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공매도 과징금 부과 첫 취소 판결
줄소송 과징금 산정 기준 ‘흔들’
2021년 4월 공매도 제한 위반에 대한 처벌과 과징금 처벌이 강화된 이후 나온 첫 판결로 향후 유사 사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의 불법 공매도 제재에도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법원 “케플러 과징금 산정 기준 잘못”
서울행정법원 제4부(김정중 재판장)가 지난 8월 23일 외국계 금융회사 케플러쉐브레가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과징금부과처분취소’ 소송에서 “과징금 10억6300만원의 부과처분을 취소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케플러는 2021년 9월 고객사로부터 A 펀드 계좌의 SK하이닉스 주식 2만9771주를 매도 주문할 것을 지시받았다. 이에 케플러는 한국의 C 증권사에 B 펀드를 통해 에코프로에이치엔 주식 2만9771주를 매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틀 뒤 증권사는 분산해 총 4만1919주에 대한 매도주문(호가)을 제출했고 최종적으로 2만977주에 대한 매도계약이 체결됐다.
문제는 B 펀드는 해당 SK하이닉스 주식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본시장법이 금지하고 있는 ‘공매도’를 한 것이다. 공매도란 당장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타인으로부터 주식을 빌려 매도 주문을 내는 투자 기법이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빌린 후 매도하면 합법이나 빌리지 않은 채로 매도하는 무차입 공매도는 불법이다. 이에 증선위는 2023년 7월 18일 케플러에 과징금 10억6300만원을 부과했다.
케플러 측을 대리한 법무법인 화우는 “원고가 증권사에 전달한 주식 매도 수량은 2만9771주에 불과함에도 4만1919주를 기준으로 과징금을 산정한 것은 ‘책임주의 원칙’ 등에 반하여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과징금 산정 기준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자본시장조사 업무규정은 기본과징금 산정의 기준금액을 자본시장법 제180조를 위반한 공매도 주문금액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케플러가 실제 매도를 요청한 주식 수량은 2만9771주였으나 증권사에서 4만1919주에 호가를 낸 금액을 기준으로 과징금이 산정된 점이 적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또한 케플러의 행위가 A 펀드의 등록번호를 전자시스템에 잘못 기입한 단순 과실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다만 케플러가 과징금 처분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변호사는 “과실에 의한 공매도도 과징금 처분 대상이지만 감형 이유는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은 금융당국의 과징금 부과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시장의 불만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재판부는 “이 사건 과징금 처분은 비례의 원칙과 책임주의 원칙에 위반되는 등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며 “행정법규는 엄격하게 해석·적용해야 하고 행정처분의 상대방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확장·유추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ESK운용 판결 등 남은 소송에 영향
이번 판결은 오는 11월 예정된 ESK자산운용의 과징금 취소 소송 선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증선위는 2023년 3월 8일 에코프로에이치엔 주식에 대한 공매도 제한을 위반한 ESK자산운용에 대해 38억원 상당의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이는 자본시장법 개정 이후 증선위가 최초로 과징금을 부과한 사건이다.
오스트리아 소재 ESK자산운용은 2021년 8월 4일 국내 D 증권사에 GTC 형태(한 번 제출하면 취소할 때까지는 유효한 주문으로 인정)로 한 차례 에코프로에이치엔 주식에 대한 매도 주문을 위탁했다.
유럽과 달리 한국거래소는 GTC 형태의 주문이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 증시는 주문의 유효기간이 하루이기 때문에 증권사가 또다시 호가를 내는 바람에 중복해서 산정돼 공매도 위반 규모가 책정됐다.
ESK자산운용 측 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세종은 “8월 4일 제출한 4만3564주에 대한 공매도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인정하고 있으나 8월 5일 이후에 제출된 24만6488주에 대한 매도 주문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이에 따라 발생한 16만7180주에 대한 공매도에 대한 책임까지 지우는 것은 과도하다”고 주장했다.
증선위는 ESK자산운용의 공매도 주문이 과실로 인한 주문 오류라는 점을 인정해 위반행위 동기를 중과실에서 과실로 낮추고 미체결 주문금액에 대한 감경률을 50%에서 70%로 조정했다. 이에 따라 당초 예고된 79억원의 과징금은 38억7400만원으로 조정됐다.
실제 공매도 주문보다 많은 수량을 기준으로 과징금이 부과됐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케플러 사건에서 법원이 지적한 과징금 산정 기준의 문제와 유사하다. 만약 ESK자산운용의 소송에서도 법원이 케플러 판결과 유사한 논리를 적용한다면 금융당국의 과징금 부과 결정이 취소될 가능성이 커졌다. 또한 외국계 금융회사들의 추가적인 소송 제기를 촉발할 수 있다.
‘상습 불법 공매도’ HSBC 재판은
한편 HSBC 홍콩 법인과 소속 트레이더 3명이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재판도 주목받고 있다. 이번 사건은 자본시장법상 불법 공매도 형사처벌 규정이 신설된 후 첫 사례다.
이들은 2021년 8~12월 투자자들로부터 주식을 빌리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 지점 증권부에 차입을 완료한 것처럼 거짓 통보한 뒤 호텔신라 등 9개 상장사 주식 총 157억8468만원 상당을 공매도 주문한 혐의를 받고 있다.
HSBC의 경우 케플러·ESK자산운용 사례와 달리 단순한 실수나 과실이 아닌 의도적이고 반복적인 불법 행위로 의심받고 있어 법원의 판단이 주목된다. 최근 HSBC 재판에서는 무차입 공매도의 발생 기준을 놓고 검찰과 재판부 간 해석 차이가 드러나기도 했다.
검찰은 무차입 공매도 ‘주문’ 시점에서 이미 법을 위반했다고 보지만 재판부는 해당 주문에 대해 ‘체결’이 이뤄져야 범죄가 성립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법리 해석의 차이는 향후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돋보기]
금융당국 공매도 제재 ‘제동’ 걸리나
정부는 2021년 4월 자본시장법 개정 전까지 불법 공매도에 과징금이 아닌 과태료만 부과했다. 금액도 수천만원 수준에 그쳤다.
그러다 ‘외국인 놀이터’,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 여론이 들끓자 불법 공매도에 주문액의 최대 10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게 법을 바꿨다.
지난해 BNP파리바와 HSBC의 대규모 불법 공매도가 적발되면서 금융감독원은 글로벌 투자은행(IB) 14곳을 전수조사 중이다.
이 중 크레디트스위스(CS)와 노무라증권 등 2곳에 대해 총 1168억원 규모의 불법 공매도 거래를 적발하고 약 540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하겠다고 사전 통지했다. 특히 CS는 기존 최고 과징금 기록인 BNP파리바의 190억원을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케플러 소송 판결 이후 금융당국의 과징금 부과에 대한 법적 도전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해외 IB들은 한국 공매도 규제의 특수성과 과징금 산정 기준의 타당성 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금융당국은 이에 대비해 보다 정교한 과징금 산정 기준을 마련하고 불법 공매도의 의도성을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증거 수집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의 강력한 제재 의지와 금융회사들의 법적 대응이 맞물리면서 향후 자본시장의 공매도 규제 체계가 어떻게 재편될지 주목된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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