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고이즈미 vs ‘여자 아베’ 다카이치 경쟁 유력
내각제인 일본에선 다수당 대표가 통상 총리에 오르며 현재 제1당은 자민당이다. 10월 4일 새 총재가 선출되면 하순께 의회에서 차기 총리를 뽑는 일정이다. 비교적 온건한 역사 인식을 지닌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퇴임하고 보수 성향이 강한 총리가 탄생하면 한·일 관계 불확실성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양강’ 고이즈미·다카이치
아사히신문이 9월 20∼21일 실시한 전국 여론조사에서 새 총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를 꼽은 응답자가 28%로 가장 많았다. 고이즈미가 24%로 뒤를 이었다. 마이니치신문이 같은 날 진행한 조사에서도 다카이치가 1위(25%), 고이즈미가 2위(21%)였다.
그러나 자민당 지지층에선 고이즈미가 앞섰다. 아사히 조사에서 자민당 지지층 41%가 고이즈미를 지지했다. 다카이치는 24%에 그쳤다. 마이니치 조사에서도 자민당 지지층에서는 고이즈미가 1위(40%), 다카이치가 2위(22%)를 기록했다.
전국 여론조사에서는 보수색이 강한 야당 지지층이 다카이치를 미는 반면, 자민당 지지층은 상대적으로 보수색이 덜한 고이즈미를 지지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작년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가 1차 투표 1위로 결선에 오르고도 당시 이시바 후보에게 패배한 요인이다.
이번 선거는 소속 국회의원 295표와 당원·당우 295표(약 91만 표를 295표로 환산해 계산) 등 총 590표를 놓고 경쟁하는 방식이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결선 투표가 진행된다. 현재로선 결선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결선은 국회의원 295표와 47개 광역자치단체 47표를 놓고 다투는 만큼 국회의원 표심이 승패를 가를 전망이다.
국회의원 표심은 아소 다로, 기시다 후미오 등 전직 총리가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아소 전 총리가 이끄는 당내 유일한 파벌인 ‘아소파’ 의원과 옛 ‘기시다파’를 이끌었던 기시다 전 총리를 따르는 의원은 각각 40명 안팎으로 전체 의원의 25∼30%가 두 사람의 영향권에 있다. 두 전직 총리가 ‘킹 메이커’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역대 ‘최연소’ 고이즈미
고이즈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자 유일한 ‘40대 기수’다. 당선되면 역대 최연소 자민당 총재가 된다. 젊은 나이와 매력적인 외모, 무파벌 경력과 거침없는 언변 등으로 인기가 높다. 고이즈미는 작년 총재 선거에 처음 도전했고 이번이 두 번째다. 작년엔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이시바 후보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가나가와현 출신인 그는 바닷가에서 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창 시절엔 서핑에 빠져 지냈다. 대학 졸업 후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을 거쳐 아버지 고이즈미의 비서를 맡았다.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나가와에서 출마해 28세의 젊은 나이에 처음 당선됐다.
젊은 의원임에도 당시 민주당 정권을 강하게 추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고이즈미는 이후 자민당 농림부 회장으로서 농협 개혁에 힘썼다. 2019년 아베 신조 내각에서 환경상으로 발탁돼 38세의 젊은 나이에 처음 입각했다. 그러나 환경상 시절 온난화 대책을 놓고 “펀하고 쿨하게, 섹시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고이즈미는 그동안 무파벌로 활동을 계속했다. 자민당 파벌의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해 “인사와 돈이 따라다니는 것이 파벌이라면 파벌을 없애는 것 외에 다른 결론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올해 5월 농림수산상에 취임한 이후에는 이른바 ‘반값 비축미’를 방출하며 쌀값 하락을 이끌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자 아베’ 다카이치
다카이치는 이후 미국 연방의회, TV 프로그램 캐스터 등을 거쳐 1993년 중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됐다. 자민당에 입당한 것은 1996년이다.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2년 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우정(郵政) 사업 민영화에 반대하던 상대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자객’으로 나와 승리했다.
다카이치는 특히 2022년 선거 유세 중 총격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와 가까웠다. 그는 2006년 제1차 아베 내각에서 오키나와·북방담당상으로 처음 입각했다. 2012년 출범한 제2차 아베 내각에서는 자민당 주요 4역 중 하나인 정무조사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역대 최장인 1438일에 걸쳐 총무상을 역임했다.
그는 아베 전 총리의 지원을 받아 2021년 총재 선거에 처음 나왔다. 1차 투표에서 기시다 후미오, 고노 다로 당시 후보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다카이치는 기시다 내각 출범 뒤 다시 자민당 정조회장을 맡았다. 2022년부터는 경제안보담당상으로 일했다. 이시바 정권에선 당 총무회장직 제의를 고사하고 정권과 거리를 뒀다. 경제 살리기 방점
각 후보는 공약에서 ‘민생 경제 살리기’에 중점을 뒀다. 물가가 치솟지만 임금 인상 속도가 더뎌 서민 살림살이가 팍팍해졌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후보들은 자민당이 작년 중의원(하원) 선거에 이어 올해 참의원(상원) 선거에서도 과반 의석 달성에 실패하며 ‘소수 여당’으로 전락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고 있다.
고이즈미는 물가상승에 대응해 추가경정예산을 짜겠다며 ‘경제 대책’부터 실행하겠다고 공약했다. 물가와 임금 상승에 맞춰 소득세 기초공제를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2030년까지 평균 임금을 100만 엔 올리겠다는 구상이다. 2030년까지 일본 내 투자를 135조 엔으로 늘리겠다는 공약도 내놨다. 설비투자 때 감세 등을 통해서다.
다카이치도 물가 대책부터 제시했다. 그는 소득에 따라 소득세 등에서 일정액을 공제하거나 납부한 소득세가 공제액을 밑도는 저소득층엔 현금을 지급하는 제도 설계에 착수하겠다고 공약했다. 일률적 감세나 현금 지급보다 저소득층 지원에 초점을 맞춘 제도다.
시장에선 다카이치가 당선되면 엔화 가치가 떨어지고 주가는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후보 중 ‘금융 완화’와 ‘재정 확장’에 가장 적극적이라는 평가에 따른 것이다. 고이즈미 당선 땐 그 반대다.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정부의 재정 건전화를 지지하는 만큼 엔화 가치는 오르고 주가는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일 관계 불확실성도 높아지고 있다. 고이즈미와 다카이치는 줄곧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고이즈미는 이번 기자회견에서 총리에 취임하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지에 대해 “적절히 판단할 것”이라고만 답했다.
다카이치는 작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을 때 “국책(國策)에 따라 숨진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며 계속 참배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다만 이번 기자회견에서는 작년처럼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