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김경집 인문학자·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삶과 일의 방식이 변하면 공간의 방식도 변한다. 그리고 공간이 변하면 삶과 사람도 변한다. 그 관계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재배치되고 재설계되는 공간에서 획득하는 이익과 손실, 그리고 미래의 비용을 어떤 방식으로 분배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졌다. 특별한 일 아니면 모임도 피한다. 잠깐 피하면 되는 비인 줄만 알았는데 길고 지루한 장마다. 잠시 처마 밑에서 지나갈 비를 피하는 일은 이미 무색해졌다. 아내는 아파트 베란다에 화초를 키우는 데에 열성이다. 화초에 별 관심 없었던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화초에 애정을 기울이는 걸 보면 낯설다. 가히 ‘반려식물’이다. 밖에 나가는 시간과 공간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형국이다. 아들의 재택근무도 낯설지 않다. 집이라는 공간 자체는 바뀐 게 없는데 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형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필연적으로 공간들의 역할이 바뀌게 될 것이다.


공간의 재해석은
이익의 공정한 분배를 전제해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우리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전 세계가 함께 몸살을 앓고 있기에 국소적으로 대응하고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일찍이 이렇게 세계 전체를 고립시키며 동시에 더 밀접하게 관계 맺으며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한 적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바뀐 삶의 방식은 공간을 재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관계의 양과 질에서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 코로나’ 분석과 대응이 온갖 곳에서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보여서 답답하다. 공간의 재해석은 필연적으로 그 공간의 재해석으로 인한 손익에 대한 공정한 분배를 전제해야 하는데 그 점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논지를 별로 본 적이 없다.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가장 심했던 시기에 여러 대기업들은 한 주의 절반 이상 재택근무를 하도록 조치했다. 입사 이후 처음 재택근무를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업 스스로 선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외부적 충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한 상황이 씁쓸했다.
충분히 재택근무가 가능한 상황이었고 유럽이나 미국의 여러 기업들이 이미 시행하고 있었는데 우리만 오불관언(吾不關焉)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관습적 사고 행태 때문일 것이다. 부하 직원들의 뒤통수를 보고 있어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낡은 사고 말이다. 말로는 창의적이고 독립적으로 기획하고 수행하라고 하면서 정작 눈앞에 붙잡아 둬야 한다. 그러나 코로나19는 그런 관습을 깨뜨렸다.


아들은 정확하게 회사의 업무시간에 맞춰 내 서재에서 작업을 수행했다. 아내와 나는 일부러 근처에얼씬하지도 않았고 식사시간도 회사의 점심시간에 맞췄다. 재택근무는 대충 설렁설렁해도 확인할 수 없으니 아무래도 일의 밀도가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평소에 회사에서 저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업무의 모든 프로세스가 공유되고 내용이 체크되는 상황에서 태업은 불가능한 일이다. 출퇴근에 뺏기는 시간과 피곤함을 더는 것은 자신의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는 보너스와 같다.


코로나19의 기세가 누그러지는 듯하면서 재택근무 날짜가 줄어들었다. 아내와 나도 다시 집 안에서 자유로워졌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재택근무로 바뀌었다. 이러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미온적이었던 재택근무에 대한 적극적이고 선제적 전환의 계기로 삼고 그것의 장점을 최대한 증진시키는 대안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라고 여긴다. 그러나 과거의 틀과 관습에 젖은 의사결정권자들이 자신들의 불편함(?)과 불안감 때문에 쉽게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하지 못하던 것을 외적 요인에 의해 수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을 오히려 긍정적 변화의 계기로 삼지 못한다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재택근무의 흐름은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도심의 비싼 오피스 임대료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출근하는 인원이 줄면 공간을 줄여도 된다. 물론 대면 업무의 현장감이나 즉석에서 피드백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줄겠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대안을 찾으면 된다. 개인별 책상 대신 출근하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공유할 수 있는 사무실을 만들고 데이터베이스 지원을 증대시켜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대신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으로 효율을 증대시킬 수도 있다. 비용은 줄고 이익이 늘게 되면 모두에게 이롭다.


그렇다면 그 이익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아들의 짧은 재택근무 기간에 사무실, 식사, 휴식의 모든 공간과 비용을 우리 가족이 부담했다. 우리 부부는 농담 삼아 회사의 비용을 우리가 낸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것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건 기업이 안아야 할 비용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익숙하지 않은 방식의 삶과 일의 변화를 초래했다. 누구나 예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논의에서 공간의 재해석과 재배치에 따른 이익의 공정한 분배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공간의 재해석, 유쾌하고 유익하게


지난 2년 동안 가까운 지인들이 모여서 ‘공간의 재해석’에 대한 토론을 이어왔다. 과학자, 건축가, 평론가, 인문학자로 구성된 멤버들이 그 주제로 모인 건 세상의 변화에 대해 공간 사용의 관습이 상대적으로 둔감한 것을 공감하며 어떻게 적극적이고 선제적으로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주거공간, 마을공간, 도시공간으로 확대되고 급기야 지구공간으로까지 이어졌다. 각 공간에 대한 역동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변천의 역사 등을 꼼꼼하게 따지고 자유롭게 토론했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직업과 전공에 따른 시선의 차이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에 더 놀랐으며, 변화의 필요성과 문제 등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다. 그 고민의 중심은 우리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우리 멤버들은 코로나19가 처음 발현했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필연적으로 이것이 공간의 재해석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작은 공간에서 큰 공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이 재해석되고 재배치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도 재해석될 것이다. 위기가 기회라는 상투어에 기대어 보면, 코로나19는 공간의 재해석에 대한 ‘위험한 기회’다. 기회를 놓치면 퇴행하고 도태된다. 냉엄한 역사적 증거들이 즐비하다.


공간이 변하면 삶과 사람도 변한다. 그 관계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이것이 강제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변해야 하는 현시점에서 나는 강압적 방식보다는 유쾌하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다. 에드워드 버네이즈(Edward Bernays, 1891~1995년)의 방식이 좋은 예다.


버네이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로, 미국 광고계의 대부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미국의 경제대공황 때 책이 팔리지 않자 출판업자들이 그를 찾았다. 흔쾌히 수주한 그는 얼마 뒤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미국의 대문호, 노벨상 수상자, 대학자 등을 동원한 멋진 캠페인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영화와 드라마 제작자들이 와 있었다. 의아하고 불쾌했을 것이다.


버네이즈는 영화와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앞으로 영화와 드라마 제작 때 거실 세트에 서가를 마련해 달라고, 그 비용은 자신들이 대겠다고 말했다. 경제대공황 때 많은 이들이 영화에서 위로를 얻었다. 주로 중산층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거실마다 서가가 있는 걸 본 관객들이 나중에 경제 상황이 호황을 이루자 집을 짓거나 고칠 때 주문사항에 꼭 넣었다.


“거실에는 서가를 마련해 주세요.” 서가에 뭘 채울 것인가? 그게 버네이즈가 선택한 전략이었고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윽박지르듯 변화를 강요할 게 아니다. 섹시하게 멋지게, 하고 싶어 미치게 만들면 된다.


버네이즈가 제시한 ‘거실 서가’의 방식을 지금 우리에게 요구된 공간의 재해석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 이 문제의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생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


B.C와 A.D의 약자가 바뀌고 있다. Before Corona와 After Disease로. 어차피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난망하다. 그렇다고 넋 놓고 푸념만 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겪어야 할 변화인데 익숙해서 작별하지 못한 미련과 관행도 많다. 간직할 걸 정확히 가려 뽑고 버려야 할 건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던져야 한다. 비관적 입장에서 접근하면 비관적 대안밖에 나오지 않는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했다. 지금 우리의 처지도 그렇다.


고립이 능사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건강해도 상대가 감염돼 있으면 나도 위험하다. 당신이 건강해서 고맙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가 건강한 게 고마운 일이다. 건강의 연대감이 존재와 삶의 연대감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의 재해석은 바로 그런 방식이어야 한다. 그걸 놓치면 만사휴의다. 어차피 치르고 있는 재앙이다. 그 값을 더 큰 적자로 이어갈지 새로운 흑자로 바꿀지는 우리 생각과 손에 달렸다. 그리고 내 옆 사람의 생각과 손에 달렸다. 그러니 우리는 기꺼이 손을 맞잡아야 한다. 모든 재앙은 성찰을 요구하고 그 성찰을 통해 축복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게 인류가 이룩해 온 역사의 과정들이다.


인류는 지금 거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우리가 자초한 몫이 크다. 따라서 반성의 성찰이 따르지 않는 방법의 모색은 또 다른 재앙을 초래할지 모른다. 비관도 낙관도 금물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탐욕과 효율지상주의를 벗고 함께 살아갈 멋진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상황과 시대가 변하면 공간도 변해야 한다. 공간이 변하면 사람과 삶이 변한다. 그걸 역으로 보면 사람과 삶이 바뀌어야 공간이 바뀌고 상황과 시대도 제대로 읽어 낼 수 있다. 그게 시대정신의 성찰과 미래 의제 도출의 방식이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니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즐길 수 있는 대안을 꾸준하게 찾아 내야 한다. 그게 지금 우리의 몫이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산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4호(2020년 09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