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계약 맺은 대리기사, 사업자에 소득 전적 의존”
노조법상 지위 첫 인정
이번 판결로 단체행동에 나서는 대리기사들이 늘어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와 함께 최근 법원이 특수고용직군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어 관련 업계가 예의 주시하고 있다.
1·2심, 대법원까지 “노조법상 근로자 맞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9월 27일 부산 지역 대리운전업체 A사가 대리기사 B 씨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 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상고심 재판부는 “피고는 원고의 노조법상 근로자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A사는 2014년 5월부터 부산 지역에서 대리운전 기사를 모집하고 이들과 ‘동업계약’을 체결해 대리운전업을 했다.
이 회사는 또 다른 지역 대리운전업체인 C사 등과 대리운전 접수 및 기사 배정 등에 필요한 스마트폰 앱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콜’을 공유하고 기사를 배정했다.
B 씨는 2017년 10월 A사와 동업계약을 체결하고 스마트폰 앱의 기사 계정을 부여받아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다.
한편 이 사건 공동피고 D 씨는 C사와 대리기사 계약을 맺은 후 대리기사를 조합원으로 하는 ‘부산대리운전산업노동조합’을 조직해 2018년 12월 부산시로부터 설립신고증을 받았다.
부산대리운전산업노동조합은 2019년 초 A사와 C사에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단체교섭 요구에 불응하고 “대리운전 기사는 노조법상 근로자의 지위에 있지 않다”며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노조법 제1조는 헌법에 근거해 근로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다. 특수고용직 근로자와 사용자의 법정 싸움에서 노조법상 근로자 지위 인정 여부가 쟁점이 되는 이유다.
재판 과정에서 회사 측은 “피고들은 동업계약을 체결하고 독립적으로 대리운전 영업을 하는 사업자일 뿐 사용종속관계하에서 업무에 종사하고 그 대가로 수입을 받아 생활하는 노조법상 근로자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피고들이 이 사건 노조를 대표해 원고들에게 단체교섭을 요구하고 있어 원고들의 권리 또는 법률상 지위에 현존하는 불안 및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피고들을 상대로 노조법상 근로자의 지위에 있지 않음의 확인을 구한다”고 덧붙였다.
1·2심 재판부는 모두 피고들이 노조법상 근로자가 맞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피고가 원고의 노조법상 근로자라고 본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고 원고 측의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노조법상 근로자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대리기사 손을 들어줬다.
‘상당한 정도의 지속적·전속적 법률관계’ 인정
대법원 판례는 노조법상 근로자를 판단할 때 구체적으로 △노무제공자의 소득이 특정 사업자에게 주로 의존하고 있는지 △노무를 제공받는 특정 사업자가 보수를 비롯해 노무제공자와 체결하는 계약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지 △노무제공자가 특정 사업자의 사업 수행에 필수적인 노무를 제공함으로써 특정 사업자의 사업을 통해서 시장에 접근하는지 △노무제공자와 특정 사업자의 법률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지속적·전속적인지 △사용자와 노무제공자 사이에 어느 정도 지휘·감독관계가 존재하는지 △노무제공자가 특정 사업자로부터 받는 임금·급료 등 수입이 노무 제공의 대가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하도록 한다.
법원은 이런 법리에 비춰 대리기사는 노조법상 근로자가 맞다고 판단했다. 상고심 재판부는 “피고는 대리운전 기사로서 그 소득을 원고와 이 사건 협력업체들로부터 배정받은 고객의 콜을 수행해 받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며 “협력업체들로부터 배정받은 콜을 수행해 받은 수입도 원고로부터 받은 수입과 동일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동업계약서에 따르면 대리운전기사들이 납부해야 하는 수수료 및 업무 수행 시 준수해야 할 사항이나 받아야 할 교육 등을 원고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며 “원고와 같은 대리운전업체를 통하지 않고 대리운전업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고 덧붙였다.
상고심 재판부는 동업계약 체결 이후 콜을 배정받는 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지속됐고 원고에게 전속된 정도도 강한 편에 속한다고 봤다.
또 피고와 원고 사이에 어느 정도의 지휘·감독관계가 존재했고 피고에게 노무제공의 대가를 지급하는 주체는 궁극적으로 고객이 아니라 원고로 봐야 한다고도 인정했다.
대리기사 단체행동 늘어날 듯
법원은 최근 특수고용직군의 근로자 지위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특수직 노동자의 단체행동이 한층 빈번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앞서 법원은 골프장 캐디, 학습지 교사, 자동차 대리점 판매원 등의 노조법상 근로자 지위를 인정했다. 올해 1월에는 CJ대한통운이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 판정 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특수고용직인 택배기사들로 이뤄진 전국택배노조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조상욱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노동조사센터장)는 “오늘 판결로 대리기사업계의 집단적 교섭 요구가 늘어날 수 있고 사용자 측에선 이를 거부할 근거가 약해졌다”고 분석했다.
[돋보기]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지위와 구분해야
이 사건은 대리 운전기사의 근로자 지위 인정이 쟁점이 된 대법원의 첫 판결이다. 다만 노동3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을 때 인정하는 노조법상 근로자 지위를 인정한 것으로 퇴직금이나 해고의 제한 등 일반 정규직 근로자가 적용받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보다 폭넓은 개념을 다뤘다.
플랫폼 산업이 급성장하는 가운데 특수고용직에 대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지위 관련 법원 판례도 속속 쌓이고 있다. 대법원이 올해 7월 택시 호출 서비스 ‘타다’ 운영사였던 VCNC의 모회사 쏘카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타다 운전기사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는 취지로 판결한 게 좋은 예다.
이 사건 중노위 측 보조참가인인 E 씨는 2019년 5월 VCNC와 운전기사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지만 같은 해 7월 회사는 대규모 인원을 감축하면서 E 씨에게도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E 씨는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고 중노위는 “회사의 인원 감축 통보는 서면 통지의무를 위반한 부당해고”라고 판단했다. 이에 불복한 회사 측은 재심 판정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회사 손을 들어줬지만 2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상고심 재판부도 “VCNC가 협력 업체에 배포한 교육자료 등과 앱을 통해 안내된 운전업무 수행 절차, 방법 등은 사실상 복무 규칙으로 기능했다”며 “앱을 통해 드라이버의 근태를 관리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E 씨는 제3자로 하여금 운전업무를 대신 수행하게 하거나 운전업무 수행 중 추가적인 이윤 창출을 할 수 없었다”며 “E 씨는 VCNC가 정한 근무 시간·장소에 구속됐고 근무 시간에 비례한 보수를 받았으므로 그 보수는 근로 자체의 대가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한편 음식 배달기사(배달라이더)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하급심 판결도 나왔다.
서울중앙지법은 올해 8월 한 배달기사가 배달 플랫폼 업체를 상대로 “배달업무 위탁 계약을 해지한 것은 부당해고”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라이더가 어떤 배달 주문을 수행할지 어떤 경로를 이용할지 등을 자율적으로 결정해 회사가 라이더를 지휘·감독했다고 볼 수 없다”며 이같이 판단했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