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동 원유 의존도 95% 달해
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며 30일 일본 닛케이지수가 51,885.85에 마감했다. 이날 도쿄 시민들이 시내에 설치된 닛케이지수 전광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며 30일 일본 닛케이지수가 51,885.85에 마감했다. 이날 도쿄 시민들이 시내에 설치된 닛케이지수 전광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에 일본 경제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일본이 수입하는 원유의 95%가량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계 공급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시장에선 주가, 엔화 가치, 국채 가격이 모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가 가속하고 있다. 일본에선 경기침체 속 물가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까지 나온다.
산업계 공급망 연쇄 타격
미국이 이란을 공격한 직후인 지난 3월 1일 상선미쓰이, 닛폰유센, 가와사키키센 등 일본 3대 해운사가 호르무즈해협 운항을 중단했다. 일본은 호르무즈해협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에서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를 조달해 왔다. 일본은 2024년 기준으로 원유의 95.9%, LNG의 10.6%를 중동에 의존했다.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 역시 중동 의존도가 40%를 넘는다.

나프타 수급이 어려워지자 일본 산업계 공급망이 흔들리고 있다. 신에쓰화학공업은 건축 자재 등에 사용하는 폴리염화비닐(PVC) 가격을 약 20% 인상하고 생산량을 감축했다. PVC 원료인 에틸렌을 구하기 어려워져서다. 에틸렌은 나프타를 원료로 한다.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나프타→에틸렌→PVC→건축 자재’로 이어지는 공급망에 연쇄 타격을 가한 것이다. 앞서 에틸렌을 생산하는 미쓰비시케미컬, 미쓰이화학, 이데미쓰고산 등이 잇달아 감산에 들어갔다.

나프타는 에틸렌뿐 아니라 프로필렌, 부타디엔 등 다양한 기초화학품의 원료다. 이들 기초화학품은 가공을 거쳐 자동차부품, 가전제품 등에 쓰인다. 나프타에서 파생된 다양한 소재 및 제품으로 영향이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중동 지역 물류 차질에 따라 일본 완성차 업체들은 차량 생산을 줄이기 시작했다. 닛산자동차는 규슈 후쿠오카현 공장에서 3월에만 1200대 규모를 감산했다. 중동 주력 수출 차종 운송 지연으로 보관 공간이 부족해지자 중동 수출용 이외 차량을 감산하는 것이다. 앞서 도요타자동차는 4월까지 중동 수출용 차량 약 4만 대를 감산하기로 했다.

호르무즈해협 봉쇄는 일본 온천 영업, 대중교통 운행에까지 타격을 입히기 시작했다. 원유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중유, 경유까지 공급난이 확산한 데 따른 것이다. 효고현의 한 온천 시설은 보일러로 원천수를 데우는 데 쓰는 중유 공급 차질로 휴업하기로 했다. 이 온천 사장은 “개업한 지 20년 이상 지났지만 이런 사태는 처음”이라며 “냉탕만으로 운영할 수도 없고 중유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경유 공급난에 따른 피해도 확산하고 있다. 나가사키현의 한 여객선 운항 업체는 경유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지난 3월 23일부터 여객선 운항 횟수를 하루 왕복 11회에서 9회로 줄였다. 전력회사인 J파워는 석탄과 경유를 연료로 쓰는 나가사키현의 마쓰우라 화력발전소 출력을 낮췄다.
주가·엔화·국채값 모두 떨어져
전쟁이 길어지자 일본에서 주가, 엔화 가치, 국채 가격이 모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월 30일 도쿄 주식시장에서 닛케이지수는 직전 거래일 대비 2.79% 떨어진 5만1885에 마감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기업 실적이 악화할 것이란 전망이 확산하는 영향으로 분석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원유 가격 고공행진이 이어지며 기업 실적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닛케이지수는 지난해 10월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 출범 이후 줄곧 오름세를 보였다. 적극 재정을 내건 ‘사나에노믹스’에 대한 기대감에서다. 올해 2월에는 사상 최고치인 5만8850까지 치솟으며 6만 돌파를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이날 장중 5만566까지 급락하며 이제는 5만 밑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일본 증시 시가총액 1위인 도요타자동차는 이날 5.40% 하락했고 인공지능(AI) 관련 종목 과열 우려에 소프트뱅크그룹(SBG)은 6.44% 급락했다. 스즈키 마사히로 다이와증권 애널리스트는 “유가 상승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소재 기업부터 실적 전망치가 하향 조정되고 있다”며 “제조업 전반으로 하향 조정이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엔화 가치도 떨어지고 있다. 이날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한때 달러당 160엔대 중반까지 상승(엔화 가치는 하락)하며 1년 8개월 만에 최고치를 나타냈다. 중동 정세 악화에 ‘위기 때 달러 매수’ 현상이 이어지며 달러가 강세인 반면, 유가 상승으로 무역적자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은 엔화 약세를 부추기는 모습이다.

시장에선 일본 정부의 엔화 매수 개입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미무라 아쓰시 재무성 재무관은 이날 엔저에 대해 “이 상황이 계속되면 단호한 조치가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원유 선물시장에 더해 외환시장에서도 투기적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경고의 뜻을 나타냈다.

일본 장기 금리 지표인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급등(국채 가격은 급락)하고 있다.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이날 한때 연 2.39%까지 오르며 1999년 2월 이후 약 27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유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와 일본은행의 조기 기준금리 인상 전망이 확산하며 채권 매도세가 강해졌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3월 30일 중의원(하원) 예산위원회에서 시장 예상보다 기준금리 인상이 늦어지면 장기 금리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나타냈다. 시장은 일본은행이 이르면 4월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대 15조 엔 비용 상승 악영향
일본 정부는 수입 자원 가격 상승이 일본 경제에 9조~15조 엔의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추산을 발표했다. 자원 가격이 전년 대비 50% 상승하면 일본 경제의 비용은 9조 엔, 국내총생산(GDP) 대비 1.4% 정도 증가한다는 계산이다. 자원 가격이 80% 오르면 비용은 15조 엔, GDP 대비 2.3%가량 늘어난다는 추정이다.

일본 정부는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추산했다. 국제 원유 가격이 10% 상승하면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최대 0.3%포인트 정도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경기에 대해서는 “완만하게 회복하고 있으나 중동 정세 영향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일본에선 당장 4월부터 가정용 전기요금이 평균 사용량 기준으로 전달 대비 400엔 안팎 오른다. 일본 정부가 겨울철 난방 수요에 대응해 올해 1∼3월 지급한 보조금이 사라진 데 따른 것이다. 6월 이후에는 호르무즈해협 봉쇄에 따른 연료 가격 급등도 전기요금에 반영된다.

일본 정부는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지난 3월 16일 민간 비축유 15일분 방출을 시작한데 이어 26일부터는 국가 비축유 30일분도 방출을 시작했다. 모두 약 8000만 배럴로 일본 소비량의 45일분에 해당한다. 일본의 비축유 규모는 작년 말 약 4억7000만 배럴로 254일분이다.

일본 정부는 유가 급등에 대응해 2025 회계연도 예산 예비비에서 약 8000억 엔을 쓰기로 결정했다. 휘발유 가격을 L당 170엔 수준으로 억제하기 위한 보조금 지급에 전용 기금 2800억 엔을 투입할 계획이었으나 중동 사태 장기화에 대비해 예비비를 추가로 활용하기로 했다.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장기화하면 비축유 방출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고 아사히신문이 짚었다. 휘발유 보조금 지급도 근본적 대책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도쿄신문은 “중동 긴장이 장기화해 보조금 증가로 재정 지출이 확대되면 엔화 가치는 하락하고 원유 조달 가격이 올라 휘발유 가격이 더 상승할 것”이라고 했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