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만 보면 한국 드라마 얘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작품은 한국 작품이 아니다. 미국 애니메이션에 해당하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이다. ‘케데헌’은 일본 자본으로 만들어진 미국 할리우드의 소니픽처스가 제작하고 미국 기반의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K팝뿐만 아니라 K컬처 자체를 소재로 한 미국 애니메이션이 나온 것도 신기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이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넷플릭스 신작 리스트에 떴을 때만 해도 이토록 큰 흥행을 예측한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비주류 장르인 애니메이션에 해당하고 K팝이 들어가긴 했지만 왠지 낯선 제목을 가지고 있다 보니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케데헌’은 넷플릭스 전체 1위를 차지했다. ‘골든’, ‘소다 팝’ 등 OST도 빌보드 차트를 휩쓸고 있다.
한류 30년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지고 있다. ‘케데헌’은 K컬처가 더 이상 한국만의 것이 아닌, 전 세계 사람들의 공통된 일상의 관심사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남을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며 ‘외국에서 왜 한국 얘기를 만든 거지?’라는 궁금증, 1위를 차지한 것에 대한 신기함을 함께 느낀다. 그런데 정작 해외에선 ‘예고된 돌풍’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외 사람들은 이미 한국의 드라마, 영화, K팝은 물론이고 문학, 뮤지컬, 전통문화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글로벌 콘텐츠 시장의 중심지인 미국 할리우드에서 K컬처 작품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제작에 나섰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방증한다. 바야흐로 K컬처의 여러 요소를 동시다발적으로 즐기려는 수요가 늘어나고 시장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올(ALL) K’의 시대가 열렸다.
고조선 묻는 미드까지 글로벌 1위
지금까지의 한류도 큰 인기를 얻긴 했지만 주로 장르별로 분절된 형태로 확산되어 왔다. K드라마를 좋아하는 해외 팬과 K팝을 즐기는 해외 팬이 구분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여러 영역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K컬처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인식되고 이에 대한 팬덤이 형성되어 ‘K’라는 통합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K팝과 아이돌, 저승사자와 무당 등 전통문화, K푸드와 명소 등 오늘날의 한국 문화까지 한데 어우러진 ‘케데헌’은 ‘올 K’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케데헌’뿐만 아니다. 이 작품에 앞서 2023년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엑스오(XO), 키티’는 그 서막을 알렸다. 드라마엔 이런 대화가 오간다. “한국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 작품 속 인물들이 시험 공부를 하는 장면에 해당한다. 이들은 심지어 후삼국 시대의 연도까지 묻고 답한다. ‘엑스오, 키티’ 역시 미국 드라마에 해당한다. 그런데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여학생 키티(애나 캐스카트)가 한국 국제학교로 전학을 온다는 설정을 내세워 한국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북촌 한옥마을 등 한국 명소가 나오고 명절에 전과 갈비찜을 요리해 먹는 장면도 나온다. 이 작품은 한국에선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반면 미국·영국에선 2위까지 올랐다. 이를 포함해 86개에 달하는 국가에서 10위권 안에 진입했다.
그러자 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12월 말 ‘오징어 게임’ 시즌2가 공개된 직후 ‘엑스오, 키티’ 시즌2도 다음 달에 연이어 나왔다. 그러자 선두를 차지하고 있던 ‘오징어 게임’을 제치고 ‘엑스오, 키티’가 1위에 올랐다. ‘케데헌’ 역시 ‘오징어 게임’ 시즌3가 나온 지난 6월에 나란히 공개되며 각각 영화, 시리즈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결국 한국 역대급 흥행작, 그리고 K컬처를 다룬 작품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인 셈이다. 여기에 하나 더 ‘엑스오, 키티’와 ‘케데헌’의 공개 시기를 살펴보면 ‘오징어 게임’ 새로운 시즌 공개로 더욱 극대화된 K컬처에 대한 관심을 다른 작품으로 확장시킨 넷플릭스의 영리한 전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K컬처의 막강한 파급력에 주목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새로움이 가득한 ‘종합선물세트’ K컬처
이처럼 ‘올 K’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은 K컬처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매력 덕분이다. 해외 팬들은 K컬처에서 다채로운 요소를 발견하고 있다. ‘케데헌’에서처럼 멋진 것, 낯선 것, 신비로운 것, 재밌는 것, 맛있는 것 등을 모두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글로벌 콘텐츠 시장은 오랜 시간 미국, 유럽 중심으로 흘러가다보니 일정 부분 고착화되어 있었다. 이는 곧 새로움의 부족과 고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K콘텐츠가 확산되며 그 갈증이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글로벌 시장은 K콘텐츠를 통해 접하게 된 ‘한국적인’ 것을 통해 새로운 피를 수혈하게 됐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흥은 기본이고 이야기에 열광했다. 그러다보니 한국 문화 자체가 커다란 잠재력과 무한한 소재를 갖고 있었다. K콘텐츠에 저승사자, 무당, 한국 호랑이 등 우리의 독특한 전통문화가 활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창작자들은 이를 ‘힙한’ 것으로 재탄생시키는 뛰어난 역량까지 발휘했다. ‘킹덤’에서 이미 좀비에 갓을 씌워 세계적인 갓 열풍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월드 오브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선 한국팀 범접이 갓을 쓴 저승사자와 도깨비 등을 내세워 K댄스 역사에 길이남을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을 바라보는 외국인 시청자 입장에선 뭔지는 잘 모르지만 자꾸만 알고 싶어지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선물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해 뜯어보는 재미가 더욱 큰 ‘러키박스’를 열어보는 느낌까지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만으로는 시청자의 관심을 오래 끌 수 없다. 참신하고 파격적이기만 하면 오히려 콘텐츠 감상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새롭지만 ‘보편성’도 적절히 갖추고 있어야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법이다. ‘케데헌’은 이런 K콘텐츠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작품에서 주인공 루미는 헌터이자 어둠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고 힘들어한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고 더욱 나아가며 큰 공감과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엔 한국계 캐나다인 매기 강 감독의 이방인으로서의 고민이 녹아 있는 동시에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성장 스토리가 함께 담겨 있다. 진우 역시 자신의 아픈 과거에 얽매여 자책하는 모습을 통해 보편적인 감성을 이끌어냈다.
이는 지금까지 ‘기생충’, ‘오징어 게임’과 같은 K콘텐츠의 대표 성공 방식과도 유사하다. 외형적으로는 한국적인 요소들을 대거 배치하여 새로움을 강조하면서도 주제와 감성은 보편적으로 다가가는 식이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을 가진 글로벌 시장의 빈틈을 파고들어 어느새 세계인들의 일상에 자리 잡게 된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해외 제작사가 만들고 유통되는 K컬처 소재의 콘텐츠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K컬처는 이미 성공 가능성이 충분히 입증된 소재이며 때론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기도 하는 독립 장르가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품 성공을 위해 K창작자들과 긴밀히 연결하고 협업도 진행하고 있다. 매기 강과 같은 한국 출신이면서도 해외에서 오랜 시간 살아 한국과 글로벌의 문화와 정서를 골고루 파악하고 있는 창작자를 적극 영입하고 있다. 또는 K콘텐츠 성공 방정식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한국 제작사들과 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나아가 ‘케데몬’처럼 한국인 배우나 가수 등 아티스트들을 섭외하여 제작, 홍보, 마케팅 등에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고도 있다. 이 같은 글로벌 자본과 K창작진의 새로운 만남으로 기존에 없던 시너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케데헌’에서 루미를 포함한 걸그룹 헌트릭스 멤버들은 ‘혼문’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혼문은 헌트릭스가 자신들만의 목소리와 메시지로 수많은 팬들의 공감을 얻고 하나로 연결하는 황금빛 결계에 해당한다.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작품에서도 헌트릭스 멤버들은 계속해서 신곡을 연구하고 연습하며 거대하고 단단한 혼문을 완성하고자 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위협을 받아 결계가 끊어지고 무너지기도 한다. 문화를 전파하는 과정과 의미도 비슷하지 않을까. K컬처만의 색다르고 고유한 가치, 그러면서도 누구나 공감하고 응원할 수 있는 메시지, 새롭게 연결하고 확장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이를 골고루 갖춘 덕분에 마침내 K컬처의 황금빛 혼문이 생겨나고 커지기 시작했다. 이를 더욱 견고하게 지키고 확장해 나간다면 영원한 ‘올 K’의 시대가 펼쳐지지 않을까.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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