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한 3600톤급 신형 호위함 ‘충남함’. 사진=HD현대중공업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한 3600톤급 신형 호위함 ‘충남함’. 사진=HD현대중공업
2024년 한국 조선업의 글로벌 수주 비율이 중국의 4분의 1 수준인 20% 정도에 그칠 전망이 나오지만 조선업계는 비교적 여유로워 보인다. 슈퍼사이클에 올라탄 조선업이 3년치 이상의 일감을 확보하며 2024년 역대급 호실적을 예약했다.

HD한국조선해양·삼성중공업·한화오션 등 조선 빅3의 2024년 합산 영업이익은 2008년 이후 처음으로 2조원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인도 등에서 잇단 러브콜이 쏟아지며 2025년에도 실적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빅3 영업익 2조 돌파…트럼프발 훈풍 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월 6일(현지 시간) 보수성향 라디오 ‘휴 휴잇 쇼’에 출연해 미국 해군 함정 건조 문제와 관련 “우리는 선박 건조와 관련해서 동맹국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2024년 11월 대선 당선 직후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 선박 수출뿐만 아니라 보수·수리·정비 분야에 있어서도 긴밀하게 한국과 협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지 두달여만에 또다시 한국 조선업계와의 협업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다.

최근 쉬리 티케이 라마찬드란 인도 항만해운수로부 차관, 인도 최대 국영 조선사인 코친조선소의 마두 나이르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인도 조선업 대표단이 방한해 국내 빅3 조선소를 모두 방문했다.

인도 대표단은 한국 조선소들의 건조 능력을 직접 살펴본 후 인도 현지 조선소 설립, 기술이전 등 협력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도는 현재 1500척가량인 선대를 향후 2500대까지 늘린다는 계획인데 인도 현지 조선소는 현재 28곳에 불과해 신규 상선 1000척 확보를 위해선 건조 능력 확대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한국 조선업체들에 인도 조선업 육성을 위한 투자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한국 조선소 방문에 앞서 대표단은 일본의 가와사키중공업 조선소와 쓰네이시 조선소 등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국 정치권에서는 쇠락한 자국 조선업의 부활과 중국 해군력 견제를 위해 한국 조선업체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미국 상원의 마크 켈리 민주당 의원, 토드 영 공화당 의원과 하원의 존 가라멘디 민주당 의원, 트렌드 켈리 공화당 의원은 최근 자국 조선업 강화를 위해 한국과 협력 가능성을 높이는 이른바 ‘선박법’(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위한 조선업과 항만시설법·SHIPS for America Act)을 발의했다.

선박법에는 미국 선적 상선을 10년 내 현재의 3배 수준인 250척으로 늘려 전략상선단을 운영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현재 국제 무역에 쓰이는 미국 선적 상선은 80척 수준이지만 중국은 5500척에 달할 만큼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법안은 ‘미국 정부는 조약 동맹 및 전략적 파트너와 함께 전시에 필요한 해상 수송 능력을 보강한다’, ‘교통부와 국방장관은 동맹과 파트너의 기여로 미국의 조선업을 강화할 방법을 의회에 권고한다’ 등의 규정을 명시했는데 선박 건조국으로 동맹을 우선시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는 평가다.

이 법안은 앞서 트럼프 당선인이 언급했던 한국과 미국 간 조선업 협력 범위를 유지·보수·정비(MRO)에서 상선 건조까지 넓혔다는 점에서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2024년 2월 27일 HD현대중공업 울산 본사를 방문한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에게 HD현대중공업 특수선 야드와 건조 중인 함정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2024년 2월 27일 HD현대중공업 울산 본사를 방문한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에게 HD현대중공업 특수선 야드와 건조 중인 함정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HD현대
美 해군 MRO 이어 상선 건조까지…새로운 기회

파이낸셜타임스는 미 의회가 해군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상선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 이러한 법안을 발의했다고 분석했다. 현재 중국의 해군력은 실제 작전 능력과 성능 면에서는 미 해군력에 뒤처져 있지만 양적인 면에서 이미 미 해군력을 제쳤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중국의 해군 구축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군함은 234척으로 미 해군의 219척을 넘어섰다. 군함 구축 속도도 매우 빠르다. 중국 군함은 약 70%가 2010년 이후에 진수된 반면, 미 해군의 경우 약 75%가 2010년 이전에 진수됐다.

중국이 10년 이내에 순양함, 구축함, 호위함의 총 배수량에서 미국을 앞지를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미국이 지금처럼 해상 우위를 유지하려면 조선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구축한 한국, 일본 등 동맹국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지명된 마이클 왈츠 하원의원은 2024년 4월 의회에 제출한 ‘국가해양전략 지침’ 보고서를 통해 “중국은 미국보다 230배 많은 조선 능력을 가지고 있어 글로벌 안보와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해양 인프라 재건 전략이 필요하다”며 “인도·태평양의 동맹국 및 파트너 국가들과 협력해 중국과의 경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미 해군은 2025년부터 시범적으로 미국 조선소가 아닌 우방국인 한국, 일본 등의 조선소에서 미 해군의 군함들을 수리받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선박법은 118대 의회가 2024년부로 종료되면서 자동 폐기됐으나 조선업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양당이 공유하고 있어 2025년 회기에 재발의될 것으로 관측된다. 업계에서는 선박법이 재발의되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강경태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 선박법으로 한국 조선업체는 전략상선단에 참가할 상선 신조를 수주하거나 선박 보수 공사를 수주하는 등 수혜가 예상된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 조선업계는 미 해군 MRO 시장에 공을 들여왔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미 해군 MRO 시장 진출에 필수적인 함정정비협약(MSRA)을 취득한 상태다. 한화오션은 미국 현지의 필리조선소를 1억 달러에 인수하고 2024년 8월 군수지원함 ‘월리 시라’, 11월 급유함 ‘유콘’ 등 미 해군이 발주한 MRO 사업 2건을 연달아 따냈다.

미국 존스법은 전투함을 미국에서만 정비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현지 조선소를 인수한 한화오션은 향후 전투함 MRO 시장 진출에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는 평가다. HD한국조선해양도 미국 내 조선소 매물을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오션이 인수한 미국 필리조선소 전경. 사진=한화오션
한화오션이 인수한 미국 필리조선소 전경. 사진=한화오션
HD현대·한화 싸우다 ‘10조 대어’ 놓쳐…“과열 금물”

미국, 인도가 조선업 파트너로 한국을 눈여겨보고 있는 가운데 한국 조선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내 업체 간 과도한 경쟁을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최대 10조원대 사업으로 평가받던 ‘호주 호위함 사업(SEA 3000)’에서 나란히 탈락했다. 호주 해군은 중국 해양 위협 등에 대비해 기존 안작(ANZAC)급보다 더 크고 항행거리가 긴 함정을 원했는데 한국 업체들은 이 같은 니즈를 파악하지 못했고 경쟁 상대인 독일, 일본에 비해 값이 싸면서도 성능이 우수한 측면을 부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보 문제에서는 가격경쟁력보다는 성능을 우선시하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최종 후보로 선정된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과 독일의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TKMS)이 정부와 원팀을 이뤄 총력 수주전에 나선 반면, 한국은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각각 뛰어들어 원팀을 구성하지 못한 것도 패인이라는 분석이다.

이종섭 전 주호주 한국대사가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관련 외압 논란 끝에 2024년 3월 임명된 지 25일 만에 사임한 것도 호주 호위함 사업 탈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안보상 중요하고 수조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에서는 양국의 고위급 교류가 중요한데 주호주 대사의 조기 교체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한화오션의 3000톤급 중형 잠수함 ‘도산안창호함(장보고-III 배치-I)’. 사진=한화오션
한화오션의 3000톤급 중형 잠수함 ‘도산안창호함(장보고-III 배치-I)’. 사진=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수주를 놓고 고소·고발전을 이어가다가 호주 호위함 수주전 탈락 이후 서로에 대한 고소·고발을 취하했다. KDDX 사업을 넘어 총 규모 80조원에 이르는 캐나다(70조원)·폴란드(3조원)·필리핀(2조원) 잠수함 사업 수주를 위해 손을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진행 중인 캐나다 해군의 3000톤급 디젤잠수함 8~12척 도입과 후속 군수지원을 포함한 ‘캐나다 순찰 잠수함 프로젝트(CPSP)’에서는 경쟁 상대인 일본 조선사가 납기 문제를 이유로 입찰을 포기하면서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수주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용환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국방 MRO 사업은 안보 문제상 한번 진입하면 관계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한국 조선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초기 시장 선점을 위해서는 원팀 등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국내 업체 간 과열 경쟁이 지속될 경우 향후 수주에서 리스크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