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판타지와 현실을 다룬 K-직장인 콘텐츠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직장인을 소재로 한 오피스물은 과거부터 꾸준히 나왔다. 하지만 사뭇 다르다. 과거엔 조직의 성과, 조직원들의 화합을 다루거나 아예 반대로 노동문제나 노사갈등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았다. 최근엔 조직보다 직장인 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개인이 조직 안에서 느끼는 감정과 고충 자체에 집중하고 이를 해소해 나가는 판타지 같은 순간을 그려낸다. 매일 출근과 퇴사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하루를 버텨낸 직장인들을 위해.
남아서 자유롭기 vs 떠나서 자유롭기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는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티빙의 오리지널 콘텐츠인 이 작품은 tvN 채널에서도 방영되고 있다. 작품 속 은태는 한국 사회의 수많은 직장인을 표상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그는 근면성실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매일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길 반복한다. 그렇게 성실히 일해 은태는 팀장이 됐다. 하지만 위아래로 무시를 당하거나 일을 떠맡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도 절대 화를 내지 않고 인내하며 묵묵히 버티기만 한다. 회사 안에서 계속 화를 참던 그는 심지어 세탁소 주인이 자신의 셔츠를 잃어버리고 아무 보상도 없이 사라져도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 같은 설정은 조직 안에서 개인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것은 물론 나아가 세상 속에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은태는 로또 1등에 당첨된다. 세후 13억원을 수령하게 된 그는 회사를 그만두는 상상, 흥청망청 돈을 쓰는 상상도 해보지만 결국 그는 출근을 선택한다. 그러나 달라진다. 무조건 참지만 않고 화를 내기도 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간다.
직장인의 또 다른 판타지에 해당하는 ‘퇴사’를 정면으로 다룬 노래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룹 ‘아이들’의 멤버 소연의 노래 ‘퇴사할게여’다. 이 노래는 멜론을 포함한 각종 음원 플랫폼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소셜미디어(SNS)에서도 노래와 안무 영상 등으로 많은 화제가 됐다.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는 퇴사할 수 있는 자유에도 출근을 선택한 인물의 이야기라면 ‘퇴사할게여’는 출근의 무게를 박차고 나와 퇴사를 선언하는 순간의 해방감을 담았다. “쿨하게 짐을 싸고 뒤돌아보지 않고 / 모두 안녕히 계세요.”
이처럼 두 작품은 ‘출근’과 ‘퇴사’라는 양 극단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실은 모두 ‘자유’에 대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과 조직에 얽매인 일상에서 자유를 느껴보고 싶은 직장인의 심리를 반영한다. 다만 남아서 자유로울지, 떠나서 자유로울지를 그린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즉 출근과 퇴사라는 각각의 키워드는 결국 자유를 꿈꾸는 하나의 동일한 욕망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조직이라는 잘 짜인 시스템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자유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으니까.
해당 드라마와 노래를 통해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대리만족’ 그 이상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매일 출근을 하지만 가슴 한편엔 사표를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선뜻 사표를 던질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인내하며 회사 생활을 이어간다. 그 인내는 은태처럼 극단적으로 절대 화를 내지 않는 캐릭터로 그려졌다. 그러다 은태가 로또 당첨을 계기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설정은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무조건 참거나 체념만 하던 직장 생활에서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출발점이 어쩌면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잘 읽고 전하는 것일 수 있다는 메시지도 읽을 수 있다.
‘퇴사할게여’는 이보다 한발 나아가 퇴사라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을 때의 순간을 그린다. 하지만 퇴사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노래는 아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현실에 갇혀 잊고 있었던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도록 돕는다. 긴장감으로 가득하던 마음을 다소 느슨하게 만들어 오히려 가벼운 걸음으로 직장으로 향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아침에 출근할 땐 ‘퇴사할게여’를 들으며 위로받고 퇴근 후엔 집에서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를 보며 내일의 출근을 기약하는 식이다.
조직보다 개인에 집중하는 오피스물
한국 시장에서 직장인 콘텐츠는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에 해당한다. 과거 ‘신 손자병법’부터 ‘미생’, ‘송곳’,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까지 다양한 작품이 직장인을 그려왔다. 하지만 대체로 개인보다는 조직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조직 안에서의 갈등과 권력 다툼-봉합과 해소-화합과 성장의 스토리로 이어졌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은 여기서 벗어나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하긴 하지만 조직을 벗어난 그 이후의 삶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최근에 나온 직장인 콘텐츠는 조직을 다루더라도 개인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쿠팡플레이의 시트콤 ‘직장인들’은 직장인의 조직 생활을 현실감 있게 그릴 뿐 아니라 각자의 속마음을 짧게 말하는 설정으로 직장인의 소소한 불만과 어려움을 유쾌하게 담아낸다. 대표부터 부장, 대리, 인턴까지 다양한 직급에서 느끼는 감정과 고충도 그린다. ‘직장인들’은 시즌1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지난 8월부터 시즌3가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도 여러 형태의 직장인을 그리고 있다. 지난달 종영한 ‘최애의 사원’의 주인공 다름(김혜준 분)이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속한 스타트업에 취업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 7월 종영한 ‘내일도 출근!’은 같은 회사에서 만났지만 퇴사 후 새로운 터전을 찾아 원하는 일을 시작하는 시우(서인국 분)와 계속 남아 회사 내에서 성장하며 승진까지 하는 지윤(박지현 분)의 모습을 그렸다. 조직의 안팎에서 개인이 추구하는 방향도 선택도 갈수록 세분화되고 있는 만큼 오피스물 역시 더욱 다양해질 전망이다.
‘퇴사할게여’에선 퇴사의 순간을 ‘로맨틱(romantic)’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퇴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가려는 도전 자체가 낭만적이니 말이다. 그러나 비단 퇴사만이 아니다. 직장 안에서 자신만의 생각과 목소리를 되찾아 가는 것 또한 충분히 낭만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출근과 퇴사 사이 K-직장인 콘텐츠가 계속 나올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든 언젠가 이 노래의 가사처럼 말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나는 낭만적인 할머니가 되어서 / 뒤돌아보곤 오늘 하루를 / It was a romantic day / Romantic.”
김희경 계명대 언론영상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kmu.ac.kr
© 한경매거진&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