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브이로그] 스타트업에 잘 맞는 사람은 따로 있다?
[한경잡앤조이=박소현 블랭크코퍼레이션 PRO] 학창시절 나를 관통했던 콤플렉스 하나는 내가 너무 ‘호구’같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과 ‘정의감’이 있는 사람인데다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은 기꺼이 발벗고 나서는 반면 신세지는 것은 극도로 싫어해 정작 필요할 때 내가 부탁하는 건 꺼리곤 했다.수업을 늘 빼먹고 놀러 다니던 얌체 같은 친구가 시험직전 노트 필기를 빌려 달라고 할 때도 흔쾌했고,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팀플에 한번을 참가하지 않던 몇몇 팀원이 막판에 등판해 딱 ‘자기 몫’의 역할만 해도 ‘그래, 뭐 내가 저들보다 훨씬 배운 것이 많겠지’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양해를 구할 일이 생길 때 칼같이 거절하거나, 도움이나 아량에 대해 전혀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여러 사람들을 겪으며 상처를 받은 적도 많았다.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협업이나 어떤 의사결정에 있어 내가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나 계산기를 두드려 내게 득이 되기 위한 결정은 사실 거의 없었다. 오히려 나의 성과와는 전혀 무관한 협업 요청에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돕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어떤 판단 전에 ‘잘할 것 같다’거나 ‘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이미 온갖 업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막상 그 일을 하며 역시나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거나 내 일에 다른 일까지 더해져 나만 일에 파묻힌 느낌이 들 때 솔직히 후회한 적도 있지만 동료애와 회사에 대한 애정은 내가 회사생활을 버티는 원동력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이제 미래의 주역은 ‘MZ 세대’라고 한다. 그들을 분석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기업도 미디어도 혈안이 되어 있다. 합리적이고, 개인의 이익과 정의로움을 추구하며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나 역시도 출생년도 기준으로는 MZ세대에 해당되지만) 위에서 언급한 오지라퍼이자 집에까지 일에 대한 생각을 싸 들고 오는 나는 꼰대거나 어리석은 흑우(호구를 지칭하는 말)다.
때문에 경력단절을 겪고 처음 스타트업으로 재취업하며 가장 걱정했던 것은 바로 스타트업의 문화, MZ세대와의 온도차였다. ‘집에서 애 키우다 온 감 떨어지는 아줌마정도로 치부하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감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예전처럼 회사와 동료에 몰입해 내 에너지를 올인하지 않겠다는, 일과 내 삶을 분리해 가정을 챙기겠다는 MZ스러운 비장한 결심을 한 채 나는 스타트업 업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기우였음을, 나의 결심은 절대 지켜지지 않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스타트업은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 체계적으로 일하지 않는다. 내가 입사했던 당시의 회사는 커뮤니케이션 조직을 처음 세팅하기 때문에 사실상 한명인 담당자가 조직과 업무 R&R, 일의 프로세스 등을 다 만들어 나가야 했다.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홍보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당연히 가만히 앉아서 주어진 일을 기다리거나 내 일만 잘하겠다는 마인드로는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 업무는 네트워킹과 동료들과의 라포형성이 매우 중요한 업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지원 부서가 그러하듯 내부 커뮤니케이션은 직원들과의 소통이 없다면 존재자체의 의미가 희박해지는 업무이며 외부적으로도 사업부에서 데이터를 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나의 호구스러움과 오지라퍼 성향은 역설적이게도 내게 날개가 되어 주었다. 사실 모든 MZ세대들이 다 개인주의 성향과 완벽한 워라밸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커리어에 대한 욕심, 내 일, 남의 일을 떠나 지금의 우리 조직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성취를 가진 MZ동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육아를 통해 생긴 내공과 단단함은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사회생활이나 업무에 도움이 되곤 했다. 모든 의식주를 부모에게 의지하는 한 존재를 키워본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성실함과 인내력이 그 이전과 대비해 엄청나게 강해진다. 24시간 CCTV를 달고 사는 것처럼 내가 아이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가치를 스스로 실천하며 보여줘야 하기에 그 책임감이 더욱 무겁다.
또, 이전에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이상해 보였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대화를 하게 되는 일들이 많았다. 아이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처음 보는 낯선 아이 와도 놀이를 함께 하게 되거나, 잠시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남의 아이지만 위험에 처하게 되면 반사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되기 때문이다.
먼저 다가가고, 내 일과 타인의 일을 구분 짓지 않고 ‘우리 조직이 해결해야 하는 일’의 범주에서 생각하며, 나에게 당장 득이 되지 않더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에 기꺼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선의’는 빠른 시간 안에 회사 내 좋은 레퍼런스를 만들었다.
게다가 대기업과는 다른 조직 체계와 한 두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되는 네트워킹이 특징인 스타트업이라는 생태계에서 내부와 외부의 레퍼런스는 더 좋은 결과값을 만들고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훌륭한 동지들을 하나 둘 씩 모이게끔 했다.
이런 일련의 경험은 내가 계속해서 스타트업이라는 업계에 애정을 가지고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더 이상 나는 이전에 콤플렉스라 생각했던 단점을 콤플렉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가진 큰 무기이자 장점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한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스타트업에서 고군분투하며 내가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법 또한 배우게 됐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배우고자 하며 절실한 사람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도움을 받은 그 마음을 진심으로 기억하고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좋은 관계로 이끈다는 것을 이 업계에서 배우게 됐기 때문이다.
‘선의의 오지라퍼’는 결국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보험 같은 것이다. 일도 인생도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좋은 선순환이 결국 돌고 돌아 나의 아이에게도 닿을 것이라고 믿기에 말이다.
박소현 씨는 올해 7살 아이의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워킹맘이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기자, 아나운서를 거쳐 현재 브랜드 빌딩 비즈니스 스타트업 블랭크코퍼레이션 커뮤니케이션 담당 프로로 제 2의 인생을 설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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