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 사진 한국경제DB]미국의 대선주자인 민주당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보호무역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달리 자유무역주의를 적극 지지해 왔다. 하지만 바이든의 경제공약도 출발점은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자다.
‘스윙 스테이츠(swing states)’는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 때마다 유권자들의 표심이 바뀌는 경합주들을 말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각 주에서 선출된 선거인단의 투표로 결정된다. 메인주와 네브래스카주를 제외한 48개 주에선 한 표라도 많이 획득한 후보가 그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을 모두 가져가는 이른바 ‘승자독식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체 선거인단 538명 가운데 과반(270명) 이상을 획득하는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다. 따라서 경합주들의 표심이 승패를 좌우한다.
전체 득표에서 이긴 후보가 경합주들에서 패배할 경우 선거인단의 투표에서 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16년 대선 때 당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전체 득표에선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250만 표(1.6%포인트)를 뒤졌지만, 경합주들에서 이기면서 당선됐다. 올해 대선도 경합주들의 표심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 분명하다. 핵심 경합주들은 플로리다(선거인단 29명), 애리조나(11명), 노스캐롤라이나(15명), 펜실베이니아(20명), 미시간(16명), 위스콘신(10명) 등 6개 주다. 이 중에서 플로리다와 애리조나, 노스캐롤라이나를 제외한 3개 주가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 쇠락한 공업지대)’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러스트 벨트는 한때 호황을 보였던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추락한 북동부와 중서부 지역들이다.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자층은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지지 기반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도 러스트 벨트 지역에서 승리해야 재선에 성공할 수 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도 러스트 벨트의 표심을 공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이든 후보는 백인 노동자층에 상당한 인기가 있다. 펜실베이니아주의 광산촌인 스크랜턴에서 태어난 바이든 후보의 부친은 자동차 세일즈맨이었다. 이 때문에 바이든 후보는 미국 최대 도시 뉴욕에서 부유한 사업가 아들로 태어난 트럼프 대통령보다 백인 노동자층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 왔다. 4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전미자동차노조(UAW)가 바이든 후보 지지를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바이든 후보는 대선 출사표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던지는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러스트 벨트 지역을 방문해 왔다. 바이든 후보가 지난 7월 9일 펜실베이니아주 던모어의 한 금속공장에서 연설을 통해 회심의 경제공약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 때문이다.
◆‘바이 아메리칸’, 美 기업 적극 투자 공언
바이든 후보의 경제공약의 핵심은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정책이다. 그 내용을 보면 연방정부가 향후 4년간 7000억 달러(약 837조 원)를 미국 기업들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세부 계획을 보면 미국을 근거지로 한 기업들의 재화와 서비스 구매에 4000억 달러, 청정에너지와 인공지능(AI) 등 핵심 기술의 연구·개발(R&D)에 300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바이든 후보는 연방정부가 미국 제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한 ‘바이 아메리칸법’을 강화해 미국산 제품 구매를 늘리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바이든 후보는 또 해외 제조업 의존도를 줄이고, 미국 내 제조업 혁신과 5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선거운동 캠프의 제이크 설리번 선임보좌역은 “자본 조달, 인프라 구축, R&D에 대한 공공투자 투입을 포함해 전체 규모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경제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면서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새로운 국제 무역협상보다 미국 내에 산적한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바이든 후보는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자유무역주의를 적극 지지해 왔다. 실제로 바이든 후보는 트럼프 대통령이 ‘끔찍한 무역협정’이라고 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비롯해 다자간 무역협정을 옹호해 왔다. 바이든 후보는 또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재가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랬던 바이든 후보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와 닮은꼴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러스트 벨트의 표심을 얻으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후보는 NAFTA와 TPP가 미국 산업과 일자리를 파괴한다고 비판하면서 세계화와 자유무역으로 일자리를 잃은 백인 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덕분에 트럼프 후보는 러스트 벨트 지역에서 승리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한 이후 NAFTA를 폐기하고 미국에 유리한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을 체결했다. TPP에서도 탈퇴했다.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개정하고, 중국과는 무역전쟁을 벌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전 세계적으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미국 내에선 백인 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백인 노동자들이 지금도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 러스트 벨트 지역에서 승리하려면 백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확보해야 하는 바이든 후보로선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차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바이든 후보의 이번 공약은 트럼프 대통령에 비해 약점으로 간주돼 온 경제 분야에서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크게 앞서고 있는 바이든 후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문제와 인종차별 사태 등 주요 현안에서 대부분 트럼프 대통령보다 잘 대처할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경제 분야에선 밀리고 있다. 바이든 후보가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한 경제공약 카드를 꺼내든 것은 일종의 노림수라고 볼 수 있다.
정치 전문 언론매체 폴리티코는 “바이든 후보가 러스트 벨트 지역의 백인 노동자들의 표심을 공략하기 위한 경제공약을 내놓았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선거운동 캠프는 “바이든 후보에게 선수를 뺏겼다”며 당황하고 있다. 트럼프 캠프도 바이든 후보와 비슷한 경제공약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부 이견으로 발표가 미뤄지는 사이 바이든 후보가 먼저 치고 나왔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바이든 후보가 내놓은 경제공약은 내 정책을 표절한 것”이라면서 “바이든 후보는 결코 자신의 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미 대선 쟁점은 ‘경제 악화 극복’
오는 11월 3일 실시되는 이번 미국 대선에서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제 악화를 극복하는 문제가 최대의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경제는 최근 들어 코로나19의 폭증으로 회복세가 상당히 느려지면서 다시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는 올해 3분기 미국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전망치를 기존 33%에서 25%로 낮추면서 미국의 올해 전체 GDP 증가율 전망치도 기존 –4.2%에서 –4.6%로 하향 조정했다.
골드만삭스는 코로나19 사태로 지난 2월부터 경기 침체에 진입한 미국 경제가 3분기부터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는 전망을 유지했지만, 최근 코로나19 폭증으로 반등 폭이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후보는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미국 경제를 회복시킬 각종 방안들을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 지역별로 보면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후보를 지지하는 지역의 경제 회복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블룸버그통신이 미국 100대 도시 경제 회복세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동부와 서부가 뚜렷한 경기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동부에선 보스턴, 서부에선 실리콘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경제 회복 속도가 빠르다.
실리콘밸리는 재택근무 환경 덕분에 경제활동 재개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으며, 정보기술(IT) 서비스에 대한 수요 증가도 이 지역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되고 있다. 보스턴은 바이오 연구 시설, 세계적 의료 시설과 헬스케어 수요 확대로 수혜를 보고 있다. 이들 지역은 민주당과 바이든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곳들이다.
반면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는 텍사스주와 조지아주 등은 상당히 더디다. 이들 지역은 전통적으로 공화당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들이다. 특히 러스트 벨트 지역의 경우 경제 회복세는 더욱 부진하다. 코로나19 때문에 러스트 벨트에 있는 공장들이 모두 가동을 중단했다. 공장들 가운데 일부가 가동돼 어렵게 버텨 왔던 이 지역의 주민들은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게 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시간주, 펜실베이니아주 등의 실업률은 20% 안팎으로,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가장 많은 뉴욕주(13% 안팎)보다도 높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트럼프 대통령보다 바이든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바이든 후보가 민주당에서 유력 주자였던 강경 좌파인 샌더스 상원의원의 정책들 가운데 온건 정책을 대거 수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바이든 후보의 전략은 온건 중도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노동자층도 적극 포용하겠다는 것이다. 바이든 후보와 샌더스 상원의원은 지난 7월 8일 자신들이 지명한 6~8명으로 구성된 ‘통합 태스크포스(TF)’가 수 주간의 협상 끝에 마련한 110쪽 분량의 정책권고안 초안을 발표했다. 이 정책권고안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채택하는 정강 정책의 기초가 된다.
민주당은 8월 17~20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바이든 전 부통령을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하며 정강 정책도 확정할 예정이다. 정책권고안에는 기후변화와 제도적 인종차별에 대응하는 주요 제안들이 담겨 있지만,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인 ‘메디케어 포 올(Medicare for All)’이나 그린뉴딜 환경계획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은 제외됐다. 게다가 정책권고안에는 셰일오일을 생산하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바이든 후보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압파쇄법(프래킹)’을 금지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지 않았다.
바이든 후보가 샌더스 의원 등 민주당의 급진주의자들로부터 자신의 온건 중도 정책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냄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 후보를 급진 좌파로 규정하려던 선거 전략에 차질을 빚고 있다.
바이든 후보에 대해 비판적인 월가에서도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월가는 그동안 바이든 후보가 당선되면 금융 규제가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해 왔다. 금융자문회사 시그넘 글로벌은 “이번 대선에서 바이든 후보가 당선된다고 해도 생각만큼 급진 좌파적인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물론 바이든 후보는 대기업과 고소득 투자자에 대한 세율 인상과 규제 강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바이든 후보가 “주주자본주의 시대를 끝내겠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바이든 후보는 트럼프 대통령이 35%에서 21%로 낮춘 법인세율을 28%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최악의 상황에 빠진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바이든 후보도 당선되면 친(親)기업 정책과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정책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미국 대선의 최대 변수인 러스트 벨트 지역의 표심이 바이든 후보로 기울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앞으로 어떤 반격의 카드를 꺼내들지 주목된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3호(2020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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