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SK그룹의 전략 컨트롤타워인 ‘SK수펙스추구협의회’가 그룹 리밸런싱 작업을 계기로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그룹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로 구성된 의사결정 협의기구로 SK(주)·SK이노베이션·SK하이닉스 등 20여 개 멤버사가 참여하고 있다.

SK그룹만의 고유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따로 또 같이’ 경영의 실행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수펙스는 ‘수퍼 엑셀런트(Super Excellent Level)’의 줄임말로 인간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을 말한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계열사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중장기 투자 전략과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M&A 등 그룹의 큰 그림을 그리는 핵심 두뇌 역할을 맡으며 변천해왔다. 법인 성격의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인력이 다른 계열사에 적을 두고 파견 형식으로 소속돼 있다.

SK그룹 리밸런싱으로 그룹의 사업 방향성이 ‘BBC’(배터리·바이오·반도체)에서 ‘ABC’(AI·배터리·반도체)로 전환함에 따라 수펙스추구협의회에도 변화가 생겼다.

SK그룹은 지난 6월 28∼29일 열린 경영전략회의에서 7월 1일자로 수펙스추구협의회에 ‘반도체위원회’를 신설하고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을 위원장에 보임했다. 반도체위원회에는 SK하이닉스를 비롯해 SK스퀘어·SKC·SK실트론·SK머티리얼즈 등이 참여한다.

수펙스추구협의회에 특정 사업을 위한 위원회가 신설되는 것은 처음이다. 그룹 전반적으로 군살 빼기와 체질 개선을 벌이는 가운데 반도체위원회를 신설한 것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밸류체인에 관련된 계열사 간 시너지를 강화해 글로벌 경쟁에 선제 대응하기 위한 취지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 위원회는 기존 7개에서 8개로 늘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6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노소영 아트나비센터 관장과의 이혼 소송 항소심 관련 입장을 밝히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6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노소영 아트나비센터 관장과의 이혼 소송 항소심 관련 입장을 밝히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AI 전략부터 총수 리스크까지 총력 대응

2021년부터 각 계열사 이사회의 합리적 결정을 돕는 역할만 해왔으나 지난해 12월 오너일가인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이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맡아 SK그룹 리밸런싱 작업을 진두지휘하면서 역할이 더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에는 최태원 회장의 이혼소송 재판 현안 대응의 최전선에 나서며 주목받았다. 총수 개인사와 관련해 수펙스추구협의회가 직접적인 개입에 나서는 것은 이례적이다. SK그룹 성장에 노태우 전 대통령과 6공화국의 비자금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항소심 판결 때문이다.

이형희 커뮤니케이션위원장은 “이번 항소심 판결로 SK그룹 성장 역사와 가치가 크게 훼손된 만큼 이혼 재판은 이제 회장 개인의 문제를 넘어 그룹 차원의 문제가 됐다”며 “6공의 유무형 지원으로 성장한 기업이라는 법원 판단만은 상고심에서 반드시 바로잡고 싶다”고 말했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따로 또 같이’ 문화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조직을 운영해왔다. 전문경영인과 이사회를 통해 ‘따로’ 경영하고 상호 협력이 필요한 부분은 수펙스추구협의회를 통해 ‘같이’ 조정해왔다.

하지만 그간 성장동력이었던 ‘따로 또 같이’는 역설적으로 방만한 투자를 불러왔다. 계열사들이 신사업에 중복으로 진출하며 비효율이 극심해졌지만 전문경영인, 계열사 자율경영 체제에서는 교통정리가 쉽지 않았다. 과감한 구조조정을 위해 강력한 오너십의 필요성이 대두함에 따라 최창원 의장이 사업 재편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사진=SK수펙스추구협의회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사진=SK수펙스추구협의회
최창원, 강력한 오너십으로 리밸런싱 주도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빠르게, 확실히 변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며 ‘서든데스(돌연사)’ 위험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 이후 연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부회장단을 전면 교체한 뒤 최창원 의장을 해결사로 투입했다. 그룹 전반의 방만한 투자와 느슨해진 조직 문화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최 의장은 고(故) 최종건 SK그룹 창업회장의 막내아들이자 최 회장의 사촌동생이다. 최 의장은 2007년 SK케미칼 대표를 맡아 기존 섬유회사에서 바이오 회사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하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룹 내 ‘사업 구조조정 전문가’로 꼽히는 최 의장은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리밸런싱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선택과 집중으로 그룹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업과 투자 우선순위 조정, 계열사 수 감축, 조직개편, 인력 조정 포함 최적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6월 28일 경기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경영전략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SK수펙스추구협의회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6월 28일 경기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경영전략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SK수펙스추구협의회
50년간 경영기획실→구조본→수펙스로 변천

수펙스의 역사는 50년 전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시절인 1974년 경영기획실 사장단회의에서 시작됐다. SK그룹은 1998년 선경에서 SK로 사명을 변경하고 구조조정추진본부(구조본)로 전환했다가 2003년 SK글로벌 사태 이후 그룹 체제를 이사회 중심 독립경영체제로 운영하기 위해 구조본을 전격 해체했다.

SK그룹은 2013년 최 회장의 공백 속에서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정점으로 한 경영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문경영인들이 경영 전면에 서는 의사결정 라인을 구성했다.

최 회장은 2012년 ‘2차 CEO 세미나’에서 “지주회사와 회장이 단독으로 그룹 경영을 결정할 수 있는 시대는 갔다”면서 수펙스추구협의회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지주회사가 모든 계열사의 주요 사안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보다 각 계열사 전문경영인이 자율적으로 판단한 뒤 ‘집단지성 체제’인 수펙스추구협의회에서 조율하는 의사결정구조가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삼성의 미래전략실, LG의 구조조정본부, 롯데의 정책본부, 한화의 경영기획실 등은 오래전부터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왔다.

주요 그룹의 컨트롤타워는 계열사 업무를 조정하고 장기 관점에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휘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재계의 청와대’라 불렸지만 오너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총수에 쏠리던 권한을 전문경영인과 이사회로 분산하는 만큼 선진 지배구조 구축에도 기여한다는 평가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위원장 8명, 서울대·유공·SKT 출신 대세


수펙스추구협의회에는 전략·글로벌위원회, 반도체위원회, SV(소셜밸류)위원회, 거버넌스위원회, 인재육성위원회, 환경사업위원회, ICT위원회, 커뮤니케이션위원회 등 8개 위원회가 있다.

최 의장은 수펙스 의장과 전략·글로벌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다. 최 의장 아래 장용호 환경사업위원장(SK(주) 사장), 박상규 인재육성위원장(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 이형희 커뮤니케이션위원장, 지동섭 SV위원장, 유영상 ICT위원장(SK텔레콤 사장), 정재헌 거버넌스위원장(SK텔레콤 대외협력담당 사장), 곽노정 반도체위원장(SK하이닉스 사장) 등 7명의 전문경영인이 각 위원회를 이끌고 있다.

인적 구성을 살펴보면 1960년대생과 서울대 출신이 많다. 8명 중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최 의장을 포함해 장용호(경제학)·박상규(경영학)·지동섭(물리학)·유영상(산업공학)·정재헌(공법학) 위원장 등 6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이형희·곽노정 위원장은 최태원 회장의 모교인 고려대 출신이다. 이형희 위원장의 경우 최 회장과 신일고, 고려대 동문이다. 1962년생으로 올해 62세인 이형희 커뮤니케이션위원장이 가장 나이가 많고 1970년생으로 54세인 유영상 ICT위원장이 가장 젊다.

출신 부서는 다양하지만 SK그룹에는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인 유공과 SK텔레콤 출신이 그룹 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위원장 중에도 유공 출신 3명(장용호·박상규·지동섭), SK텔레콤 출신 2명(이형희·유영상), SK하이닉스 출신 1명(곽노정) 등 유공과 SK텔레콤 출신이 여전히 강세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