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파이낸셜타임스 기사에서 한국 기업 관계자들은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에 따른 ‘리더십 공백’에 대해 이 같은 우려를 전했다.
트럼프 신정부가 2025년 1월 20일 출범하는 가운데 한국은 조기 대선이 이뤄져도 앞으로 최소 5~6개월은 정상외교 공백이 불가피하다. 눈앞에 다가온 ‘트럼프 스톰’을 한국은 컨트롤타워 없이 맞게 됐다.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2024년 12월 12일(현지 시간) 온라인 대담에서 트럼프 당선인의 ‘보편적 관세’가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다며 “그래서 모두가 백악관에 가서 개별 협상을 시도하는데 한국에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차 석좌는 최근 또 다른 인터뷰에서 정상 차원에서 트럼프 당선인과 조기에 관계를 쌓는 게 중요하지만 지금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서는 쉽지 않다고 전망했다.
관세 무기화 타깃 우려…“컨트롤타워 부재로 큰 도전 직면”
실제 정부에서는 최근 외교부 1차관이 외교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지만 임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바이든 정부와의 접촉일 뿐 아직 트럼프 당선인 측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무역적자에 민감한 트럼프 당선인이 올해 상반기 대미 무역흑자 287억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한국을 겨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트럼프 당선인이 그간 한국에 방위비 증액과 대미 무역수지 흑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온 만큼 한국이 고율 관세 정책의 핵심 타깃이 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대미 무역수지 균형을 위해 원유와 가스 등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늘리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5년은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제조업과 수출은 주요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수출 둔화 우려 속에 커다란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최근 12대 수출 주력 업종 150개 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2025년 수출 전망 조사’에서도 수출은 2024년 대비 1.4% 증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수출 여건이 제일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되는 지역으로 48.7%가 미국을 꼽았다. 중국(42.7%)은 그 뒤를 이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각종 세제 혜택을 주는 반도체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으로 대미 투자를 크게 늘려온 한국 기업들의 투자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할 우려도 제기된다.
폴 공 미국 루거센터 선임연구원은 “정권교체 이후 한국 기업들의 그간의 투자 실적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며 “트럼프 1기와 달리 미국 상무부의 수출통제가 무기화되면서 협상 난도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HBM 中 수출길 막힌 삼성, 전기차·배터리도 타격
IRA 보조금 폐기 가능성은 반도체법보다 더 높다. 단, 폐기 시점은 미국 의회 절차상 2026년 이후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트럼프 정권 인수팀은 IRA에 근거한 보조금 폐지, 전기차와 충전소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중국산 자동차 및 부품, 배터리 소재를 차단하는 조처를 강화하는 방안을 권고하고 있다.
인수팀은 연방정부의 전기차 구매 의무화 폐지도 권고했다. 전기차 산업이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에 빠진 상황에서 최대 7500달러에 달하는 전기차 구매 혜택마저 사라지면 북미 전기차 시장뿐 아니라 배터리 산업 자체가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이 미국 내 전기차, 배터리 생산공장을 건설한 가운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2차전지 소재에 관세를 매기는 방안을 마련한다는 소식에 한국이 우선 압박 대상이 될 수 있는 만큼 정부 중심의 대미 협상력 제고가 중요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가 최근 발표한 인공지능(AI) 칩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대중국 수출 통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상당 부분 유지될 전망이다.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원천 기술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이번 수출통제를 적용받게 된다.
전 세계 HBM 시장은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미국 마이크론이 2023년 기준 각각 53%, 38%, 9%를 차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중국에 HBM 일부를 수출하는 삼성전자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HBM 전량을 미국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있으며 생산량이 미국 내 수요를 못 따라가고 있어 당장은 별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삼성전자의 HBM 대중국 수출 비중은 20~30% 정도로 알려졌는데 아직 엔비디아의 퀄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 시장을 잃게 되는 것”이라며 “이번 제재의 반작용으로 중국의 HBM 자립을 부추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패싱 막아라…재계 민간외교 총력전
한국이 주춤한 사이 세계 주요국 정·재계 인사들은 사적 관계를 중시하는 트럼프 당선인 측과 소통하기 위해 돈과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다. 일본은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부인 아키에가 트럼프 당선인과 만찬을 했고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은 1000억 달러(144조원) 투자를 약속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에 트럼프 당선인을 초청해 직접 만났고, 최근 내각 신임안 불발로 내년 2월 조기 총선을 앞둔 올라프 슐츠 독일 총리는 두 차례 전화 통화를 했다.
트럼프 당선인 측과 관계를 맺기 위한 물밑 로비전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국정이 혼란한 한국만 트럼프 당선인과의 정상급 소통에 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은 모든 채널을 총동원해 트럼프 측과 소통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트럼프 당선인의 장남이자 ‘막후 실세’로 꼽히는 트럼프 주니어와의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초청받아 2024년 12월 16일부터 5박 6일간 트럼프 당선인 자택이 있는 미국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를 ‘재계 1호’로 방문해 주목받았다.
정 회장은 트럼프 당선인과 함께 식사를 겸해 약 10~15분간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당선인의 최측근으로 부상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도 회동,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 관련 사업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수 개인 인맥 찾고 미국통 영입
재계는 연말 인사에서 미국통들을 전면배치해 트럼프 2기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삼성은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가 워싱턴 사무소 소장인 북미법인 대외협력 팀장을 맡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연말 인사에서 호세 무뇨스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북미권역본부장을 신임 CEO로 선임하고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성 김 고문을 대외협력 사장으로 임명했다.
SK그룹은 북미 대외 업무 컨트롤타워로 신설한 SK아메리카스 대관 총괄에 미 무역대표부(USTR) 비서실장, 미 상원 재무위원회 국제무역고문 등을 역임한 폴 딜레이니 부사장을 선임했다. LG그룹은 워싱턴 사무소를 트럼프 1기 정부 때 백악관의 부비서실장을 지낸 조 헤이긴 소장 단독 운영체제로 재편했다.
한화그룹은 2024년 8월 록히드마틴 출신의 방산 분야 베테랑인 마이클 스미스를 새 법인장으로 영입한데 이어 아프가니스탄 참전 장교 출신의 한인 2세 제이슨 박(한국명 박제선) 전 버지니아주 보훈부 부장관을 대외협력 시니어 디렉터로 채용했다.
또 미 국방부 출신으로 방산 기업 레오나르도 DRS에서 글로벌 법인 사장을 지낸 마이클 쿨터 대표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포함한 그룹 방산사업을 총괄하는 해외사업 총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하지만 정상외교를 통해 협상력을 발휘해 정책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개별 기업인의 민간외교 창구에만 기대는 것은 한계가 뚜렷하다. 트럼프 2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로 부상한 미국우선정책연구소(AFPI)와 헤리티지재단 등과 네트워크 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AFPI와 헤리티지재단이 낸 정책보고서가 2기 주요 정책으로 현실화되며 트럼프 정부 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다. 2024년 12월 9일 닛케이아시아는 “AFPI 소속으로 트럼프 당선인에게 선택된 인사가 10명이 넘는다”며 “트럼프 정부 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헤리티지재단의 정책보고서 ‘프로젝트 2025’ 집필진들과 AFPI 관련 인사들은 이미 2기 행정부 고위직에 다수 지명됐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정부와 의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보수 성향의 친트럼프 싱크탱크와도 접촉해 정책 형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