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정순인 LG전자 책임연구원 | 사진 각 사 제공] 캐나다 밴쿠버의 나무들은 쉽게 쑥쑥 자라고 수령 100년을 넘긴 것들도 흔하다. 토양도 좋고 물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 태풍이 왔을 때 쉽게 쓰러져 버렸다. 왜일까. 뿌리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경이 좋다 보니 뿌리가 깊을 필요가 없었다. 좋은 환경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자동차 시장이 급변하고 있다. 몇 십 년간 풍족한 먹거리가 돼 준 시장에만 계속 머무를 것인가.
어떤 브랜드가 하나의 수단으로 기억되느냐 혹은 고유한 가치로 기억되느냐는 킬러 콘텐츠가 결정한다. 브랜드가 제공하는 킬러 콘텐츠에 열광하는 사용자가 많을수록 그 브랜드는 가치를 가진다.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 자체가 킬러 콘텐츠 아니냐고? 아니다. 왜냐하면 자동차 회사는 이제 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이기 때문이다. 공유자동차, 자율주행자동차 시대에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동차 회사는 자동차 말고 다른 킬러 콘텐츠가 필요하다.
자동차 시장의 킬러 콘텐츠
예전 서점은 책을 파는 단순한 업태였다. 하지만 요즘 서점은 책 구매, 휴식, 지적 활동 관련 상품과 서비스까지 제공해야 한다. 상품은 책, 펜, 노트, 책을 읽으면서 마실 음료다. 서비스로는 토론회, 낭독회, 저자 만남 이벤트, 독후감 이벤트, 글쓰기 특강, 독서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서점은 책이라는 ‘제품’만 구매하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동안 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느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 된다.
자동차 회사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자동차만 파는 회사는 자동차 회사가 아니다. 현대자동차, 도요타, 다임러를 비롯한 많은 완성차 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은 “우리 회사가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업’”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서비스업에서는 어떤 킬러 콘텐츠를 어떤 방식으로 선보여야 할까.
지금부터 글로벌 프리미엄 자동차 메이커들의 킬러 콘텐츠를 알아보겠다. 이 키워드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서비스업으로서 자동차’가 살아남기 위한 핵심이다.
테슬라의 킬러 콘텐츠
전통적인 대기업은 계획, 실행, 검증, 개선의 순서대로 일을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철저히 순서를 지킨다. 테슬라는 이 방식을 깼다. 먼저 실행부터 했다. 실제 시장에서 최대한 많은 실험에 바로 뛰어들었다. 도출된 개선점을 빠르게 수정한 뒤 또다시 실험했다. 이 루틴을 초고속으로 반복했다. 이제는 많은 정보기술(IT) 스타트업들이 일하고 있는 방식이다.
테슬라는 모델S에 자율주행용 센서를 기본으로 장착해서 출시했다. 충분한 도로 테스트를 거치지도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테슬라는 실제 도로 데이터, 운전 데이터를 발 빠르게 확보한 뒤 이를 바탕으로 자율주행 기술을 업그레이드하고자 한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센서여도 상관없다. 아직 문제 있는 기능인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테슬라는 이 차를 바로 실제 도로에 내놓았다. 그 어떤 빅데이터도 실제 도로 주행 데이터만큼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테슬라는 이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싶어 한다. 운전자를 일종의 베타테스터로 활용한 셈이기도 하다. 테슬라의 신속한 현장 데이터 중시 업무 스타일은 테슬라의 팬을 모으는 궁극적인 힘이다.
특히 테슬라 하면 자동차 소프트웨어 무선 업데이트도 유명하다. 일부러 고객들이 오프라인 서비스 센터에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테슬라의 전장부품들은 원격으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받는다. 고장 났을 때도, 업데이트가 필요한 때도 이 전략은 고객을 편리하게 해 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테슬라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젊고 스마트하고 스피디하다’고 만들어 준다.
테슬라 CEO인 일론 머스크는 2020년 8월 4일, 파워트레인과 배터리를 타 자동차 메이커에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테슬라는 전에도 메르세데스와 도요타에 배터리를 판매한 바 있다. 테슬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프리몬트공장에 자체 배터리 제조시설을 계획하고 있다. 전기자동차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이 ‘배터리’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지금은 LG화학 등을 통해 배터리를 공급받고 있지만, 곧 테슬라는 이 핵심 부품까지 스스로 개발할 모양새다. 자체 개발한 배터리를 타 자동차 메이커에 판매하면 테슬라에는 어떤 이득이 있을까. 단순히 배터리 판매 이익만 있을까. 아니다. 그것 이외에도 두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첫째, 전기차 시장 자체를 타 회사 의존성 없이 꽉 잡겠다는 테슬라의 사업 구상이 보인다. 테슬라는 전기차 시장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둘 다 잡으려 한다. 자체 개발 능력을 키워서 외부 의존성을 없애려고 한다.
둘째, 테슬라는 궁극적으로는 ‘전기차 시장’이라는 파이 자체를 키우려 한다. 테슬라는 배터리를 쉽게 공급받지 못하거나 기술력이 약한 곳도 전기차 시장에 들어와서 같이 사업하게 해 준다. 그리하여 전기차 공급과 수요를 늘려 전체 시장 파이 붐업(boom up)을 목표로 한다.
구글의 킬러 콘텐츠
자율주행차 센서 기술은 자율주행의 핵심 기술이다. 전방의 사물을 인식하는 ‘눈’이기 때문이다. 특허 전문 조사지 IP노믹스 분석 자료에 따르면 구글 자율주행 특허 주요 108건 중 48건이 센서 기술이다. 구글이 가장 집중하는 분야란 뜻이다. 각종 센서로부터 모은 빅데이터는 구글 클라우드에 차곡차곡 쌓인다. 사용자가 어떻게 경로를 결정하고 어디로 자동차를 움직이는지 파악하는 것이 자율주행 기술의 핵심이다. 이때 저 빅데이터가 요긴하게 쓰인다. 이 빅데이터는 구글의 각종 디바이스에도 활용될 것이다. 구글의 각종 디바이스는 더욱 정확하게 소비자의 마음을 저격할 것이다. 구글은 이를 통해 사물인터넷(IoT) 생태계에서 계속 충성스런 팬 층을 유지할 수 있다.
우버의 킬러 콘텐츠
우버는 모빌리티 플랫폼 서비스를 계속 확장하고 있다. 우버 택시뿐 아니라 우버 프레시(식료품 배달 서비스), 우버 러시(근거리 택배 서비스), 우버 포 비즈(출장 특화 서비스), 피플스 우버(P2P 카풀 서비스), 우버 풀(카풀 서비스), 우버 무버스(이사 대행 서비스), 코너 스토어(생필품 배달 서비스)가 이미 운영 중이다. 우버는 확장할 사업 아이템을 정할 때도 영민한 전략을 택했다. 이미 확보한 빅데이터를 유용하게 재적용할 수 있고, 빅데이터를 새로 더 확보할 수도 있는 모빌리티 서비스를 선정해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롤스로이스의 킬러 콘텐츠
영국의 명차 롤스로이스는 올해 8월 25일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자신들은 더 이상 자동차 회사가 아닌 하우스 오브 럭셔리 브랜드라는 것이다. 자동차가 아닌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을 광범위하게 다루는 회사라고 스스로를 재정의했다.
우선 차 인테리어를 보자. 롤스로이스의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는 천장을 1400~1600개 광섬유 램프로 장식해 빛 밝기를 조절한다. 아름다운 별자리로 천장을 장식한다. 음악도 신경 쓴다. 프리미엄 오디오 기업과 협업해 서라운드 사운드를 사용해 차 안에 있을 때 감성지수를 높인다. 브랜드 콘셉트에 맞게 ‘차 안’을 강조하며 탑승자에게 안정적이고 고급스런 주행 경험을 선사한다.
롤스로이스는 럭셔리 큐레이션 서비스도 제공한다. 초대받은 롤스로이스 고객만 접속 가능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다. 럭셔리 제품에 대한 큐레이션, 특정 제품 독점 공개 소식, 숨은 여행지 추천, 세계 명사 세미나, 유명 콘서트, 전람회, 패션쇼 프리뷰 행사 정보를 제공한다. 롤스로이스 고객들에게 롤스로이스 소유자라는 취향을 공유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공유하고, 영감을 공유하는 사교의 장을 마련해 준다. 롤스로이스는 이런 킬러 콘텐츠로 팬덤을 공고히 한다.
벤츠의 킬러 콘텐츠
미래 차는 ‘움직이는 스위트룸’, ‘바퀴 달린 스마트폰’이라는 말을 언론이 자주 한다. ‘움직이는 스위트룸’이라는 콘셉트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차는 벤츠다. 벤츠는 차 인테리어에 공을 많이 들인다. 오래 머물 수 있는 실내의 안락함을 기본 목표로 한다. 벤츠 S클래스에 세계 최초로 탑재된 에너자이징 컴퍼트 컨트롤은 탑승자 컨디션에 따라 상쾌함, 따뜻함, 활력, 기쁨, 안락함이라는 콘셉트에 맞춰 공기 질, 온도, 열선, 통풍, 마사지, 시트, 조명, 오디오를 미세하게 조절한다. 이런 섬세한 환경 자체보다 소비자들을 더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나에게 딱 맞추어 준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특별한 재미다.
폭스바겐의 킬러 콘텐츠
폭스바겐은 사내에 IT 부서를 계속 확장하고 있다.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을 위해 자동차 메이커가 자체적인 IT 인력을 보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폭스바겐은 커넥티비티와 자율주행, 디지털 분야의 전문가가 모인 카 소프트웨어(Car.Software) 인원을 2025년까지 1만 명 이상 증원한다. 카 소프트웨어는 소프트웨어 개발, 전자기기 개발, 커넥티비티, 자율주행, 사용자경험(ux), 클라우드 아키텍처, 이커머스 등의 개발을 담당한다. 그렇다. 모두 IT 회사에서 하는 업무들이다. 폭스바겐은 이 업무들을 인하우스에서 해결할 것이다.
폭스바겐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탑재되는 자동차 운영체제(OS)도 자체 개발한다. vw.OS라고 부르는 자체 OS는 전기차 ID.3에 적용한다. 공유차 시대, 전기차 시대는 IT, 소프트웨어가 중요해진다. 폭스바겐은 새 시대에도 자동차 시장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소니의 킬러 콘텐츠
2020년 1월, 소니가 자율주행차, 전기차 전략을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발표했었다. 소니는 자동차 회사가 되고 싶은 것일까. 소니는 이 차를 팔아서 수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소니의 궁극적인 목적은 두 가지다.
소니는 전통적으로 카메라 센서 분야 글로벌 점유율 48.5%로 1위 기업이다. 자율주행 시대에는 자동차마다 카메라 센서가 탑재되는데 소니는 이 자동차 센서 시장을 노린다. 자동차 카메라 센서로 들어온 정보를 다른 자동차, 건물, 교통 시스템에 커뮤니케이션하는 시장 파이가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소니는 영화, 게임, 만화와 같은 콘텐츠 사업에서도 강자였다. 자율주행 시대에는 차 안에서 탑승자들이 운전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일을 한다. 전방 주시 의무가 없어진 운전자는 차 안에서 엔터테인먼트, 업무, 휴식 등 여러 가지 새로운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소니는 차 안에서 탑승자가 즐길 수 있는 콘텐츠 제공에 공을 들일 것이다. 소니만의 차별화된 콘텐츠 발굴을 위해서는 빅데이터 분석이 필수다. 차가 필요한 것, 탑승자가 필요한 것이 빅데이터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니는 그래서 자율주행차, 전기차 콘셉트카를 발표했다.
볼보의 킬러 콘텐츠
볼보가 전기차인 폴스타2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세계 최초로 구글 OS를 탑재했다. 구글 어시스턴트, 구글 맵, 구글 플레이 스토어, 자연어 음성인식 기능을 차에서도 즐길 수 있다. 구글 안드로이드 OS 스마트폰을 쓰는 사용자라면 편리하고 익숙하게 이 기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구글 안드로이드 OS는 절대 다수의 사용자를 가진 플랫폼이다. 편리한 차 내 경험이 화두인 자동차 시장에서 볼보는 소비자에게 최대한 익숙하고 빨리 사용 가능한 차 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제공하는 데 신경 쓰고 있다.
볼보는 온라인 신차 판매 서비스인 ‘스테이홈 스토어’를 유럽 시장에 도입한다. 유럽 일부 국가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일환으로 차 구매가 어렵게 된 점, 그리고 쇼핑은 모바일로 하는 것이 대세가 된 점이 주요 이유다. 여러 이유로 ‘언택트’ 방식이 중요한 지금, 이 서비스는 유럽 시장에 먼저 도입된 이후 다양한 국가로 확대된다. ‘어떻게 하면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경험을 차 안으로 다 가져오는가’가 미래 자동차의 중요한 화두다. 볼보는 이 답을 찾기 위해 차근차근 실험을 해 보고 있다.
소프트웨어적인 서비스이건 하드웨어적인 서비스이건 앞으로 자동차 메이커는 자동차뿐 아니라 자동차를 타면서 함께 누릴 수 있는 킬러 콘텐츠가 필요하다. “모든 것은 가격을 가지거나 존엄성을 가진다. 가격을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동등한 가격을 지닌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반면 모든 가격을 뛰어넘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존엄성을 지닌다.”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정순인 책임연구원은…
LG전자 VS(Vehicle Component Solutions)사업본부에서 수주 대응, 오토모티브(Automotive) SPICE 인증, 품질보증(Quality Assurance) 업무를 한다. 소프트웨어공학(SW Engineering), Technical Documentation 사내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내에서 2016~2017년 연속 최우수 강사상과 2018~2019년 연속 우수 강사상을 수상했다. 강의와 프레젠테이션 기법을 다룬 책 <당신이 잊지 못할 강의>를 썼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6호(2020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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