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환전한 기업 덕에 환율 하락
예상보다 낮은 미국 경제지표
서학개미는 주가하락에 환율 손실까지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1개월 만에 1300원대로 떨어졌다. 불과 두 달 전인 6월 1560원까지 뛰어오르며 1600원 선에 육박하던 흐름과는 정반대의 양상이다.

8월 19일 서울외환시장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70원 오른 1413.5원에 개장했지만 곧바로 하락 전환해 낮 12시 2분쯤 1399.0원까지 떨어졌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게 치솟았던 환율이 이토록 빠르게 가라앉은 배경을 단 하나의 이유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환율은 금리와 물가, 증시와 기업 해외투자까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수많은 돈의 흐름이 맞물려 나타난 결과기 때문이다. 특히 달러의 움직임에 크게 좌우되던 원·달러 환율이 이번에는 원화 자체의 수급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더 떨어지기 전에 팔자”로 바뀐 기업
1600원 바라보던 환율,1300원대로 떨어진 3가지 이유
먼저 수출기업들이 달러를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7월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 발행을 계기로 대규모 달러 자금이 국내에 유입됐고 이후 반도체와 조선업체를 중심으로 수출대금 환전과 달러 매도가 이어졌다.

환율의 방향이 꺾이면서 기업들의 달러 운용 방식도 달라졌다. 그동안 수출기업들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곧바로 국내로 송금하기보다 현지 법인이나 달러 계좌에 유보금 형태로 쌓아두는 경우가 많았다.

달러 금리가 높은 데다 환율이 더 오를 수 있다는 기대가 남아 있어 서둘러 원화로 바꿀 유인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차·기아, HD한국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 주요 수출 기업들을 불러 “환율 안정을 위해 수출대금을 즉시 환전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 와중에 SK하이닉스의 ADR 상장은 기업들에 달러 매도 타이밍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SK하이닉스가 공모자금으로 모은 256억달러(40조원)를 국내 투자에 쓰려면 원화로 환전해야 하는데 시장에 대규모 달러가 쏟아질 경우 환율은 하락하기 때문이다.

달러 공급이 늘면 환율은 더 떨어지고 추가 하락을 우려한 기업이 다시 달러를 내놓는다. 환율 상승기에 달러를 쌓아두던 심리가 이번에는 정반대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변정규 미즈호은행 본부장은 “기업 입장에서 오늘 1520원에 바꿀 수 있는 달러가 며칠 뒤 1400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면 환전을 서두르게 된다”며 “SK하이닉스 ADR 상장 이후 한 달 사이 환율이 100원 이상 빠지면서 이제는 ‘더 내려가기 전에 빨리 환전하자’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특히 법인세 중간 예납 신고 및 납부 기간을 맞아 기업들이 대규모 달러 매도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한국투자증권은 올해 8월 법인세 중간예납 규모가 약 46조원 또는 그 이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추정했는데 통상 8월 중간예납 규모가 10조~17조원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4배가량 늘었다. Fed 금리 인상 기대 낮아지고 원화 가치는 상한국은행도 원화 가치 상승에 힘을 보탰다. 7월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한·미 금리 역전 폭이 줄었고 추가 인상 가능성까지 열어두면서 시장의 통화정책 기대가 달라졌다.

변 본부장은 “한·미 금리 역전 폭이 1%포인트까지 줄어든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통화정책이 굉장히 매파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라며 “지난달 금리를 올렸는데 연속 인상, 이른바 ‘백투백’ 가능성까지 나온다. 시장에서는 이제 환율을 잡겠다는 쪽으로 정책 방향이 완전히 바뀐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원화의 수급이 달라진 상황에서 달러의 힘은 빠졌다. 최근 미국에서는 물가와 고용, 소비 지표가 잇따라 예상보다 약하게 나왔다.

특히 7월 소비자물가와 생산자물가가 시장 예상보다 낮았고 소매판매도 감소하면서 미국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올릴 것이라는 기대가 약해졌다. 한때 절반을 넘었던 9월 금리인상 확률은 8월 중순 30% 안팎까지 떨어졌다. 달러인덱스 역시 8월 19일 장중 98.93까지 밀리며 5월 말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왔다.

일각에서는 환율이 1350원대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향후 환율의 첫 번째 변수는 기업의 달러 매도가 얼마나 오래 이어지느냐다.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조선업체의 달러 공급이 계속되고 기업의 환헤지 비중까지 높아진다면 환율 상단은 계속 눌릴 수 있다.
환율 다시 오를 변수는?미국의 경제지표 역시 중요한 변수다. 최근 약한 경제지표 때문에 Fed의 추가 금리인상 기대가 후퇴했지만 Fed 내부의 물가 경계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국 경제지표가 다시 강해지거나 물가가 반등하면 금리인상 기대가 살아나면서 달러도 다시 힘을 받을 수 있다.

달러 ‘저가 매수’를 노리는 투자자들 역시 환율을 높일 수 있는 요인이다. 환율이 낮아질수록 해외주식에 투자하는 개인과 기관, 수입업체에는 달러를 싸게 살 기회가 된다. 특히 미국 주식 투자 열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로 내려오면 서학개미의 달러 환전 수요가 다시 늘어날 수 있다. 환율이 내려갈수록 달러를 사려는 수요가 붙으면서 추가 하락을 막는 힘으로 작용한다.

기존 서학개미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1500원대에서 달러를 바꿔 미국 주식을 산 투자자는 주가가 그대로여도 환율 하락만큼 원화 환산 수익률이 낮아진다.

예컨대 원·달러 환율이 1550원에서 1400원으로 떨어지면 달러 기준 자산 가격이 변하지 않아도 원화로 환산한 자산 가치는 약 10% 줄어든다. 최근 미국 주식이 올랐더라도 환율 하락 때문에 체감 수익률이 크게 낮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최근 미국 증시 하락과 환율 하락이 겹치면서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일 때 미국 주식을 매수한 투자자들은 주가 손실에 환차손까지 더해지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반면 신규 투자자에게는 1300원대 환율이 미국 주식을 더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다. 환율이 더 떨어질수록 “달러가 쌀 때 사두자”는 개인들의 환전 수요가 커질 수 있어 1300원대 중반으로 갈수록 환율 하단을 지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