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의 리테일 업계는 이런 전략으로 성장을 지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구 정체와 온라인쇼핑의 확산, 임대료·인건비 부담이 커지면서 매장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성장과 수익성을 동시에 잡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이제 화두는 ‘매장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보유한 매장을 얼마나 똑똑하게 운영하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디지털 선반 라벨, 셀프 계산대, 재고 센서, 인공지능(AI) 분석, 생성형 AI까지 동원해 재고·인력·에너지·광고를 통합 관리하는 ‘매장 운영 혁신’ 경쟁이 본격화됐다.
프랑스 대형 유통체인은 디지털 선반 라벨과 피킹(상품 집품) 안내 시스템을 결합해 온라인 주문 처리 속도와 정확도를 끌어올리고 있고 영국 대형 유통체인들은 센서·카메라와 재고 시스템을 연동한 ‘디지털트윈 매장’으로 품절을 줄여 매출을 2% 늘리는 등 운영 혁신 기법은 리테일 업계의 격전지로 진화하고 있다.
출점 경쟁에서 운영 경쟁으로…오프라인 매장 내부가 ‘핵심 전장’
베인앤드컴퍼니가 전 세계 상위 250대 리테일 기업의 경영진 66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75%가 향후 2년 내 디지털 운영 혁신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준비 중이라고 답했다. 응답 기업의 60%는 디지털 선반 라벨을 이미 전면 또는 일부 매장에서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셀프 계산대는 55%가, RFID(무선주파수인식) 기술은 44%가, 고객이 직접 스캔해 계산하는 ‘스캔앤고’는 33%가 운영 중이라고 답했다. 과거엔 일부 선도 업체의 실험으로 보이던 기술이 이제는 매장 운영의 기본 인프라로 자리 잡는 모습이다.
기술 도입의 1차 목적은 고객 불편 제거다. 종이에 붙은 가격표가 실제 계산 금액과 달라 생기는 불신, 한참을 돌아도 원하는 상품을 못 찾는 불편, 줄만 10분 서는 계산대는 오프라인 쇼핑의 대표적인 3대 불만 요소다.
매대에 부착된 디지털 라벨은 중앙 서버에서 한 번에 가격을 바꾸기 때문에 가격 오류를 줄이고, 스마트 카메라와 센서는 진열대가 비기 전에 직원에게 알림을 보낸다. 매장 내 위치 정보를 활용한 안내 앱과 스마트 카트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을 줄인다.
몇 년 전까지 매장 혁신 프로젝트의 상당수가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을 감안하면 분위기 변화는 더욱 뚜렷하다.
과거에는 개별 기술을 조각처럼 도입해 효율을 체감하기 어려웠다면 지금은 디지털 선반 라벨, 재고 센서, 컴퓨터 비전, RFID 등을 묶어 하나의 운영 시스템으로 설계하면서 효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응답 기업의 70% 가까이가 “3년 안에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다”고 전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투자 방향도 달라졌다. 예전처럼 새 매장을 얼마나 열지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보유 점포를 어떻게 디지털화할지에 자본을 더 쓰고 있다. 리테일 임원의 60%는 향후 5년간 매장 리뉴얼 관련 설비투자를 5~20% 늘리겠다고 밝혔다.
응답 기업의 44%는 이런 매장 기술 투자가 영업이익률을 1.5%포인트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본다. 영업 마진이 1~2%포인트만 흔들려도 희비가 갈리는 유통업에서 ‘출점 확대’ 대신 ‘점포당 수익성을 얼마나 끌어올리느냐’가 전략의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는 셈이다.
운영 혁신의 두 번째 축은 생성형 AI다. 베인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 10명 중 9명은 개인 생활에서 생성형 AI를 쓰는 것으로 추산된다. 검색이나 정보 탐색을 할 때 AI 요약을 활용한다는 비율은 80%에 이른다.
이미 소비자 일상에 AI가 깊이 들어와 있는 만큼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자연스럽게 “AI가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경험”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가고 있다는 의미다.
리테일 기업의 AI 활용은 빠르게 높아지는 추세다. AI 활용에서 앞서가는 리테일 기업 상당수는 “시장점유율을 지키거나 키우는 제품·기능을 AI 기반으로 출시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이 보고한 생성형 AI 평균 비용 절감 효과는 15% 이상으로 추산된다.
고객 상담 챗봇, 상품 검색·추천, 마케팅 문구 작성, 계약서 작성 자동화, 직원용 업무 보조 도구 등 매장 운영의 뒷단을 담당하던 업무들이 AI 기반으로 재편되면서 매장당 인력 운영 방식도 함께 바뀌고 있다.
현장에서는 ‘AI 코파일럿’ 개념이 확산 중이다. 매장 직원용 앱에 AI를 붙여 ‘어느 매대 재고가 비어가는지, 어느 진열이 기준과 다른지, 어디에 가격 오류가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방식이다. 복잡한 매뉴얼을 뒤지지 않아도 앱에 질문만 던지면 필요한 작업 순서와 해결책을 바로 보여준다.
한 글로벌 슈퍼마켓 체인은 유통기한 임박 상품을 카메라와 AI로 자동 인식해 담당자가 눈으로 확인하던 시간을 75%까지 줄였다.
한 의류 리테일 기업은 AI를 활용해 계약서 초안을 자동으로 만들면서 문서 작성에 걸리는 시간을 70% 줄였고 직원용 AI 어시스턴트를 도입해 체감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다고 평가한다. 단순 반복 업무를 줄이고 한 명의 직원이 더 많은 업무를 커버할 수 있게 만드는 운영 모델 전환이다.
물류센터도 ‘자동화’…글로벌 체인의 실험
매장 운영 혁신의 또 다른 축은 매장 뒤편에서 움직이는 물류센터다. 온라인 주문이 급증하면서 물류센터는 단순 창고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싸게 상품을 흘려보내느냐를 좌우하는 핵심 운영 거점이 됐다. 아마존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 전역 풀필먼트 센터에 시범 도입 중인 로봇 팔 시스템 ‘스패로우’는 컴퓨터 비전과 AI를 활용해 아마존 재고 품목의 약 65%를 인식하고 진공 흡착 방식으로 집어 들어 분류·패키징을 돕는다.
기존 시스템을 보완·대체하도록 설계된 이 로봇은 박스 단위가 아니라 개별 상품을 집어 들 수 있어 박싱·분류 공정에서 사람의 반복 작업을 크게 줄이고 직원들이 더 복잡한 예외 처리나 설비 관리 등 부가가치가 높은 업무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로봇이 피킹과 분류를 맡고 사람은 예외와 판단을 맡는 인간과 로봇의 협업형 운영 모델이다.
이케아를 포함한 글로벌 가구 및 홈퍼니싱 업체들은 물류센터를 ‘쇼룸 뒤편의 두 번째 매장’으로 보는 관점에서 재설계하고 있다. 평탄 포장 구조를 전제로 한 팔레트 단위 입출고, 온라인 주문을 물류센터·매장 픽업 거점으로 나눠 처리하는 옴니채널 구조가 대표적이다.
자동 보관·피킹 설비를 결합해 쇼룸에서 본 상품이 곧바로 물류센터에서 준비돼 픽업·배송되는 흐름을 만들려는 시도들이다. 매장 앞단의 경험을 떠받치는 후방 물류센터 운영까지 자동화하면서 리테일 기업들은 한 점포, 한 센터에서 처리할 수 있는 주문량과 매출, 그리고 최종적으로 영업 마진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관건은 조직·사람…‘작은 투자, 큰 효과’부터 노려야
비용 구조 관점에서도 매장 디지털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깝다. 발목을 잡는 건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조직’이다. 베인 설문 조사에서 리테일 기업들이 매장 기술 도입의 걸림돌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은 느린 내부 의사결정(43%)이었다. 보안·규제 준수 이슈(40%), 계획에 없던 추가 투자 부담(32%), 변화에 대한 조직 내 저항(29%)이 뒤를 이었다.
정작 기술 통합 문제를 주요 장애 요인으로 꼽은 응답은 21%에 그쳤다. 필요한 솔루션은 이미 시장에 나와 있지만 이를 도입·활용하는 내부 역량과 의사결정 구조가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기술 도입 여부가 아니라 어떤 문제부터 푸느냐가 승부를 가른다”고 입을 모은다. 가격 오류, 품절, 장시간 대기 줄, 복잡한 동선 등 고객과 직원이 실제로 겪는 불편에서 출발해 이에 맞는 기술을 묶음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동시에 매장 직원 교육과 인센티브, 본사 의사결정 구조까지 함께 손봐야 기술 투자가 돈 낭비에 그치지 않는다. 인구 구조 변화와 온라인 채널 확대로 단순 점포 수 경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매장을 선도적으로 데이터·AI 기반 운영 체제로 바꾸는 유통사가 가격과 서비스에서 앞선다. 뒤늦게 쫓아가는 조직에 이러한 경쟁은 점점 가파른 언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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