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중개사, 추상적 고지론 책임 못 피해
대법 “시세·세대수로 위험 추정해야”
대법원은 2025년 12월 4일 다가구·다세대주택 임대차 중개 사건 2건을 연이어 파기환송하며 공인중개사의 확인·설명의무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특히 “임대인이 자료를 안 준다”는 사정만으로는 면책되지 않으며 주변 시세와 건물 규모를 토대로 선순위 보증금 규모를 추정해서라도 위험을 고지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자료 못 받았다”는 변명 더 이상 안 통해
대법원 제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다가구주택 중개 사건에서 “임대인의 자료 제출 불응으로 선순위 다수 있음을 구두로 설명함”이라고만 기재한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2024다283668).
2020년 체결된 임대차계약에서 공인중개사는 8개 호실로 구성된 다가구주택 중 1개 호실을 임대차보증금 1억1000만원에 중개했다.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에는 근저당권 7억1500만원 설정 사실과 함께 “임대인의 자료 제출 불응으로 선순위 다수 있음을 구두로 설명함”이라고만 기재됐다.
이후 경매 절차에서 다른 호실의 선순위 임대차보증금 합계 7억4000만원이 드러났고 원고는 보증금을 한 푼도 회수하지 못했다. 건물 감정가는 약 13억원에 불과했다.
대법원은 “개업공인중개사로서는 설령 임대인이 관련 자료제공을 거부해 실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웠더라도 다가구주택의 규모와 전체 세대수, 인근 유사 부동산의 임대차보증금 시세 등을 확인해 선순위 임대차보증금채권이 얼마나 있을 수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러한 선순위 임대차보증금채권의 존부 및 그 범위는 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성을 따져보고 계약 체결 여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사항”이라며 “부동산 중개 전문가로서 공인중개사의 역할, 공인중개사법의 입법목적 등을 종합하면 개업공인중개사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와 신의성실로써 해당 다가구주택에 선순위 임대차보증금채권이 얼마나 있을 수 있는지 조사·확인해 임차의뢰인에게 성실하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다세대주택도 예외 아냐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이날 다세대주택 판결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2024다305087). 2017년 체결된 임대차계약에서 공인중개사는 다세대주택 3층과 5층 두 세대를 중개하면서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에 “근저당권 18억원 설정”이라고만 기재했다.
실제로는 이 건물 23개 구분건물에 공동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었고 경매 시 다른 세대 임차인들의 소액보증금 5억5000만원이 최우선 배당되면서 원고들은 보증금을 회수하지 못했다.
1심과 항소심은 “다세대주택은 세대별로 독립된 권리관계가 형성되므로 다른 세대의 임대차 현황을 확인할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공동저당권이 설정된 경우 민법 제368조에 따라 각 부동산의 경매대가에 비례해 채권을 분담하게 되므로 다른 세대의 선순위권리와 임대차 현황이 중개대상물의 배당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동일인이 다세대주택 여러 세대를 소유하는 경우 다른 세대에도 임차인이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공인중개사는 임대의뢰인에게 다른 세대의 임대차보증금, 임대차 시기와 종기 등에 관한 자료를 요구해 확인한 뒤 임차의뢰인에게 설명하고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특히 “임대의뢰인이 자료요구에 불응한 경우에는 그 사실을 임차의뢰인에게 설명하고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에 기재한 뒤 교부할 의무가 있다”며 단순히 구두로 “선순위가 많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급심과 엇갈린 판단…“추상적 고지로는 부족”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최근 하급심 판결들과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앞서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제9-3 민사부(재판장 윤재남)는 2024년 9월 4일 선고한 판결에서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에 ‘임대인의 자료 제출 불응으로 선순위 다수 있음을 구두로 설명함’이라고 기재하고 임차인도 이를 확인했다면 설명의무를 다한 것”이라고 판단했다(2023나72693).
같은 법원 제3-3 민사부(재판장 장창국)도 2024년 10월 25일 선고한 판결에서 “다세대주택은 세대별로 독립해 권리관계가 형성되므로 다른 구분 세대의 임대차 현황을 확인·고지할 의무는 없다”며 “공동담보에 관한 사항은 부동산등기사항증명서 등을 통해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고 봤다(2024나12957).
하지만 대법원은 두 사건 모두 파기환송하며 “추상적인 ‘선순위 다수’ 언급으로는 부족하며 구체적인 규모와 위험도를 설명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돋보기]
실무에 미칠 파장…“중개 현장 큰 변화 예고”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공인중개사의 확인·설명의무에 관한 구체적이고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특히 다가구·다세대주택의 경우 ▲전체 세대수 확인 ▲인근 임대차 시세 조사 ▲예상 선순위 보증금 총액 산정 ▲소액보증금 존재 가능성 검토 ▲공동저당권 설정 시 다른 부동산 권리관계 확인 등이 필수 절차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판결문에 명시된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다가구와 다세대, 이제 구별 없다 : 종전에는 다가구주택(1개 소유권)만 다른 호실 확인 의무가 있고 다세대주택(세대별 소유권)은 독립된 권리관계로 보아 확인 의무가 없다는 견해가 유력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세대주택이라도 공동저당권이 설정된 경우 민법 제368조(공동저당) 적용으로 다른 세대가 배당에 영향을 미치므로 확인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다.
② “자료 못 받았다”로는 면책 안 된다 : 판결문에서 대법원은 “설령 임대인이 관련 자료제공을 거부해 실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웠더라도” 건물 규모, 세대수, 인근 시세 등으로 선순위 보증금 규모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고 판시했다. 즉 완벽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이유로 조사 의무가 면제되지 않는다.
③ 구체적 수치 제시 필요 : “선순위가 많습니다”라는 추상적 언급이 아니라 세대수와 시세를 토대로 “선순위 보증금이 최소 ○억원 이상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경매 시 귀하의 보증금 회수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라는 식의 구체적 설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④ 선관주의와 신의성실 강조 : 대법원은 공인중개사법 제29조 제1항(전문직업인으로서 신의와 성실로써 공정하게 중개 관련 업무를 수행할 의무)을 강조하며 단순한 서류 전달자가 아니라 “부동산 중개 전문가”로서의 적극적 역할을 요구했다.
⑤ 인과관계 폭넓게 인정 : 원고가 “선순위 보증금 규모를 알았다면 계약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같은 조건으로는 체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들어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즉 정보 부족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비교적 느슨하게 판단한 것이다.
⑥ 공인중개사법 입법 목적 재확인 : 대법원은 “공정하고 투명한 부동산거래 질서 확립”, “국민의 재산권 보호”, “부동산중개업을 건전하게 육성”이라는 공인중개사법의 입법 목적을 반복 강조하며 이를 설명의무 확대의 근거로 제시했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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