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은 출판사 한 관계자의 ‘웃픈’ 이야기는 도서출판업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독서율은 43%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종이 책이든 전자책이든 책을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이 10명 중 4명인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런 시장에서 출판사의 주가가 상승하고 책을 사기 위해 책방의 영업시간 전부터 줄을 길게 선 모습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진풍경이었다.
일각에선 10명 중 넷이 책을 읽는 한국 사회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고 한편에선 “노벨상 탔다니깐 갑자기 책 산다고들 난리?”라며 작심삼일을 비판하는 글도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냐 싶다는 반론이 우세하다. ‘책 읽는 사회’가 유익하다는 건 책을 읽지 않는 이들도 동의한다. 이 일로 12명이 13, 14명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마침 시기도 좋다. 독서절벽 사회에 수년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우린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스타의 탄생 일단 시작이 좋다. ‘초거대 인플루언서(영향력이 있는 사람)’ 한강의 탄생이다.
현대사회에서 특정 인물이나 콘텐츠의 제안에 따라 제품을 구매하는 ‘디토 소비’는 소비문화의 한 축이 된 지 오래다. 가수 임영웅이나 BTS의 한마디에 해당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시대다.
책 시장도 마찬가지다. 지난 4월엔 걸그룹 뉴진스의 신곡 뮤직비디오에 멤버 민지가 고전 ‘순수의 시대’를 읽는 모습이 공개되자 책 판매량이 8배 뛰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올 상반기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1위에 올랐는데, 이 무렵 걸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의 언급이 톡톡한 효과를 냈다.
그러나 이들의 추천은 단발적이다. 성인 독서율이 역대 최저치로 떨어진 지금 독서 인플루언서는 몇 되지 않는다.
연예인 외에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인플루언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문 전 대통령의 SNS에 새로운 책 추천이 올라오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시간문제라 출판사들이 앞다퉈 책을 선물할 정도다.
과거엔 방송의 힘이 컸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봉순이언니’ 등 한국에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도서들을 살펴보면 2000년대 방영 당시 큰 화제를 모았던 MBC의 예능 프로그램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소개작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한 달에 한 권 책을 선정해 MC와 시민들이 책을 비평하고 읽지 못한 사람에게는 책을 나눠주는 ‘착한’ 예능 프로그램이었는데 영향력이 막강했다.
업계에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곧 파워 인플루언서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자축한다. 이미 그의 작품 외에도 그가 추천한 도서, 그가 아버지 한승원 작가에게 선물한 도서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적어도 노벨문학상 파급효과는 그가 수상 소감을 건넬 오는 12월까지 지속될 것이다. ‘한강’이 마중물이 될까 이번 노벨문학상에서 번역의 힘을 빼놓을 수 없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은 총 76건의 한강 작품 번역 출간을 지원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등을 영어로 옮긴 데버라 스미스는 번역은 물론 영국의 유명 출판사 그란타 포르토벨로에 샘플 번역을 보내는 등 홍보까지 도맡았다. 이후 스미스는 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한강의 ‘희랍어 시간’도 영어로 옮겼다. 여기엔 정부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그러나 이 마중물이 마르고 있다. 올해 삭감된 출판 관련 예산은 45억원.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출판계에 ‘이권 카르텔’을 언급하며 갈등이 격화된 뒤로 도서·출판 관련 예산은 큰 폭으로 삭감됐다.
정부는 올해 우수 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예산 13억원,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창작 지원 예산 7억원, 국민도서문화 확산 약 60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이 중에는 번역 사업도 포함됐다. 올해 번역원에 책정된 정부 예산은 지난해보다 12% 줄었다.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이후 한국문학의 국제문학상 수상은 31건에 달했는데, 이에 비해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출판지원사업’ 예산은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18억여원에 머무르다 올해 20억원으로 소폭 증액되는데 그쳤다.
정은귀 한국외국어대 교수 겸 번역가는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데보라 스미스를 능가할 정도의 학생이 많지만 시장의 문이 너무 좁다”며 “번역 고료는 20년 전과 비슷할 정도로 번역 조건은 더욱 나빠졌다. 번역가로는 먹고살 수가 없는데 제자들에게 번역가가 되라고 말을 못 한다”고 말했다.
그마저도 번역은 나은 사정이다. 한강 작가 역시 1993년 문예지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했지만 한국문학의 뿌리를 내리는 비평은 아예 논의에서조차 소외되어 있다.
오형엽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겸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은 “어떤 문학이나 예술도 그것이 더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중심 찾기와 뿌리내리기”라며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비평을 통해 우수 작품을 가려내고 격려할 수 있어야 되는데 현재 한국문학 비평은 굉장히 약화되어 있고 소외돼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비평은 대중적으로 읽히지 않는 글로 소외되기 십상이지만 비평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처럼 지금의 바람도 일시적인 현상이 될 수 있다”며 정부 지원을 촉구했다.
이광호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다양한 책과 개성 있는 작가가 나와야 ‘제2의 한강’이 나올 수 있다”며 “물론 해외 교류나 번역도 중요하겠지만 한국어 문학 시장이 활성화돼야 한다. 가만히 두면 시장이 확대되지 않기 때문에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문학의 가장 큰 약점은 한국어 문학시장이 너무 작다는 점”이라며 “2000부를 팔기도 어려운데 작가에게 돌아가는 인세는 굉장히 적고 다음 책을 낼 기회가 적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시장이 확대되지 않기 때문에 문학나눔 예산 증액, 출판계 세액공제 입법, 공공대출 보상권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업계 방파제이자 소비자의 벽, 도서정가제도서정가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도정제는 2003년 첫 도입됐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출판계와 소비자 간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다.
도서출판업계에 도정제는 없어선 안 될 방파제다. 1990년대 이후 대형 할인매장, 온라인 서점의 도서 할인 경쟁이 치열해지며 소규모 출판사와 중소 서점이 많이 폐업했고 국내 출간 종수도 대폭 축소됐다. 이는 곧 독자들의 도서 접근권 제한으로 직결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2003년 도정제가 도입된 배경이다. 출판 산업을 보호하고 소규모 출판사와 지역 서점들이 대형 온라인 서점과의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현재 모든 출판물에 대해 최대 15%의 할인만 허용되고 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지난해 도정제와 관련, “2014년 11월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 뒤 출판사 수와 출판 발행 종수, 서점 수 등이 증가해 출판문화의 다양성 확대와 국민의 도서 선택권 제고, 도서 접근성이 증대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도서정가제는 출판 산업 보호에는 기여했지만 한국의 독서율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진 못했다. 실제 2013년부터 10년간 한국의 성인 독서율은 하락세를 보였으며 가격 인상 우려로 인해 소비자들의 책 구매 의욕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물론 도정제만의 문제는 아니다. 디지털 매체의 영향으로 독서율 하락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추세다. 다만 일부 소비자들은 할인 제한으로 인해 책 가격이 높아졌다고 느끼고 다양한 책을 저렴하게 구매하기 어렵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도정제 이전에 책 구매를 즐겼다는 안혜정 씨는 “도서출판 시장은 지금 사람들이 외면하는 영화판과 같다”며 “표값은 비싸지고 질은 떨어졌는데 관계자들은 해결 방안을 찾지 않고 관객에게 호소만 하고 있다. 독서인구 감소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도서정가제도 한몫했다”고 주장했다. 출판산업 보호란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지만 독서 문화 확산과 소비자 만족 측면에서는 한계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지난 1월 제5차 민생토론회에서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도정제 개선안을 발표했다. 웹툰·웹소설에 대한 도서정가제 적용을 제외하고 15%로 제한되어 있는 도서가격 할인율을 영세서점에 한해 유연하게 하기로 논의했다. 이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은 출판문화산업진흥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그리고 여론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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