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스타 르망서 WEC 시즌 최고 성적 7위
‘마그마’ 앞세운 고급화 전략
에어컨 없는 하이퍼카 콕핏 내부 온도는 50도에 육박했다. 차량 무게를 줄이기 위해 냉방장치조차 포기한 결과다. 이날 무대가 된 COTA는 고속 코너와 강한 제동 구간, 거친 노면이 뒤섞인 WEC 캘린더의 대표적인 고난도 서킷이다. 특히 높은 기온과 노면 온도 탓에 타이어 관리가 결과를 가르는 변수로 꼽혔다.
이날 17번 차량은 레이스 초반 접촉 사고로 페널티를 받았지만 이를 만회하고 최종 7위를 기록했다. 함께 출전한 19번 차량은 세이프티카 타이밍이 어긋나며 15위에 그쳤다.
○“우리는 지킬 룰이 없다”…빈 공간에서 시작한 자신감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2024년 12월 4일 두바이에서 출범을 알린 뒤 올해 4월 19일 이탈리아 이몰라 서킷에서 열린 6시간 레이스로 정식 WEC에 데뷔했다. 자체 개발한 3.2리터 트윈터보 V8 하이브리드 엔진 G8MR을 얹은 하이퍼카 GMR-001을 앞세워 단 499일 만에 엔진 개발과 팀 구축을 모두 마친 셈이다.
BMW·애스턴마틴·캐딜락 등 100년 이상 헤리티지를 가진 브랜드들 사이에서 한국 완성차 브랜드가 최상위 클래스인 하이퍼카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지난 6월 프랑스 르망에서 열린 ‘24시간 르망’에서는 19번 차량이 새벽 시간대 두 차례 전기계통 이상으로 멈췄다가 재시동에 성공하며 완주에 성공, 한국 브랜드 최초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오스틴은 2026년 WEC 8개 라운드 중 유일한 북미 일정이다. 이날 제네시스 마그마 라운지에서 만난 테드로스 멩기스테 제네시스 북미법인 최고운영책임자(COO)는 페라리·캐딜락 등 경쟁자들과의 차별점을 묻는 질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했다.
따라야 할 히스토리도 룰도 없다. 과감하고 대담하게 우리가 직접 만들면 된다”고 답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어록 “해봤어? 하면 된다”를 한국어 발음 그대로 언급하며 “그 말이 현대차와 제네시스를 만들었고 지금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을 이끌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499일 만의 데뷔에 모두가 놀랐고 딜러들도 고성능차 시장에서 제네시스가 경쟁력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은 9월 27일 일본 후지 스피드웨이에서 열리는 WEC 6라운드 ‘후지 6시간’에 출전해 후반기 상승세를 이어갈 계획이다.
○레이싱 헤리티지, 양산차로 이어지나
아울러 제네시스는 레이싱에서 쌓은 노하우를 브랜드 차원의 피드백으로 이어가고 있다. 레이싱카 GMR-001은 V8 가솔린 하이브리드 엔진을 쓰는 반면, 올해 1월 국내에서 첫선을 보인 ‘GV60 마그마’는 순수 전기 양산차라 파워트레인 자체를 공유하는 구조는 아니다. 하지만 멩기스테 COO는 “경주를 통해 배운 것을 양산차 개발에도 얼마든지 반영할 수 있다”고 답했다.
GV60 마그마는 올 하반기 미국 캘리포니아·뉴욕·뉴저지 3개 주에서 순차 출시를 시작했다. 멩기스테 COO는 “고객들은 마그마 오렌지 컬러와 성능에 열광하고 있고 특히 전기차인데도 마치 내연기관 스포츠카처럼 기어 변속을 체감할 수 있는 ‘버추얼 기어 시프트’에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마그마’는 하루아침에 나온 이름이 아니다. 2023년 4월 GV80 쿠페에 과감한 오렌지 컬러를 입히며 처음 ‘마그마 오렌지’라는 이름을 썼는데 반응이 예상보다 뜨거웠다. 이후 중동에서 G80 마그마 스페셜 에디션으로, 다시 레이싱팀과 양산차로 이어지며 3년 만에 제네시스 브랜드의 핵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제네시스는 이 색상의 의미를 “보이지 않는 표면 아래 극한의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마그마의 본질”에 빗댄다. 조용하고 절제된 인상 이면에 자신감과 열정을 감춘 한국인의 기질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레이싱카 디자인에도 이런 한국적 요소가 곳곳에 담겼다. 차체에는 ‘마그마’가 한글로 새겨져 있고 로고는 마그마의 초성인 ㅁ·ㄱ·ㅁ을 형상화했다.
○현대차 美 판매 사상 최고치…제네시스 비중은 아직 4.5%
레이싱 데뷔 자체도 화제지만 정작 눈에 띄는 건 최근 몇 년간 현대차그룹(현대차·기아·제네시스)의 미국 시장 실적이 뚜렷한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차그룹의 미국 판매량은 2023년 165만2821대(전년 대비 12.1% 증가)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스텔란티스를 제치고 ‘빅4’에 진입했다. 2025년에는 183만6000대, 시장점유율 11.3%로 1986년 미국 진출 이래 최고 기록을 세웠다. 올해 1~4월 누적 점유율은 11.8%로 전년 동기 대비 1%포인트 상승했고 업계에서는 연내 12%대 돌파 가능성도 거론된다. 현재 순위는 GM(약 17%대)·도요타(15%대)·포드(13%대)에 이은 4위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 부과라는 악재 속에서 거둔 성적이라 더 눈에 띈다. 업계에서는 가격 인상을 최소화하고 현지 생산 비중을 늘린 전략, 그리고 하이브리드 등 친환경차 라인업 강세가 점유율 방어의 배경으로 꼽힌다. 실제로 올해 1분기 현대차·기아의 하이브리드 판매량은 9만7627대로 전년 동기 대비 53.2% 급증했다.
특히 제네시스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2021년 4만9621대였던 미국 판매량은 2022년 5만6410대, 2023년 6만9175대, 2024년 7만5003대를 거쳐 2025년에는 8만2331대로 처음 8만 대 벽을 넘었다. 5년 연속 판매 증가다. 이는 미국 진출 10년 만에 닛산의 럭셔리 브랜드 인피니티를 넘어선 수치로 링컨·아큐라 추격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다만 그룹 전체 판매 대비 제네시스 비중은 아직 4.5% 안팎에 불과하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은 “향후 10년 내 마그마가 제네시스 전체 판매의 10%를 차지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네시스 판매 내 마그마 비중 목표로, 현대차그룹 전체 판매에서 제네시스가 차지하는 비중을 끌어올리는 것은 별도 과제로 남는다. 관세 리스크 속에서도 그룹 전체 판매 곡선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지금, 레이싱과 고성능 마케팅이 이 4.5%를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지가 다음 단계 관전 포인트다.
[돋보기] 명품 브랜드에서 배운 VIP 마케팅…역대 최대 규모 마그마 라운지
라운지 전체는 마그마 오렌지 컬러로 꾸며졌다. 입구에서부터 시원한 생수, 선크림, 귀마개를 손님에게 건넸다. 텍사스의 뙤약볕과 소음을 고려한 배려로 ‘고객을 집에 온 손님처럼 극진히 대접한다’는 제네시스의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라운지 안쪽에는 상시 운영되는 바가 있어 시원한 음료를 계속 주문할 수 있었고 점심·저녁으로는 브리스켓, 각종 샐러드, 미니 햄버거가, 중간중간에는 핫도그와 디저트 케이크, 맥주가 끊이지 않고 서빙됐다.
한쪽에는 앉아서 가상으로 레이싱을 체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터가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색상과 스트링·깃털 장식을 직접 골라 나만의 텍사스 모자를 만들어주는 서비스도 운영됐다. 발코니에 서면 레이스를 직관할 수 있고, 바로 아래로는 마그마 레이싱카가 피트스톱(정비)하는 모습까지 내려다볼 수 있었다. 실내에는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경기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했다. 라운지 손님들에게는 경주 전 하이퍼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피트워크’와 레이싱팀이 상주하는 차고 투어도 제공됐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4족보행 로봇개가 깜짝 등장해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제네시스 측은 이번 VIP 라운지를 기획하며 롤렉스 등 명품 브랜드가 WEC를 후원하는 방식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롤렉스가 매장을 여러 개 운영하는 대형 딜러와 그 VIP 고객들을 레이스 현장에 초청해 극진하게 대접하듯 제네시스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해 브랜드에 대한 오너십을 심어주겠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이날 대형 딜러 키팅(Keating)의 관계자들이 제네시스 라운지로 건너와 식사를 하고 갈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허란 UT 오스틴 방문연구원(한국경제 기자)
※본 기고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해외연수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미국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방문학자 연구 과정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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