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산업 1등 항해사 이승한 인터뷰
부경대 해양수산학과를 다니던 이승한이란 청년에게 붙여진 별명은 ‘강남’이었다. 부경대에서 보기 드문 ‘대치동 키즈’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곡초, 대청중, 단국대사대부고를 졸업했다. 치열한 사교육 경쟁이 펼쳐지는 강남 8학군에서 그는 공부도 꽤 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꿈이 달랐다. 그는 바다로 가고 싶었다.초등학생 때 수영부 활동을 했을 정도로 물을 좋아했다. “넓고 무한해 보이는 바다가 좋았다”고 했다. 성숙했던 그는 중학교 때 짐 로저스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았다. “앞으로 1차 산업이 주목받을 것이다”란 내용이었다. 1차 산업과 바다, 그 연결 지점인 해양수산업을 찾아준 것은 선장으로 살았던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은 선장이 돼서야 비로소 시야가 생겼다고 말씀을 하셨다. 선원들을 이끌며 느낀 책임감과 사명감이 가슴을 뛰게 했다는 말을 듣고 선장을 꿈꾸기 시작했다.”
학업 성적도 우수했던 아들이 “바다로 가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아들의 꿈을 응원했다. 이승한은 “좋은 대학을 가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컸다”며 “실패하더라도 남들과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고 했다.
바다로 가기 위해 이 항해사는 부경대 해양생산학과에 입학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대학생 시절 그는 책 한 권에 큰 영향을 받았다. 동원산업 김재철 회장의 삶과 경영을 다룬 ‘김재철 평전’이다. 서울대 대신 바다를 선택하고 세계적 수산기업을 일군 김재철 창업자의 얘기에 깊은 울림을 느껴졌다. ‘발상을 전환해 진취적으로 세계로 뻗어나가자’는 김 회장의 ‘거꾸로 세계 지도’ 철학에 깊이 공감했다.
이승한은 학교에서는 부지런한 모범생이었다. 해양생산학을 전공하며 의료관리자 자격증도 땄다. 학부 3~4학년엔 동원육영재단의 ‘섬김의 리더십 장학생’으로 선정됐다. 학부를 수석 졸업하고 해양수산부 장관상도 받았다.
항해사가 된 그는 2019년 여름 마침내 항해를 시작했다. 바다는 만만치 않았다. 태풍의 가장자리를 지나며 20m 높이의 파도와 싸울 때는 무섭기도 했다. 때로는 육지의 집, 가족,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한번 출항하면 1년 정도 조업을 이어가야 한다. 항해를 하다 때때로 집으로 가는 길과 그 길을 걷고 있는 제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다. 그러면 그날 밤엔 집에 있는 생생한 꿈을 꾸기도 한다.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면 순간 집에 다녀온 것 같아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아직 선상에 있다는 현실에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꿈꾸던 바다는 때때로 그를 외로움의 망망대해로 흘려보내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냐고 물었다. 그는 “바다에 있느라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을 때였다”고 했다. 바닷사람의 숙명과도 같은 이별 공식이었다.
그래도 선상에서 가족과 통화는 할 수 있었다. 작업을 끝내고 저녁 시간에 가족들과 통화를 한다. 때때로 동료들과 작은 파티를 열기도 한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면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랬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봉쇄로 육지에 배를 댈 수 없어 무려 18개월간 바다에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때도 쉬지 않고 꾸준히 경력을 쌓은 덕분에 승진이 빨랐다. 배를 탄 지 4년여 만에 1등 항해사가 됐다.
올해 28세 청년인 이승한은 만선의 기쁨도 느꼈다. “마지막 항차에 만선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그가 승선한 배는 항상 최고 수준의 어획량을 기록했다. 지난해 승선한 본아미호는 동원산업 역대 최고의 어획 실적을 올렸다. 드론으로 참치떼의 이동을 탐지 추적하는 선망어업에 대한 이 항해사의 이해도가 그 누구보다도 높기 때문이다. 그는 “드론을 활용한 어군 탐지는 기존 헬리콥터 탐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용을 낮출 수 있고 선원들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선장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선장과 항해사가 협업해 참치가 많은 곳을 파악하고 잡은 참치를 끌어올려 안전하게 배에 싣는 모든 작업 과정에서 선원들의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
그는 뱃사람에 대한 편견과 달리 수산업의 본질도 변했다고 했다. “뱃사람이라고 하면 거친 이미지를 연상하지만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을 접목한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에 가깝다”고 했다. 동원산업 선망선을 기준으로 해기사들의 평균 소득은 또래 직장인보다 3~4배 높다. 통상 1년간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 6~12개월 쉴 수 있다. 동년배 직장인에 비해 직업적 안정성이 뛰어나고 그만큼 첫 주택 마련 시기가 빠르다.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이 항해사는 “오랫동안 축적된 원양어선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이 해기사를 청년층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만선 외에도 그가 느낀 환희가 있었다. “일반 직장인이라면 평생 한 번도 가보기 힘든 파푸아뉴기니, 솔로몬제도, 투발루, 크리스마스섬 등 남태평양과 적도 지역까지 가본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사모아를 비롯해 픽사애니메이션 ‘모아나’의 배경인 폴리네시아에서 조업 경험은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거친 파도, 바닷바람과 맞선 경험 때문일까. 그에게서는 MZ세대 젊은이에게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단단함과 진중함이 엿보였다.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김재철 회장의 이야기에서 ‘밝고 넓은 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젊지만 이승한 항해사의 이야기도 그렇게 들렸다.
‘김재철 평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묻자 “대양을 항해하는 선장이 가장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본선의 위치다란 말씀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현재 스스로의 위치와 상황이 어떤지,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또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되묻게 됐습니다. 스스로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정확히 파악해야만 항로를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한의 꿈은 동원산업 대표다. 이를 위해 최근 대학원에 진학했다. 항해사와 선장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쉬운 선택보다 힘든 선택일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는 선택을 했으면 한다”고 답했다. 이어 “가장 좋아하는 격언이 있다. ‘배는 부두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존재의 이유는 아니다.’ 첫 시작이 두렵고 도전이 힘들겠지만 무슨 일이라도 시도해보고 그 분야에서 노력하다 보면 반드시 작은 성과라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 선택의 자유는 본질적 권리다. 많은 젊은이들이 좀 더 안정적이고 근무여건이 좋은 곳을 원한다. 이런 때 꿈을 찾아 험한 바다로 향한 이승한이란 청년의 꿈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지 않을까.
(미니박스) 해양 관련 고등학교나 학부를 졸업해도 바다로 나가려는 청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한국선원복지고용센터가 발표한 ‘2024년 한국선원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해기사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2016년 2만여 명이었던 해기사는 지난해 1만8500여 명으로 10.3% 줄었다. 선원 연령대는 점차 고령화하고 있다. 25세 이상, 50세 미만의 선원 취업현황을 보면 2016년 1만800여 명에서 2023년 8900여 명으로 줄었다. 반면 60세 이상 선원은 1만2300여 명에서 1만3200여 명으로 7.3% 증가했다. 외국인 선원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집계를 시작한 2017년 2만5000여 명이었던 외국인 선원 수는 지난해 3만여 명으로 20.3% 증가했다. 원양어선의 경우 2017년 3800여 명이었던 외국인 선원 수가 2022년에 4200여 명으로 11.5% 늘었다.
전설리 한국경제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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