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 2010년대 중국서 폭발적 성장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등 대기업 주도
국내 한방 화장품, 국빈용 선물로
면세점서 '없어서 못 살 제품'으로
에스티로더, 로레알 등 세계적 브랜드
앞다퉈 국내 인디 브랜드 인수
중국에서 미국으로, 대기업에서 인디 브랜드로
주역도, 시장도 다 바뀌었다…K뷰티 시즌2 개막] 2019년 K-뷰티 위기론이 등장했다. 최대 시장 중국에서 존재감이 약해진 탓이다. 저가 시장은 중국 내 화장품 업체들이, 고가 시장은 글로벌 브랜드가 장악하며 한국 업체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듬해 코로나19로 치명타를 맞았다. 대표주자인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의 실적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수만 개에 이르는 국내 화장품 업체들은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새로운 브랜드와 업그레이드한 제품으로 해외시장 공략에 나섰다. 중국보다 일본, 미국 등이 주 타깃이었다. 그 결과 올해 상반기 화장품 수출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 아마존이 K-뷰티를 잡기 위해 먼저 손을 내미는 일도 있었다. 중국이란 시장을 배경으로 급성장한 2010년대를 연상케 하는 새로운 전성기라는 의미로 “‘K-뷰티 시즌2’가 시작됐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K-뷰티 시즌 1’의 주인공은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 등 대기업이었고 핵심 시장은 중국이었다. K-뷰티 시즌2의 주인공은 중소 인디브랜드들이며 주요 시장은 일본과 미국이다. 그사이 급성장한 K-콘텐츠는 K-뷰티의 글로벌 확산을 가능케 해준 1등 공신이다.
K-뷰티 시즌2도 시즌1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대륙을 개척해 본 경험과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시즌1이 남겨준 값진 자산이다. 1992년 중국의 영향력을 예견한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일찌감치 중국 진출을 선언한 이후 지난 30년간 노력이 있었다. K-뷰티를 글로벌 ‘대세’로 만든 장면을 살펴본다. 시즌1과 시즌2로 나눠 총 10개의 키워드로 살펴봤다. 1. 중국1992년 한국은 중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수교를 맺었다.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은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한국 경제의 성장 경험으로 볼 때 중국에도 큰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1993년 선양시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며 중국 시장 문을 두드렸다. 전략은 고급화였다. 고급 이미지를 심기 위해 선양·창춘·하얼빈 등 3개 지역의 백화점과 전문점에 아모레 제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저가·가성비’였지만 중국 시장에서 포지셔닝을 달리했다.
아모레퍼시픽은 동시에 TV 광고로 젊은 여성들을 공략했다. 당시 개혁·개방으로 서구화된 라이프스타일이 자리 잡았고, 이로 인해 고가의 프리미엄 제품 선호도가 높아진 중국 고소득층과 중산층 소비자 특징을 파악해 빠르게 시장 선점에 나섰다.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아모레퍼시픽은 뒤이어 라네즈의 중국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년간 시장조사와 중국 내 여견을 검토한 뒤 현지 생산라인까지 구축했다.
그러나 중국 시장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화장품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드라마가 시장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2003년 MBC 드라마 ‘대장금’이 2005년 중국에서 방영을 시작하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화장품 판매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2013년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 크게 흥행하며 2014년부터 K-뷰티는 중국에서 대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국 화장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구매대행을 해주는 조선족 방문판매 따이궁(중국인 보따리상)이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
K-뷰티 제품은 중국 여성들의 ‘워너비 브랜드’(사고 싶은 제품)로 등극하며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렸다. 아모레퍼시픽 제품뿐만 아니라 K-뷰티 전 제품군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미투제품까지 등장했다. 아모레퍼시픽 설화수를 베낀 현지 ‘월화수’, 네이처리퍼블릭과 유사한 ‘네이처리턴’, LG생활건강의 ‘수려한’을 따라 한 ‘수여한’ 등이 등장했다. 가장 인기 있는 판매채널은 면세점이었다. 국내 면세점의 핵심 고객은 유커(중국인 관광객)과 따이궁이었다. 이들이 면세점에서 국내 제품들을 대량으로 구매해가자 1인 구매한도를 ‘브랜드별 5개’ 또는 ‘제품별 5개’ 등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따이궁이 대량으로 매입해 정가보다 싸게 재판매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금액 역시 1인당 최대 1000달러 또는 2000달러 등으로 한도를 정했다. 당장의 수익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브랜드 가치를 지키겠다는 결정이었다.
이 시기 대(對)중국 화장품 수출액은 급격히 증가했다. 중국 시장이 한국 화장품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대 20% 수준에 그쳤으나 2010년대 후반 들어 40%까지 확대됐다. 2017년 중국으로 수출한 화장품 규모는 19억4000만 달러로 10년 전인 2007년(1억 달러)과 비교하면 20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2. 마스크팩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마스크팩은 ‘덤’에 불과했다. 제값을 주고 사기에는 아까운 제품으로 인식돼왔다. 로션, 에센스 등을 구매하면 사은품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화장, 피부화장 등 화장품 종류를 구분할 때 마스크팩을 분류할 카테고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사용하고 돈을 내고 마스크팩을 구매한다는 개념은 2000년대 자리 잡았다. 짧은 시간을 투자해서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시트 마스크팩이 인기를 끈 시점이기도 하다.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은 2004년 조인성을 모델로 기용해 4000원대 가격의 남성용 마스크팩을 출시했고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이후 애경이 이서진을 활용한 마스크팩 제품을 출시하며 여성 고객뿐만 아니라 남성 고객까지 확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스크팩은 내수용이었고 그마저도 일부만 사용하던 제품이었다. 대중화가 되고 수출품으로 자리 잡은 것은 2012년 등장한 ‘메디힐’의 영향이다. 당시 메디힐은 시중 제품보다 1000원가량 비쌌다. 메디힐을 판매하는 엘앤피코스메틱은 ‘비싼 만큼 제값을 한다’는 인식을 심었고 지금의 ‘1일 1팩’ 문화까지 만들어냈다. 메디힐은 고객이 취향에 맞춰 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200여 종에 달하는 마스크팩을 선보였다.
일본 관광객, 중국 관광객들은 한국 여행 기념품으로 ‘메디힐 마스크팩’을 앞다퉈 구매했고 인기가 많아지자 메디힐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미국, 캐나다 등 26개국에 진출했다. 2016년에는 매출의 60% 이상이 해외에서 발생했다. 메디힐 마스크팩은 2017년 단일 품목으로 누적 10만 장을 판매하고 엘앤피코스메틱은 2018년 1억295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3. 시진핑 부인 펑리위안글로벌 시장에서 K-뷰티 제품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빈용 선물’까지 등극했다. 통상 외국 정상 등 귀빈을 위한 선물을 준비할 때 고가의 선물보다는 자국을 상징할 수 있는 선물을 마련한다. 전통공예품, 특산품, 소개 책자 등이 대표적인 국빈용 선물에 해당된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방중 당시 국빈 선물로 ‘설화수’를 선택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를 위한 것으로 진설라인, 실란 컬러팩트, 퍼펙팅 쿠션 등으로 구성됐다.
중국에서 한국 한방 화장품의 인기가 치솟고 아모레퍼시픽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자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당시 베이징, 상하이 등 주요 도시의 최고급 백화점 116개 매장에서 판매됐고 중국 언론 인민망의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한국의 명품’ 조사에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 연속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펑 여사는 한국 화장품을 애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펑 여사가 2014년 방한 당시 LG생활건강의 ‘후’ 제품을 구매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당시 펑 여사가 후를 사용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유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중화권 인기 화장품으로 입지를 굳혔다. 펑 여사는 중국에서 셀럽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한국 화장품 사용은 K-뷰티 시즌1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4. 대기업한국 화장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 시기 K-뷰티 산업은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이 주도했다.
실제 K-뷰티의 글로벌 영향력이 높았던 2016년 우리나라의 화장품 수출액은 15억8000만 달러(당시 약 1조6500억원)였는데, 이 시기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의 화장품 부문 해외 수출액은 1조1840억원이다.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2%에 달했다. LG생활건강의 화장품 부문 해외 매출은 2008년 185억원에서 2018년 1조4199억원으로 크게 뛰었다. 아모레퍼시픽 역시 같은 기간 362억원 수준의 해외 매출이 크게 뛰었다. 다만 아모레퍼시픽은 2017년 이후 화장품 부문의 해외 매출액에 대해 구체적인 공시를 하지 않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화장품 생산 실적’에 따르면 2018년 화장품 생산 실적은 15조5028억원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아모레퍼시픽이 4조5558억원(29.39%)으로 1위를 차지했으며 LG생활건강이 4조5005억원(29.03%)으로 2위를 기록했다. 이들 회사의 생산 점유율은 58.4%에 달했다.
또한 당시 가장 많이 판매한 상위 10개 품목 가운데 LG생활건강 5개, 아모레퍼시픽 4개 등 9개가 이들 제품으로 파악됐다. 대부분은 후와 설화수의 제품이었다. LG생활건강은 이 시기 매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며 사상 최대를 기록하지 못한 것이 뉴스가 될 정도였다. 5. 글로벌 브랜드K-뷰티의 글로벌 영향력이 높아졌다는 것은 글로벌 기업들의 선택으로 증명된다. 코로나 직전까지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국내 뷰티 브랜드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그 시작은 미국 화장품 기업 에스티로더다. 2015년 에스티로더는 스킨케어 브랜드 닥터자르트를 운영하는 해브앤비 지분 33.3%를 인수해 2대 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에스티로더 측은 K-뷰티, 특히 스킨케어 브랜드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만큼 트렌드 선도 측면에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후 에스티로더는 2019년 나머지 지분까지 전량 인수했다. 에스티로더가 아시아 브랜드를 100% 소유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에스티로더는 닥터자르트가 톰포드, 조말론, 바비브라운 등과 함께 매출 상위 10개 브랜드에 속할 만큼 실적이 좋다는 것을 인수 이유로 꼽았다.
2016년 글로벌 1위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와 베인캐피털 컨소시엄이 카버코리아를 인수했다. 카버코리아는 홈쇼핑에서 입소문을 탄 화장품 브랜드 AHC를 운영하는 회사다. 업계에서는 K-뷰티 열풍이 글로벌로 확산되자 IB업계가 빠르게 나서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컨소시엄은 카버코리아 대주주인 이상록 대표가 보유한 지분 40%를 2800억원에 인수했다. 이후 컨소시엄은 지분 20%를 추가로 매입해 총 60%의 지분을 확보했다. 여기에 투자한 금액은 4300억원에 달한다.
이듬해 이들이 확보한 지분은 영국 기반의 생활용품 제조기업 유니레버로 넘어갔다. 심지어 카버코리아의 몸값은 1년 만에 조 단위로 뛰었다. 유니레버는 컨소시엄이 보유한 지분 60%를 22억7000만 유로(약 3조600억원)에 인수했다. 세계 최대 스킨케어 시장인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류가 아시아 시장을 강타하고 있으며 중국을 포함한 신흥 뷰티 시장에서 가장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전했다.
LVMH도 나섰다. 2016년 LVMH가 주요 주주로 있는 사모펀드 L캐터튼은 색조 브랜드 클리오에 5000만 달러를 투자해 7%의 지분을 확보했다. L캐터튼은 한국이 아시아 소비자 트렌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고품질의 뷰티 제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해 K-뷰티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러 기업들이 K-뷰티 브랜드에 관심을 가지자 프랑스 화장품 기업 로레알도 움직였다. 2018년 패션·뷰티 기업 스타일난다를 6000억원에 사들였다. 회사 매출의 70% 지분을 차지하는 색조 브랜드 3CE를 확보하기 위한 결정으로 아시아 중저가 뷰티 시장 입지를 빠르게 강화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들의 공략 포인트도 중국이었다. 중국이라는 폭발하는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교두보로 한국 브랜드를 선택한 것이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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