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 인터뷰
[커버스토리 : 코리아 슈퍼사이클 인터뷰]
하지만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진단은 냉철하다. 그는 지금의 호황을 축제가 아닌 ‘마지막 잔불’이라 정의하며 ‘지도를 보고 걷던’ 길이 아니라 ‘나침반만 들고 개척하는 길’을 가지 못하면 10년 뒤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의 호황이 한국 기업의 근원적인 체질 개선 결과가 아니라 외부 사이클이 만들어준 운일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 교수는 기술경제학의 권위자로 2015년 저서 ‘축적의 시간’을 통해 한국 산업계에 거대한 화두를 던진 인물이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이 ‘개념 설계(Conceptual Design)’ 역량의 부재에 있다고 진단했다.
선진국을 빠르게 따라가는 ‘추격자’ 모델로는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직접 몸으로 겪으며 쌓아올린 ‘축적’만이 유일한 돌파구임을 역설했다.
그는 답이 없는 길을 찾기 위해 지난 3년간 한국 석학 스무 명을 모아 머리를 맞댔다. 각 분야에서 오랜 시간 해결하지 못했으나 해결하는 순간 세상의 패러다임을 뒤바꿀 난제들을 던지는 ‘그랜드퀘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도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Q. 경쟁력을 잃어가던 한국 제조업이 다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축적의 시간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산업의 큰 전환이나 패러다임 변화는 대부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예측할 뿐이죠. 스마트폰 혁명도 애플이 이끌었지만 애플이 처음 시도한 건 아니었습니다.
1990년대 말부터 전화기와 컴퓨터를 결합하려던 시도가 있었고 노키아가 먼저 스마트폰에 도전했죠. 가장 큰 차이는 관점이었습니다. 노키아는 스마트폰을 전화기의 연장선상인 통신기기로 접근했고 컴퓨터회사였던 애플은 소프트웨어가 핵심인 정보통신기기로 접근했습니다. 스마트폰의 핵심은 운영체제(OS)였고 결국 승자는 컴퓨팅 역량을 오랫동안 축적해 온 애플이었습니다.
애플이 시대적 변화에 올라탈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도 D램 역량을 쌓고 AI 시장 확대를 예상해 HBM 같은 새로운 시장에 대비하다가 폭발적인 사이클을 만난 것입니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바이오, 자동차, 조선, 방산이 호황을 맞은 것도 10년 전 뿌린 씨앗의 결과입니다.
Q. 이번 슈퍼사이클이 기업의 본질적인 경쟁력 회복이라고 보십니까.
“지금까지 쌓아온 혜택을 마지막으로 누리는 ‘잔불’ 같은 느낌입니다. 이 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장작을 넣어야 합니다. ‘슈퍼사이클을 누린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국가나 기업이 핵심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건 ‘사이클을 타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지금처럼 천수답(빗물에만 의존하는 논)식으로 사이클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사이클에 덜 민감하고, 더 깊고, 축적된 고유 역량을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다음 질문은 ‘우리는 지금 10년 뒤를 위한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여야 합니다.”
Q. 한국 제조업이 가진 가장 큰 한계는 무엇입니까.
“과거의 성공 방식이었던 ‘납기, 품질, 가격’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제 이 세 가지는 중국이 더 잘합니다. 인공지능(AI), 전기차, 로봇 등 최첨단 산업에서도 중국의 성적표가 화려합니다.
한국은 그동안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선진국이 이미 갔던 길 중 어떤 길을 가장 잘 갈 수 있을지를 고르고, 외국 기술을 학습해 더 싸게, 더 성실하게, 더 좋은 품질로 제공하며 글로벌 시장을 공략했죠. 해외 학자는 이를 두고 ‘한국은 타당성 평가로 성공했다’고 평가합니다.
지도를 보고 앞서 만들어놓은 길을 잘 따라가는 방법만 연구하면 됐죠. 하지만 지금은 지도가 없는 길을 개척해야 할 때입니다. 지도가 없을 때는 선배 세대의 방식이 통하지 않아요. 이제는 방향만 가리키는 ‘나침반’을 들고 스스로 길을 내며 지도를 그려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과정에서 의미 있는 ‘도전적 시행착오’가 쌓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글로벌 리딩 기업들은 ‘스몰 베팅(Small Betting)’을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해저 데이터센터를 시도할 때 처음부터 10조원을 쏘지 않았습니다. 작은 원통을 5주간 담그고 그다음엔 더 긴 원통 모양의 데이터센터를 2년 담그는 식으로 리스크를 쪼개 테스트했죠. 10년간 진행한 프로젝트를 끝내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를 실패라고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프로젝트 자체는 중단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해저 내에서 발생하는 데이터 처리 방식에 대해 많은 걸 학습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80년대식 ‘빅 베팅’ 사고에 갇혀 있어요. 한 방에 올인해서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리스크가 작은 것만 고르게 되고 결국 혁신은 사라집니다.”
Q. 정부의 역할도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금융도 대출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리스크 있는 산업 투자로 전환돼야 합니다. 한국에서 은행의 사업 구조는 대출 중심입니다. 금융이 산업을 이해하고 리스크를 함께 분담하는 역량을 갖춰야 하는데 자금이 산업에 혈액을 공급하지 못하고 부동산 담보대출에 묶여 있습니다.
벤처캐피털도 활성화돼 있지 않습니다. 정부도 규제를 풀어줘야 합니다. 사고 나면 책임 묻기 바쁜 지금의 포지티브 규제 체제에서는 아무도 도전하지 않습니다. 시행착오를 보듬어주는 제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기록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사고 나면 문 닫아야 하는 환경에서는 자율주행차 같은 미래 산업이 불가능합니다.”
Q. 마지막으로, 이번 슈퍼사이클이 끝나고 한국 산업에 반드시 남아야 할 단 하나는 무엇입니까.
“축적은 동사입니다. 무엇을 축적할 것이냐고 할 때 그 목적어는 ‘도전적인 시행’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에 문제를 잘 푸는 ‘우수한 사람’은 많지만 문제를 던지는 ‘탁월한 사람’은 부족합니다.
각 분야의 인사결정권자나 조직문화도 도전을 시행착오가 아니라 시행‘학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변화해야 합니다. 정부 시스템이나 규제, 금융, 교육체계도 모두 추격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옷을 갈아입을 때입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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