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에 추적기 달았더니 아마존 시설로
매출 두 배 뛴 헌책방도 등장
아마존·앤트로픽, 실물책 스캔해 AI 학습
지난 7월 미국의 한 중고 책 판매상에게 수상한 주문이 들어왔다. 온라인 중고 책 플랫폼 ‘비블리오(Biblio)’를 통해 한꺼번에 들어온 주문은 약 1000권. 책의 분야나 저자도 제각각이었다. 익명으로 책을 사고 파는 플랫폼 특성 상 판매상은 구매자를 알 수 없었다.
미국 정보기술 매체 404미디어는 판매상과 함께 주문받은 책 한 권에 애플의 위치추적기 ‘에어태그’를 몰래 넣었다. 미국 곳곳의 물류 거점을 거쳐 책이 도착한 곳은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아마존 물류시설이었다. 그곳에는 ‘VGT3’라는 별도 작업장이 있었다. 404미디어 보도에 따르면 이 시설에서는 책등을 잘라 낱장으로 만든 뒤 빠른 속도로 스캔하는 일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22일 “희귀·중고 책 판매가 급증하고 있지만, 이 책들이 잘려 AI에 먹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세계 각지 중고 책 판매업자들은 올해 들어 이전과 다른 주문 패턴을 발견했다. ‘레드 스패로 프로젝트(Red Sparrow Project)’, ‘블루 핀치 프로젝트(Blue Finch Project)’, ‘그린 패럿 프로젝트(Green Parrot Project)’처럼 정체를 알기 어려운 이름의 구매자가 등장해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책을 수십~수백 권씩 사 갔다. 가격을 깎는 경우도 드물었다. 브루클린의 한 희귀 책 판매업자는 평소 거의 팔리지 않던 책까지 주문이 몰리면서 올해 매출이 작년 같은 기간의 약 두 배로 뛰었다고 WSJ에 말했다.
큰손의 등장에 기쁨도 잠시, 판매상들 사이에서는 곧 “AI 회사가 책을 사들이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퍼졌다. 책의 목적지가 물류창고와 스캔 시설로 이어지고, 일부 판매상이 화물 안에 위치추적기를 넣어 이동 경로까지 확인하면서 이런 의심은 점차 사실로 드러났다. WSJ는 이 과정에서 책의 제본 부분을 절단하는 장비를 두고 업계 관계자들이 ‘단두대(guillotine)’라는 표현까지 쓴다고 전했다.
AI 기업들이 굳이 인터넷에 없는 오래된 종이책까지 찾아다니는 이유는 데이터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다. 404미디어에 따르면 AI 기업을 상대로 대량 도서 구매 서비스를 홍보했던 서적 데이터 업체 ISBNdb는 종이책을 “웹 크롤링으로는 복제할 수 없는, 편집되고 구조화된 인간의 지식”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생성형 AI가 본격 확산하기 전인 2022년 이전 출판된 책은 AI가 만들어낸 글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작다는 점도 장점으로 내세웠다.
한때 디지털 시대에 밀려나던 종이책이 AI 시대 들어 다시 ‘원천 데이터’로 몸값이 올라간 것이다. 미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한 고서점에는 책 3000권을 한꺼번에 보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주문자는 중국의 AI 기업으로 밝혀졌다.
책을 사서 AI 학습에 사용하는 방식 자체를 둘러싼 법적 판단도 AI 기업의 실물 책 확보에 영향을 주고 있다. 앤트로픽은 2024년 챗봇 클로드 학습을 위해 '프로젝트 파나마'라는 이름으로 실물 책 수백만 권을 사들인 뒤 제본을 뜯어 디지털화하고 원본은 폐기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미 연방법원은 지난해 AI 기업 앤트로픽이 정식 구매한 종이책을 디지털화해 AI 모델 ‘클로드’를 훈련하는 것은 미국 저작권법상 ‘공정 이용(fair use)’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논란은 저작권을 넘어 책의 보존 문제로 번지고 있다. 미 워싱턴DC 일대에서 중고·희귀 책 서점 ‘세컨드 스토리 북스’를 운영하는 앨런 스타이펙은 WSJ에 최근 상황을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라고 했다. AI 학습용으로 추정되는 대량 주문 덕분에 판매량은 급증했지만, “이 책들은 아마 내 사업의 장기적인 존속과 완전히 상반되는 목적에 쓰일 것”이라고 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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