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성수미술관의 제주도 출장기
[한경잡앤조이=이재욱 성수미술관 대표] 지난 여름, 거센 태풍이 왔던 날 우리는 제주도로 향했다. 십 수년만의 강력한 태풍으로 비행기들이 줄줄이 결항 될 때, 행운인지 불행인지 우리의 밤비행기는 제주로 향했다.성수미술관 제주점 오픈 준비로 인해 여러 번 들린 나름 단골이 된 익숙한 횟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서울에도 없는 단골 횟집이 제주도에 있다니. 식사를 마치고 80년대 조폭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외관의 오래된 호텔로 간다. 1박에 3만원. 이제는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는 게 여전히 재미있다. 1층 로비엔 실내연못과 잉어들이 살고 있는 오래된 호텔. 단체 관광객이 주 고객이었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인기가 없어진 호텔. 그럼에도 우리는 80년대 조폭 영화에 나올 것 같다고 키득거리면서 제주에 올 때면 늘 이 호텔을 찾는다. 호텔방에선 인물 맞추기 카드게임을 한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업가로 바뀌어도 일상에선 바뀐 게 없나 보다.
둘째 날, 출장의 이유였던 유명 도넛 브랜드와의 미팅이 있는 날이다. 애월읍 부근에 위치한 그들의 플레이스에서 미팅을 진행했다. 도넛모양의 그림을 그리고, 우리의 장소에선 파레트 모양의 도넛을 제공하는 내용의 콜라보레이션을 논의했다. 고객들은 그림과 도넛, 전혀 연관이 없던 두 콘텐츠에서 신선함을 느낀다. 그 신선함은 곧 행동을 이끌어내고, 인스타그래머블한 두 콘텐츠는 sns에 무섭게 업로드 됐다. 바이럴에 최적화 된 두 브랜드는 이렇게 매년, 매월, 매일 매순간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그렇게 그들이 성장해 왔고, 우리 역시 성장 중이다. 미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잠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성공적인 미팅을 기념하기 위해 둘째날의 숙소는 법카로 플렉스를 했다. 이런 쪽으로 센스가 좋은 직원이 에어비엔비를 예약했다. 1박에 30만원. 첫째날의 숙소(3만원)와 비교체험 극과 극이다. 첫째 날부터 이어진 역대급 태풍의 여파로 모든 실외활동이 금지됐다. 하지만 정신나간 어른들은 이 와중에 수영복을 챙겨서 숙소 앞 바닷가로 나갔다. 이렇게 강력한 태풍을 온몸으로 맞아보는 건 살면서 몇 없는 진기한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한 발자국 내딛을 수도, 눈을 뜰 수 조차도 없는 강력한 태풍의 위력에 어른들의 철없는 놀이는 바로 막을 내렸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고 고기를 굽는 도중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정전이었다. 근데 심상치 않다. 제주도 전체 정전이었다. 전봇대가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태풍이었고, 실제로 전봇대가 쓰러졌다. 통신국 전력까지 나갔는지 휴대폰도 먹통이 됐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보드게임 담당 직원이 준비해온 카드게임 '뱅'을 꺼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나무로 지어진 숙소에서 촛불을 켜 두고 밤새 카드게임을 했다. 평균 연령 28세. 월드 보드게임 어워즈 1위에 빛나는 '뱅'은 실로 대단했다. 많은 이들이 총에 맞아 죽으면서 수 시간이 흘렀다. 게임 설명서에도 없던 룰이 만들어 질 때쯤, 하나 둘 정전과 더위, 총성에 지쳐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격렬하지만 허무했던 둘째 날 밤이 그렇게 저물어 갔다.
아침 6시, 정전이 복구됐다. 몇 십년만에 느껴본 전기의 소중함이었다. 역대급 태풍과 함께 했던 하룻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성산 부근에 위치한 유명한 중국집에서 볶음짬뽕으로 식사를 하고, 세화리에 있는 숙소로 갔다. 일명 악마의 집이라 불리우는 곳. 왜 악마의 집이었느냐. 제주도지점을 오픈 할 때, 제주 점장이 지낼 숙소를 구했는데, 매장 근처 하도리에는 신축원룸이 없어, 세화리에 마당이 있는 40평짜리 3룸 구옥을 숙소로 잡았다. 제주점장이 혼자 지내기엔 다소 많이 넓지만 괜찮았다. 문제는 겨울이었는데, 부분난방이 안되는 오래된 기름보일러 구조라 20만원어치 등유를 넣으면 일주일을 채 못썼다. 그래서 보일러를 안 켜고 전기난로와 전기장판으로만 주로 지냈다고 한다. (현실판 머니게임) 그 극한의 상황에서 몇 번 같이 잠을 잔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그곳은 '악마의 집' 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악마의 집에서 약간의 재정비를 끝낸 우리는 바로 앞 세화 해변으로 향했다. 적당한 입구가 없어 마치 프라이빗 비치와도 같았던 그 해변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놀았다. 모래놀이도하고, 공놀이도 하고. 전공도 제각각이었던 우리들은 그날 10살 유년시절로 돌아갔다. 국립발레단 수석발레리나, 대기업 MD, 유명레크레이션강사, 서태지밴드 드러머, KBS 교향악단, 강남일타 보컬트레이너.. 전공도 출신도 각기 달랐던 그들은 그날, 그 해변에서 뭐가 그렇게 즐거웠을까.
그 날 누군가의 물음처럼, 앞으로 이렇게 살 면 안되는 걸까? 태풍에 해수욕을 하고, 밤새 카드게임을 하고, 작은 모래사장에서 어린아이처럼 놀면서 살면 안될까? 반드시 원대한 꿈과, 대단한 목표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건 누구의 꿈이고, 누구의 목표인 걸까. 추억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내게, 그보다 더 큰 원동력은 없다. 늘 새로운 경험과 도전, 그리고 소중한 추억으로 나는 오늘 하루를 또 살아간다. 지난 여름, 거센 태풍이 왔던 제주도의 추억이 내일의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처럼 말이다.
올 여름, 제주도에서는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다만 태풍은 없었으면 한다.
이재욱 씨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여행 유튜버부터 미술카페 프렌차이즈 ‘성수미술관’의 대표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는 청년 사업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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