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방역과 성숙한 관극 문화 1등공신...포스트 코로나 대비도 필수

[한경 머니= 김수정 기자]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현재 공연계는 그야말로 ‘고난의 시기’다. 하지만 “인생은 얼마나 센 펀치를 날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얻어맞고도 계속 움직이며 나아갈 수 있느냐”라던 영화 <록키>의 명대사처럼 국내 공연계는 ‘셧다운’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 저력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사진 한국경제DB

K공연계 ‘셧다운’ 대신 ‘정면 돌파’
올해 초 나의 모든 신경은 영국 런던을 향해 있었다. 평소 좋아했던 할리우드 배우 티모시 샬라메의 웨스트엔드 데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출연작은 연극 <4000마일(miles)>. 웨스트엔드는 영국 런던 서쪽의 극장 밀집 지역으로 보통 런던극장협회에 속해 있는 50여 개 극장들을 통칭한다.

이곳은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뮤지컬의 양대 산맥이자, 전 세계 연극 공연의 메카로 불린다. 배우들에겐 꿈의 무대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에서 티모시의 연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게도 그건 분명 꿈의 무대였다.

어렵사리 5월 공연 티켓을 구매하고, 신속하게 비행기 티켓과 숙박을 예약했다. ‘그래, 올해 휴가는 런던이다’며 하루하루 행복한 생각에 젖은 것도 딱 한 달. 2월 초만 해도 주로 아시아에서만 기승을 부리던 코로나19가 한 달 새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를 뒤덮기 시작했다. 3월부터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는 셧다운을 결정했고, 티모시의 연극도 잠정 연기됐다. 아, 야속한 코로나19여.

비단, 이런 사태가 먼 나라 일만은 아니었다. 국내 공연계도 올해 상반기 예정된 공연들 가운데 개막이 무기한 연장되거나 취소됐고, 조기 폐막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지난해 12월 17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초연한 뮤지컬 <영웅본색>은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고 지난 2월 10일 조기 폐막했다.

제작사 빅픽쳐프로덕션은 당시 <영웅본색>의 공연 취소를 결정하면서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고 관객과 출연진, 스태프 건강 보호 등의 이유를 들었다. 뮤지컬 <줄리 앤 폴>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했던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도 비슷한 이유로 조기 폐막됐고, 뮤지컬 <마마, 돈 크라이>, <맘마미아!>와 연극 <렛미인>의 개막이 취소됐으며, 뮤지컬 <귀환>은 개막을 무기한 연기했다.

실제로 지난 6월 20일 공연예술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해 공연계(연극, 뮤지컬, 클래식, 무용, 국악 등) 매출액은 코로나19로 인해 매달 줄어들었다. 지난 1월 약 398억 원 매출액을 기록했던 공연계는 코로나19가 터지기 시작한 2월엔 매출액이 약 216억 원으로 반 토막이 났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된 3, 4월에도 계속해 전월 절반 이하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3월에는 약 91억 원, 4월에는 약 47억 원의 매출액을 내는 데 그쳤다. 그나마 5월 6일부터 방역 체계가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전환되면서 회복세로 접어들어 5월에는 약 113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회복세를 보이던 공연 시장이 6월 들어 다시 움츠러들고 있다. 수도권의 코로나19 확산으로 주요 국공립 공연장이 다시 문을 닫고, 예술단체들이 공연을 올리지 못하면서다.
K공연계 ‘셧다운’ 대신 ‘정면 돌파’
대형 뮤지컬A사 공연관계자는 “구체적인 수치를 밝힐 수는 없지만 다른 때와 비교해 관객 점유율이 상당히 줄었다”며 “지난달 공연 중엔 하루 판매 건보다 취소 건이 더 많아 수입이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밝혔다.

대학로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얼마 전 대학로 공연을 폐막한 B사 관계자는 “관객 점유율이 절반으로 줄었다. 각종 이벤트를 통해 티켓 금액을 낮춰도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된 표가 무척 많았다”며 “다른 공연들도 관객 점유율이 떨어지고, 적자 폭이 커지면서 그 대안으로 조기 종영을 선택하는 사례가 많다”고 토로했다.

K방역과 성숙한 관극 문화
하지만 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내 공연계는 안간힘을 다해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공연 중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내한공연을 포함해 수많은 공연들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는 것. 일각에서는 공연장 내 집단감염의 위험에 대해 지적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공연 관객 중 확진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철저한 K방역 시스템과 관객들의 성숙한 관극 문화가 주요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실제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된 이후 국내 대부분의 공연장에서는 입장 전 발열 체크 및 문진표 작성은 물론이고, 공연장 곳곳에 손소독제가 비치돼 있다. 마스크 착용도 의무화됐다. 심지어 공연 중 마스크를 벗는 관객들을 체크하는 스태프들도 포진해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역학조사의 편의성을 위해 전자명부 시스템이 도입돼 눈길을 끌고 있다. QR코드 인증 방식을 통하면 방문자의 이름과 연락처, 방문 시간 정보가 서버에 저장되는데 4주 뒤엔 자동 폐기된다. 이미 뮤지컬 <모차르트!>와 <렌트>가 공연 중인 세종문화회관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시행 중이다.

뿐만 아니다. 일부 공연에서는 이른바 ‘웃픈’ 상황도 발생했다. 코로나19의 비말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 착용과 더불어 ‘공연 내 환호 금지’와 같은 공지문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대표적인 공연이 6월 21일 폐막한 뮤지컬 <리지>다. 올해 가장 주목받는 초연 뮤지컬로 꼽힌 이 작품은 공연 내내 샤우팅과 헤드뱅잉 욕구가 솟구치는 강렬한 록 뮤지컬이다.

K공연계 ‘셧다운’ 대신 ‘정면 돌파’
[세종문화회관에서 방호복을 입은 방역요원들이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지난 2월 28일 공연장 방역을 하고 있다. 한국경제DB]

하지만 관객들 대부분은 열렬히 박수만 칠 뿐 함성을 지르지는 않았다. 지난달에 <리지>를 관람한 한 관객은 “배우들은 앞에서 신나게 샤우팅하는데 관객은 소리를 못 지르니 아쉬웠지만 그 속에서도 내적 환호가 느껴졌다”며 “관객들 사이 서로 간 배려하고 신뢰하는 문화가 크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예전처럼 공연장에서 신나게 소리치며 마음 편히 관극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연관계자도 관객들을 향한 고마움을 표현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공연장이 셧다운 된 지금, 한국에선 여전히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심엔 관객들이 있죠. 제작사들을 향해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도 보내 주시고요. 그분들의 성숙한 관극의식과 사랑 덕분에 그나마 공연계가 숨통을 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철저한 방역은 물론이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이 조금 더 편하게 관극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계획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대비 절실
물론 이러한 직진 행보에도 코로나19의 장기화로 공연업계가 짊어져야 할 난제들은 여전히 많다. 통상 국내에서는 공연이 취소되면 그 피해를 제작자와 배우, 스태프가 고스란히 떠안는 구조다. 따라서 재정적 여건이 열악한 소규모 민간단체들은 직원들 임금과 사무실 임대료 등 고정비용 부담으로 그 피해 규모가 상대적으로 더욱 크다.

이에 정부는 지난 2월 20일 공연 취소·연기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들이 긴급생활자금을 융자받을 수 있도록 공연계 긴급 지원책을 발표했다. △30억 원 규모로 신설한 ‘코로나19 예술인 특별융자’ △‘예술인 창작준비금’ 지원 시 코로나19 피해에 대한 가점 부여 △소공연장 방역 물품 지원 등이 주요 골자였다.

이후 지난 3월에는 소극장, 예술단체, 관객 대상의 지원책으로 코로나19로 침체된 공연계 활성화에 초점을 맞춰 △기초공연예술 소극장 200곳에 대한 공연 기획·제작 경비 및 홍보비 등을 1곳당 최대 6000만 원까지 지원 △총 160개 예술단체(예술인)에게 2000만~2억 원의 제작비 차등 지원 △총 300만 명 관객에게 1인당 8000원 상당의 ‘관람 할인권’ 제공 등의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만큼 일시적인 자금 지원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지원과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터파크티켓 관계자는 “뮤지컬, 연극, 콘서트, 클래식, 무용 등 장르를 불문하고 공연계에 길고 힘든 암흑기가 찾아왔다”며 “다만, 코로나19 사태 종식 시기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 기간을 버틸 수 있도록 공연계 종사자와 제작사 등에도 실질적인 자금 지원과 혜택이 마련돼야 향후 공연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C사 공연관계자 역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관계자(관계부처) 간의 대처법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정부나 공연 관련 공공기관에서 공연계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분야별 실태조사로 좀 더 명확한 지원 사업을 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2호(2020년 0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