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부동산을 둘러싼 다양한 단어들이 떠올랐습니다. 전세의 설움, 상속, 노후, 패닉바잉, 불평등, 수도권 집중, 투기, 한강변 아파트, 욕망, 신혼, 내집 마련 등등. 수많은 단어의 숲을 지나고 나니 하나의 단어가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인생.
한국인들에게 부동산이란, 아파트란 곧 인생입니다. 먼저 1960년대생과 그 이전 세대. 그들은 어릴 적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전세를 살고 있는데 집 주인이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쫓겨나 듯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그들에게 ‘내집 마련’을 인생의 첫 번째 목표로 삼게 했습니다. 전세 살면서 모은 저축에 대출까지 더해 집을 사면 인생의 첫 단계가 마무리됩니다.
다음은 기회가 되면 좀 더 좋은 상급지로 이사를 갔습니다. 한발 더 나가면 아이들에게 물려줄 집까지 사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받습니다. 임대 소득으로 노후를 보내면 한 인생이 일단락 됩니다. 부동산은 한마디로 ‘인생 프로젝트’인 셈입니다.
다음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 이들은 젊은 나이에 부동산이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외환위기를 지나고 2000년대 후반 강남 재건축과 판교 분양 등을 통해 삶의 희비가 갈리는 것을 보며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맞벌이와 함께 대출, 청약, 전세 레버리지를 동원해 집을 샀습니다. 이들에게 부동산은 기회이자 불안 요인이며,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 중후반 태어난 세대들은 좀 더 공격적으로 보입니다. 젊은 시절 2008년 금융위기와 2010년대 부동산 폭등을 바라봤습니다. 결혼의 풍속도 달라졌습니다. 집이 있어야 결혼한다고 생각하고, 집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라고 판단합니다. 청약 광풍의 한가운데 있었던 주인공들이며, 디딤돌대출 등을 통해 내집 마련의 막차를 탄 세대였습니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들에게 부동산 키워드는 영끌, 기울어진 운동장 등입니다. 부모찬스가 아니면 집을 마련하기 불가능한 시대에 살게 된 이들입니다. 1990년대생들에게 왜 주식투자를 하냐고 물어보면 “주식으로 돈 벌어 집을 사고 싶다”고 답합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신뢰의 잣대이며, 때로는 “사는 곳이 곧 나다”라는 정체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신앙이라는 키워드도 있습니다. ‘현금은 사라지지만 땅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집단 기억을 한국인들은 공유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한국인들에게 부동산은, 아파트는 인생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 세대별로 각기 다른 코드가 입력된 욕망의 대상이란 측면도 있습니다. 공급이 부족한 조건이 만들어낸 다양한 욕망, 부동산 대책이 논란일 수밖에 없는 배경입니다.
최근 이재명 정부가 3번째 부동산 대책을 내놨습니다. 주식시장에서 거래를 일시 정지시키는 서킷 브레이커와 비슷해 보입니다. 핀셋 규제를 하면 풍선효과가 생기고, 어정쩡한 대책을 내놓으면 시장이 비웃고 치고 올라갈 게 뻔하기에 연속적으로 강성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맹점은 남아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인프라는 서울밖에 없고, 그중 한강변 아파트와 요지의 아파트는 공급이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남, 서초, 송파, 용산, 마포, 성동구를 몇 개 더 만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많고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식시장에서는 “중앙은행에 맞서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에서는 “시장에 맞서지 말라”는 말이 더욱 설득력 있습니다. 수많은 부동산 정책 실패가 이에 대한 역설적 반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실수요자들의 거래까지 막아버린 대책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거래를 줄이면서 집값을 잡은 후 시장의 반응에 따라 신속한 공급 등 추가대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설레발 금지의 원칙’입니다. 단정적이고 선언적인 “부동산을 잡겠다”는 말이 동반된 온갖 정책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겸손하게 시장과 내집 마련에 대한 욕망, 열망과 호흡해야 하는 것은 중앙은행뿐 아니라 부동산 정책 최고 책임자들의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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