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는 이미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할리우드의 종말을 예고한다는 분석도 나온다.”(미국 IT 매체 테크크런치)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이하 워너브라더스)를 인수한다는 소식에 미국 할리우드는 큰 혼란에 빠졌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할리우드의 대표 스튜디오를 차지한다는 것은 콘텐츠 시장의 권력이 온통 OTT에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워너브라더스는 102년 역사를 가진 곳으로 ‘해리포터’, ‘프렌즈’ 등 글로벌 콘텐츠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 다수를 보유하고 있다. 인수 확정까진 다양한 변수가 남아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상징과도 같은 워너브라더스를 넷플릭스가 최종적으로 인수한다면 사실상 TV와 극장의 시대는 끝이 난다. 대신 OTT, 그중에서도 넷플릭스의 승자독식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다.
넷플릭스로 인해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이때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025년 한국 콘텐츠 산업을 돌이켜 보면 주요 사건의 중심엔 모두 넷플릭스가 있었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가 예상 밖의 글로벌 흥행을 이뤄낸 것이 대표적이다. ‘케데헌’은 한국 문화 자체가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이에 따라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한편에선 악재가 잇달아 터지고 있다. 특히 한국 영화 시장에선 1000만 영화가 사라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결국 2025년은 K콘텐츠 산업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한 동시에 극단적인 악재를 함께 경험한 해라고 할 수 있다. 화제작 다수는 넷플릭스로부터
하지만 ‘케데헌’의 성공은 한국 콘텐츠 시장에 커다란 숙제를 남겼다. ‘케데헌’은 한국 문화를 다룬 작품이지만 한국이 주요 주체는 아니다. 한국 제작사가 아닌 해외 제작사가 만든 작품이며 글로벌 OTT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에 해당한다. 한국 문화를 활용한 것도, 그 수혜를 누린 것도 한국이 아닌 해외라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올해 공개된 한국 콘텐츠 중 화제가 된 작품 다수도 넷플릭스에서 나왔다. ‘중증외상센터’부터 ‘폭싹 속았수다’, ‘은중과 상연’ 등이 모두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에 해당한다.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 시즌3는 평이 엇갈리긴 했지만 93개국에서 1위를 휩쓸며 신기록을 세웠다. K콘텐츠의 커다란 영광이지만 그 영광의 대부분이 넷플릭스로부터 비롯됐다는 점에서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1000만 영화 실종 사건
그런데 2025년엔 1000만 영화마저 사라졌다. 올해 국내 박스오피스 1위는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으로 567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2위는 한국 영화 ‘좀비딸’로 563만 명을 기록했다. 과거엔 중박 영화에 해당했던 관객수가 이젠 1~2위 영화의 관객수가 된 것이다. 외국 영화 가운데서도 1000만 관객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은 관객이 국내외 작품을 불문하고 극장에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 영화 자체의 위기는 더욱 심각하다. 올해 국내 박스오피스 3~6위는 모두 외국 영화이다. 가까스로 한국 영화 ‘야당’이 337만 명 관객을 동원해 전체 7위에 올랐다. 사실상 국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전부 외국 영화에 내어준, 한국 영화의 참패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대작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17’,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가 올해 잇달아 개봉하면서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키17’은 301만 명으로 8위, ‘어쩔 수가 없다’는 294만 명으로 9위에 그쳤다. 물론 작품성과 관객수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명장들이 빚어낸 해당 신작에 대한 호평들도 나왔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 감독들의 작품조차 관객들을 극장까진 유인하지 못해 큰 아쉬움을 남겼다.
위기는 해외에서도 포착됐다. 올해 열린 ‘제78회 칸국제영화제’엔 한국 장편 영화가 한 작품도 초청받지 못했다. 공식 부문, 비공식 부문 통틀어 칸 초청작 0편을 기록한 것은 1999년 이후 26년 만의 일이다. 해외에서도 한국 영화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대로라면 한국 영화 시장의 존립이 가능하긴 한 걸까.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내 미디어산업 전체가 넷플릭스를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다. 현재 미디어산업은 넷플릭스 연대, 반(反)넷플릭스 연대로 나눠지고 있다. 넷플릭스는 네이버, SBS와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반면 넷플릭스에 대항하기 위해 티빙, 웨이브, 디즈니플러스는 통합 구독 상품을 내놓는 등 다양한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물론 넷플릭스가 콘텐츠 산업의 전부는 아니다. 국내 방송사에서도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태풍상사’, ‘모범택시3’ 등 여러 작품이 나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국내 시장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런 일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심지어 해당 작품들마저 넷플릭스에 동시 방영되지 않았던가. 방송 채널이 아닌 넷플릭스를 통해 작품들을 본 사람들도 꽤 많다. 이 정도면 넷플릭스를 제외하고는 콘텐츠를 이야기하기 어려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콘텐츠 시장의 영광과 위기는 그렇게 넷플릭스와 함께 찾아왔다. 문제는 빛이 강렬해진 만큼 그림자가 짙고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를 인수하게 되면 한국 시장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 전체가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시청자가 TV와 극장 스크린이 아닌, 넷플릭스 앞에만 앉아 있게 된다면 콘텐츠 생태계는 과연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넷플릭스의 승자독식 구조가 갈수록 공고해지는 가운데 2025년 콘텐츠 시장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어렵고 무거운 과제가 주어졌다. 2026년 새해엔 작은 열쇠라도 찾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그래야만 K콘텐츠는 더 오래, 더 환하게 빛날 수 있다.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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