공직사회에서는 소위 ‘쌍팔년도’ 조직문화를 개선하지 않는 한 공무원의 이탈, 사고 등을 막기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그간 공무원의 면직, 자살 등이 늘어나는 이유로 ‘낮은 보수’와 ‘악성 민원’ 등이 꼽히면서 이 둘에 대해서는 일부 개선책이 나오고 있지만 조직문화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란 지적이다.
이제는 혁파해야 할 공무원 꼰대문화 톱5를 꼽았다. 말 그대로 이제는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악습이다. ① “어딜 감히 큰 도장을?” 최근 직장인 커뮤니티 플랫폼 ‘블라인드’에는 ‘공무원 꼰대문화 중 하나’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수기문서 결재란에 서명의 크기가 직급이 오를수록 커지는 앞서 A 씨가 지적한 사례였다.
A 교육청 소속이라고 밝힌 작성자는 “직급이 낮을수록 칸 아래에 작게 쓰고 높은 직급이면 가운데에 크게 싸인한다”고 전하며 인증 사진 한 장을 게재했다. 그의 말대로 기안자의 서명은 칸의 가장 바닥에 깔려 작게, 중간검토자는 그보다 조금씩 크게, 최종결재자는 칸을 가득 채운 큰 글씨로 서명했다.
댓글은 충격으로 휩싸였다. 전자결재 시스템을 만든 지가 언제인데 ‘실화’냐는 물음이 쏟아졌다. 10년 차 공무원이지만 듣도 보지도 못한 경우라는 댓글도 쏟아졌다. 그러자 더 충격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전자결재도 직급이 높을수록 서명 칸이 넓어지고, 최종결재자는 서명에 볼드체를 하는 식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성토는 계속됐다. 관리자 직급이 큰 도장을 찍을 수 있도록 도장 크기도 직급에 따라 달라야 한다거나 서명할 때 이름 마지막 받침의 꼬리는 오른쪽으로 뻗쳐 올려 써야 한다는 등의 ‘제보’도 이어졌다. 하나같이 조직의 위계질서가 결재란에 반영된 관행이었다. ② “과장님 모시는 날”“메뉴 안 겹치게 미리 모셨던 부서에 한번 물어봐.”
지방구청 소속 B 씨는 지난해 7월 큰 미션을 하나 하달받았다. 각 부서의 계별로 돌아가며 부서장(과장)의 점심을 챙기는 건데 B 씨에게도 해당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른바 ‘과장님 모시는 날’로 7~9급 하위직 공무원들이 4~5급 상당의 국장 및 과장급 공무원들의 식사를 챙기고 식사 비용을 갹출해 지불하는 일이었다.
상급자와 식사를 하는 것은 일반 사기업에도 흔한 일이지만 공무원의 ‘과장님 모시는 날’은 흔하지 않았다. 식사 비용을 하위직에서 갹출해 내는 일이었고 ‘순번’대로 돌아가며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모실 때마다 3만~5만원은 써야 하니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공직사회에서는 없어진 관행이지만 아직도 일부 지자체와 공기업에는 ‘과장님 모시는 날’이 남아 있다. 지난해 6월에는 충북 제천에서, 지난해 12월에도 부산 금정구청 소속 간부공무원이 부하 직원들의 개인 식비로 지속적으로 식사대접을 받았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이 간부공무원은 하급직원에게 순번을 정해 점심 일정을 적은 쪽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유사하게 ‘시보떡’ 돌리는 문화도 있(었)다. 시보떡 돌리기는 보통 6개월의 시보 기간을 마친 초임 공무원이 동료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떡을 돌리는 관행이다. 과거에는 ‘미풍’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과도한 비용과 직원 간 차별 문제로 대표적인 악습이라는 비판을 받아 대부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③ 인수인계 ‘NOPE’“초등학생한테 당장 미적분하라고 하는 거라니까요.”
교육행정기관에서 근무하는 행정직의 C 씨는 입사 후 3개월은 ‘멘붕’ 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전임자에게 업무에 대한 설명을 받긴 했지만 달랑 한 시간이 끝이었다. 전자문서를 어떻게 쓰는지도, 지문등록조차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상급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당장 내일부터 처리할 업무 많으니까 빨리빨리 하세요.”
공무원의 인수인계는 그야말로 ‘말 많고 탈 많은’ 문화다. 직무기술서처럼 업무가이드에 대한 공통적이고 기본적인 매뉴얼은 있지만 이마저도 달랑 한 장으로 압축 요약한 게 대부분이다. 일을 아는 사람들이야 한 장으로도 업무를 간파할 수 있지만 신규라면 얘기는 다르다. C 씨는 “매뉴얼을 어디서 찾아봐야 하는지 모를 만큼 신규인데 그조차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조직 특성상 업무가 겹치는 직원을 찾기가 어려울뿐더러 인수인계를 해야 할 전임자도 타 기관이나 부서에서 새로 배워야 하는 시기이니 인수인계를 해주기 어려운 악순환이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전임자가 업무 가이드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도 실상 불가한 영역이다. 지침이나 방식이 계속 변하기도 하고 이동발령 주기도 빠듯하다. 가이드를 만들었다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 전임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일각에선 ‘물귀신 작전’이란 말도 나온다. C 씨는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놀부 심보로 인수인계를 안 해주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수인계 문화는 결국 공무원의 업무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2021년 9월에는 D 시청에서 한 9급 공무원이 적절한 직무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큰 부담을 떠안다가 스스로 목숨을 거둔 안타까운 사고도 발생했다. 유족들은 7급 행정직이 하던 업무를 갓 임용된 공무원에게 맡기면서 모르는 부분을 물어도 ‘알아서 해야 한다’는 식의 답변이 돌아왔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④ “악성 민원인도 소중한 한 표”“민원 들어오는 건 어떻게든 해줘.”
지방직 9급 공무원 D 씨가 부서 회의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민원’이다. 그의 책상 한 귀퉁이에는 ‘포스트잇’이 두 장 크게 붙어 있다. “악성 민원인에게도 친절해야 한다”, “민원 제일주의”가 크게 적힌 종이다. D 씨는 악성 민원으로 고통받을 때마다 포스트잇을 보며 참을 인을 세 번 새겼다고 말했다.
한때 기업과 자영업자 사이에선 “손님이 왕이다”란 문구가 성공비결처럼 쓰였으나 이제는 “종업원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입니다”란 문구가 더 먹히는 시대다. 공직사회는 예외다. 여전히 민원은 ‘만능 키워드’다. 지자체 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이 ‘선출직’이다 보니 민원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악성 민원이다. 매뉴얼에 불가하다고 쓰여진 일도 악성 민원이 잦으면 해결이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학부모들이 모인 커뮤니티에는 “국민신문고에 진정민원, 집단민원 넣으면 해결된다”는 댓글이 꿀팁처럼 쓰인다. 민원 수위가 높아질수록 내부에서는 ‘해결방안을 강구하라’는 목소리가 커진다. D 씨는 “‘악법도 법’이란 말처럼 악성 민원도 민원이자 선출직에겐 소중한 한 표(민원인)”라고 주장했다.
최근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김포시청 공무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정부는 내부 특별팀까지 꾸려 악성 민원에 대한 공무원 보호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공무원 집단 내에서는 지자체 단체장을 선출직으로 뽑는 한 악성 민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⑤ “퇴사하고 싶을 땐 나무를…”“소통, 공감, MZ란 말만 들어도 경기가 나요.”
지난해 공직사회를 들썩인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ㅊ시청 공무원들의 ‘나무 심기’다. 지난해 4월 22일 시청사 앞 정원에선 새내기 공무원 53명이 직접 나무를 심고 심은 나무에 본인의 이름을 표찰로 붙였다. 식목일이면 식수행사가 비일비재하니 큰 문제 없는 행사였다. 기획 의도가 전해지지 않았을 때까지는.
시는 자료를 내고 최근 공무원의 퇴사 등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통해 새내기 공무원의 업무 적응을 높이고, 공무원이라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즉 9급 공무원의 이름이 적힌 나무가 함께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퇴사를 막는 일종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였다.
당시 공직사회에서 MZ세대의 이탈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를 때였다. ㅊ시청도 2021년에 7명, 2022년엔 10명 등 새내기 공무원들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와 악성 민원, 보수적인 조직문화가 원인으로 꼽혔다. 나무 심기의 명분은 좋았지만 공무원 이탈의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었다. 나무 심기 1년 후 ㅊ시청에서 공무원을 그만둔 사람은 지난해 말 기준 32명으로 1년 전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사표를 낸 직원은 모두 6급 이하였다.
젊은 공무원들 사이에선 “MZ를 그만 놔주었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MZ세대의 이탈을 막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하며 소통과 공감을 강조하고 있지만 오히려 신경 써야 할 일이 더 많아지거나 불편한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지적이다.
이 밖에도 공무원들이 뽑는 숨은 꼰대문화는 한둘이 아니다. ‘공익’보다 빠르게 10분 먼저 출근하도록 눈치를 주거나 상급자보다 좋은 차(비싼 차)를 타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눈치를 주는 경우도 왕왕 있다. 3년 차 지방공무원 E 씨는 “조직 내부에서는 여전히 요즘 애들이 돈만 밝히고 의지가 없어서 퇴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80년대 조직문화를 고칠 생각이 없는 무사태평에 미래가 보이지 않아 면직을 희망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내부 자성의 목소리가 외부에 전해지면 ‘누칼협’으로 토론의 장을 막는 경우도 사회적 문제다. 누칼협이란 ‘누가 칼들고 (공무원 하라고) 협박이라도 했냐’는 신조어인데, 여기선 공무원들을 비난할 때 쓰인다. 본인이 선택했으니 불평하지 말란 뜻이다.
공직사회의 기초가 되는 신입 공무원의 지속적인 이탈현상은 공공서비스 질 하락으로 이어져 그 피해를 국민들이 오롯이 떠안게 된다. 공무원 유튜버 ‘충주맨’ 김선태 충주시 주무관은 최근 한 신문 기고를 통해 “그런데 나는 불평마저 사라질까 두렵다. 어차피 잘리지도 않는데 대충 처리하고 불공정한 일을 봐도 불평하지 않고. 그럼 언젠가는 시민에게 되레 이렇게 말하는 공무원이 나올지도 모른다. ‘누가 서류 제대로 준비 안해 오라고 칼들고 협박했냐’라고.”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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