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브이로그] 4차 산업혁명 시대, 디자인의 가치

[한경잡앤조이=박재현 부산디자인진흥원 지원본부장] 20세기 초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작업 표준화와 분업으로 대량생산체제에 진입했던 시대에는 기술자가 기업의 핵심이었고, 새로운 분자구조의 합성수지나 신소재 금속, 고밀도의 집적회로 등이 혁신으로 주목받을 때 그 중심에는 과학자가 있었지만, 1980년대 소니(SONY)가 워크맨을 만들어내던 때부터 혁신은 ‘디자인’이 그 시작과 끝을 담당했다.

거대 글로벌 기업 중 하나인 나이키(NIKE)는 미국 내 본사에서 기획과 마케팅, 디자인 업무만을 수행하고 단 한 켤레의 신발도 미국 내에서 직접 생산하지 않지만 여전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충분히 공급할 만한 신발과 운동복, 가방과 모자를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생산해내고 있다. 끊임없는 기획과 새로운 디자인을 통한 마케팅을 하고, 스포츠 정신이라는 환상을 판매하면서 엄청난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벅스(Starbucks)와 맥도널드(McDonald)가 판매하는 것도 커피와 햄버거로 국한하기 보다는 미국의 문화, 즉 ‘아메리칸 스타일’을 파는 것이며, 디즈니랜드(Disneyland)와 픽사(Pixar)가 판매하는 것은 애니메이션 영화를 넘어 전 세계 어린이를 대상으로 ‘꿈과 희망’을 파는 것이다. 이처럼 그간의 디자인은 산업의 변화에 따른 사회의 변화와 함께 무형의 가치를 구체적인 상품으로 만들어내면서 기업경영의 주요 자원으로 그 대상과 접근 방법, 영역을 넓혀가며 진화하고 발전해왔다.
나이키, 애플을 성공으로 이끈 디자인 경영이 지금 필요한 이유 [박재현의 디자인 창업 전략]
디자인 경영의 신화적 존재로 불리었던 애플 사(社)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가 이룬 혁신도 다름 아닌 디자인이었다. 이미 세상에 충분히 존재하는 여러 제품의 기능들을 자신의 통찰력을 기반으로 하여 창의적인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냈던 것이고, 소니(SONY)가 그랬던 것처럼 소비자의 눈높이에서 소비자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히 짚어내는 비즈니스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며,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처럼 단일제품을 대량생산하는 방식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었던 것이다.
△애플 사(社)의 슬로건과 제품디자인.
△애플 사(社)의 슬로건과 제품디자인.
기술 우월주의와 폐쇄적인 기업 운영에 따른 시장의 외면으로 1985년에 퇴출되었다가 1997년에 애플 사(社)로 다시 복귀한 스티브 잡스는 당시 만성적자 상태에 시달리는 회사에 ‘Think different’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디자인 우선주의 경영’과 ‘파괴적 디자인’을 강조하였다. 과거의 제품개발 방식과는 정반대로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디자인을 먼저 하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개발한 아이맥(iMac), 아이팟(iPod), 아이폰(iPhone), 에어팟(Air Pods)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프리미엄 브랜드를 구축하였고, 한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아이콘 같은 디자인, 즉 아이코닉 디자인(iconic design)의 위상을 굳혔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이루어낸 애플의 디자인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강화유리와 알루미늄이란 제품 소재의 조합은 모더니즘 디자인을 교육받은 디자인 전공자들에겐 이미 익숙한 재료이며, 원형과 사각형이라는 기본 도형으로 디자인을 정리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어 단순화 하는 방식은 20세기 초 독일의 바우하우스 개교 이래 모든 디자이너의 기본과 같았다.

애플 사(社)의 최고디자인책임자(CDO)였던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 1967~ )가 애플 디자인의 많은 부분이 디터 람스(Dieter Rams, 1932~ )가 브라운 사(社)의 제품으로 이미 선보인 디자인을 참조한 것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모방을 통해 새로운 발전적 제품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나이키, 애플을 성공으로 이끈 디자인 경영이 지금 필요한 이유 [박재현의 디자인 창업 전략]
△디터 람스 vs 조너선 아이브.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 사(社)의 제품디자인.
△디터 람스 vs 조너선 아이브.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 사(社)의 제품디자인.
지금은 인류의 삶이 다시 한 번 크게 바뀔 4차 산업혁명(Fourth Industrial Revolution) 시대이다. 급격하고 거대한 변화가 사회, 경제, 환경, 기술 등 다방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디지털 기술(Digitech)을 활용한 제품개발기술은 물론,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세계적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정보 유통의 질서를 확보한 디지털 변환(Digital Transformation) 또한, 로봇과 인공지능(A.I.)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에 의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1~4차 산업혁명(사진출처=게티이미지 코리아)
△1~4차 산업혁명(사진출처=게티이미지 코리아)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은 2016년 10월에 스위스에서 개최한 세계경제 포럼(Davos Forum)에서 포럼의 의장이자 독일 태생의 스위스 경제학자인 클라우스 슈바프(Klaus Schwab, 1938~ ) 교수가 "이전의 1, 2, 3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적 환경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은 것처럼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 질서를 새롭게 만드는 동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세계적인 이슈화가 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증기기관과 기계화로 대표되는 1차 산업혁명과 전기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본격화된 2차 산업혁명, 인터넷이 이끈 컴퓨터 정보화 및 자동화 생산시스템이 주도한 3차 산업혁명에 이어 로봇이나 인공지능(AI)을 통해 실제와 가상이 통합되고, 사물을 지능적으로 자동 제어할 수 있는 가상 물리 시스템의 구축과 같은 기술의 융합과 초연결 사회로의 급속한 진전으로 글로벌 경제 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속도’ 와 ‘융합’ 이다. 단순한 기술의 진화뿐 아니라, 오프라인 기술들이 ‘현실’ 과 ‘가상’ 을 오가며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의 새롭고 다양한 융합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있고, 그 확산과 유통의 속도 또한 초를 다투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인간의 두뇌작용과 같이 컴퓨터 스스로 추론 · 학습 · 판단하면서 작업하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생활 속 사물을 유 · 무선 네트워크로 연결해 정보를 공유하는 환경인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컴퓨터로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에서 사람이 실제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운전자 없이 주행하는 무인 자동차(driverless car), 조종사 없이 무선전파의 유도에 의해서 비행 및 조종이 가능한 드론(Drone) 등 그동안의 거시적 미래 전망들은 앞 다투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와 거대한 새로운 산업이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서 불현 듯 등장하며 드라마틱한 흥망성쇠를 거듭 연출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술과 IT기술이 만나면 디지털 콘텐츠가 되는 것이고, 패션에 역사와 문화 그리고 스토리가 더해지면 럭셔리 브랜드가 된다. 탄소와 실이 만나면 탄소섬유가 되고, 실물과 가상이 융합하면 가상현실이 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연결되는 것을 우리는 O2O라고 하고, 센서와 옷이 융합하면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되는 것처럼 융합이 아닌 것을 찾기가 오히려 어렵게 되었다. 음성(음악), 화폐, 이미지(그림, 사진, 글씨 등), 지도, 의류, 심지어 냄새와 맛에 이르기까지 그동안의 수많은 아날로그들은 디지털로 바뀌고 있고, 인류 생활의 대부분은 디지털 네트워크 플랫폼을 기반으로 수행되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배제되면 하루도 버티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해당사자들의 상호작용까지 더해지고 급속히 팽창하여 마침내는 ‘디지털 생태계’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산업 전반에서 드러나고 있는 혁명적 변화들은 인류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고, 혁신을 가져올 것이며, 디자인 부문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은 이전의 산업혁명과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1, 2, 3차 산업혁명은 디자인의 질적, 양적 구조를 팽창시켰고, 디자인의 역할과 필요성을 분명히 해주었지만, 4차 산업혁명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일자리가 사라지는 현상을 ‘풍요의 역설’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디자인이 아닌 것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정작은 디자인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디자인의 새로운 역할과 가치를 만들어 가는 충실한 준비와 현명한 대처만이 4차 산업혁명의 파고에서 디자인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디자인의 진화 방향은 더 이상 새로운 서비스나 사용자의 경험, 개인 제조기술인 3D프린팅 등으로 그 종류를 세분화, 고도화,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디자인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절실하다. 새로운 것을 그려내는 역할을 넘어 그것을 기획, 관리하는 등의 다변화로서 디자인의 역할을 인식할 때, 산업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모두가 공감하는 방향으로 세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게 될 것이다.
갈수록 지능화하는 시스템에 융화되고, 협업 속에서 가치를 만들어낼 때 미래 산업에서 디자인의 가치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디자인의 진정한 가치는 디자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무언가에 가치를 부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박재현 부산디자인진흥원 지원본부장.
△박재현 부산디자인진흥원 지원본부장.
박재현 씨는 디자인학 박사이자 부산디자인진흥원 지원본부장으로 2014년부터 디지털 기반의 다양한 국책 프로젝트를 기획·운영해왔다. 특히 스마트 스타트업의 육성과 지원을 위한 약 300억원의 정부예산을 확보, 디자인 주도 스타트업 양성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