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글·사진 양보라 여행전문기자] 언젠가 우리는 일상으로 회귀할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자유로운 여행을 고대하며, 수첩에 적어 놓아야 할 걷기 좋은 여행지 4곳을 꼽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이 한창인 요즘 ‘랜선여행’이 유행이다. 랜선여행은 생중계 영상을 보면서 집구석 여행을 즐기는 행위를 이르는 말. 뉴욕 타임스퀘어,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 세계 각국 유명 관광지의 현재 모습을 중계하는 채널을 보며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달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단다. 국제선 하늘길은 거의 끊겼고, 국내 여행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황인 가운데 벌어지는 궁여지책이다. 우리는 그렇게 작금의 상황을 인내하고, 내일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랜선여행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준비했다. 이름 하여 코로나19 버킷리스트 여행이다. 지금은 녹록지 않더라도 사정이 나아지면 바로 달려가 볼 만한 ‘국내 트레킹 여행지 4’를 꼽았다. 그간 여행의 기록을 모아 둔 외장 하드디스크를 구석구석 뒤졌다. 자, 코로나19 이후를 상상하면서 당신의 여행 예정 목록에 다음 여행지를 올려 두시라.
반평생 황무지를 화원으로 가꾸다
거제 공곶이
비단 ‘코로나19 버킷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삼아야 할 여행지가 바로 경남 거제 공곶이다. 공곶이는 땅이 엉덩이처럼 바다 쪽으로 튀어나와 있다고 해서 엉덩이 고(尻)자, 그런 지형을 뜻하는 곶(串)자가 합쳐진 이름이다. 정식 행정구역 명칭은 거제시 일운면 예구마을로 부른다.
공곶이는 남해 바다를 마주한 언덕에 수만 송이 수선화가 낭창낭창 흔들리는 꽃 풍경으로 유명하다. 이곳을 낙원으로 가꾼 이들은 1957년 부부의 연을 맺은 노부부 강명식·지상악 부부. 이 부부는 1969년 공곶이에 정착해 반평생 땅을 일구며 꽃과 나무를 키웠다.
황무지에 불과했던 14만9000㎡ 땅에 3만3000㎡ 면적의 경작지를 만들었다. 호미, 곡괭이, 삽으로만 작업을 했다고 하니, 손으로 빚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밭이다. 부부는 피와 땀으로 얻은 밭뙈기에 50종이 넘는 꽃과 나무를 부지런히 심었고, 세월이 흘러 날이 갈수록 공곶이의 풍경은 그윽해졌다. 봄날 수선화뿐만 아니라 조팝나무와 설류화가 순번을 이어 꽃을 틔운다. 겨울에도 푸른 종려나무도 여럿이다. 해서 공곶이는 사시사철 찾아가도 만족스러운 여행지다.
공곶이 농원은 한려해상국립공원 안에 있다.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농원에서 바라보는 남해 풍경이 일품이다. 농원에서 바다를 내다보면 봉긋 솟은 내도가 보인다. 내도에 가려 안 보이지만 내도 너머로는 그 유명한 외도가 있다.
부부의 화원으로 들어가려면 차가 다니지 못하는 산길을 20분 걸어서 올라야 한다. 기세 좋은 능선이 고꾸라질 때 발밑으로 공곶이와 바다가 펼쳐지니 땀을 제법 흘려도 값어치를 하는 풍경일 것이다.
날아다니는 별, 반딧불이
경북 영양 영양군자연생태공원
경북 영양은 첩첩산중의 오지다. 이 벽촌으로 ‘밤’을 즐기려는 여행객이 모여든다. 영양의 밤이 도시의 밤처럼 휘황찬란해서가 아니다. 영양은 인공조명의 영향이 적어 우리나라에서 밤이 가장 깜깜한 고장이다. ‘밤다운 밤’을 되살리자는 환경운동의 하나로 빛 공해가 적은 밤하늘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국제밤하늘협회(IDA)가 영양의 밤하늘을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선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어둠 덕분에 영양의 밤은 외려 환해진다. 구름 없는 날이면 수천 개 별이 영양의 밤을 환히 밝히기 때문이다.
영양의 밤을 밝히는 것이 별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지상의 별’ 반딧불이다. 반딧불이는 인공조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물로 빛 공해가 적은 영양은 반딧불이가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영양군에서도 수비면 수하리에 있는 영양군자연생태공원(390만㎡)이 반딧불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다. 이 생태공원 안에 영양군이 관리하는 영양반딧불이특구(193만㎡)가 있다. 영양군은 2005년 1급수가 흐르는 장수포천 주변을 영양반딧불이특구로 지정하고, 반딧불이 서식지로 보호하고 있다.
장수포천은 멸종위기 1급 동물인 수달이 서식할 정도로 물이 깨끗해 반딧불이가 장수포천에서 다슬기, 달팽이 등을 쉽게 잡아먹을 수 있다. 덕분에 8월 하순이 되면 반딧불이 수천 마리가 날아다니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운문산반딧불이,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등이 서식하는데, 운문산반딧불이와 애반딧불이는 5월 말에서 7월 말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고, 늦반딧불이는 8월부터 9월까지 출현한다. 생태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반딧불이를 찾아볼 수 있다. 공원 안에 반딧불이, 사슴벌레 등 곤충 표본을 볼 수 있는 영양반딧불이생태학교도 문을 열어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반딧불이의 불빛이 여려서 달빛도 부담스럽다. 보름보다는 그믐에 맞춰 방문하는 것도 방법이다.
생사초가 자라는 곳
경남 밀양 얼음골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킹덤> 시즌2가 세계적으로 연일 화제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좀비물로, 극에서는 죽은 자가 좀비로 바뀌는 현상을 ‘역병’으로 부른다. 국내외 팬들이
<킹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코로나19 사태를 떠올리는 것도 <킹덤>이 ‘핫’한 이유 중 하나일 터. 극에서 역병을 일으킨 원인으로 지목되는 미스터리한 풀이 바로 ‘생사초’다. <킹덤>은 생사초가 사시사철 어둡고 습한 ‘언골’에서 자란다고 설정했다. <킹덤>을 보면서 무릎을 ‘탁’ 쳤다.
경남 밀양의 신비로운 계곡 ‘얼음골’을 지역주민들은 예부터 ‘언골’이라 불렀다는 증언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에 생사초가 번식할 만한 곳이 밀양 얼음골 말고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밀양 얼음골은 재약산(1189m) 북쪽 600m 지점에 있는 계곡으로 한여름에도 에어컨처럼 시원한 바람을 쐴 수 있다. 산비탈을 따라 3만㎡ 정도 널찍한 너덜겅이 펼쳐지는데, 바위틈으로 냉기가 새어 나오는, 그야말로 가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신비한 장소다. 천연기념물 제224호로 지정됐다.
한낮 기온이 영상 35도까지 올랐던 한여름에도 얼음골에 당도해 매표소를 통과하자마자 다른 세계로 훌쩍 뛰어넘은 듯했다. 온도계를 확인해 보니 기온이 영상 25도로 뚝 떨어져 있었다. 산중턱에 가까워질수록 바위틈에서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쏟아져 나와 계곡을 오르는 중에도 땀이 흐르는 법이 없었다.
너덜겅 중간에 사람의 접근을 막고자 펜스를 두른 장소가 있는데 ‘결빙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이곳이 바로 얼음골이라는 이름이 탄생한 장소다. 4월 중순부터 6월 장마철이 닥칠 때까지 바위 사이로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는 장관이 펼쳐진다. 8월 하순까지 결빙지에서 얼음을 관찰할 수도 있다.
당연히 얼음골은 밀양 시민들에게 동해 바다 부럽지 않은 피서지다. 바위 곁에 오랜 시간 앉아 있다 보면 으슬으슬할 정도이니 얇은 담요를 꼭 챙기시길.
영국 왕세자의 산책길
경주 불국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경주를 안다고 오해하게끔 만든 장본인이 학창시절 경주로 떠났던 수학여행이다. 이른 새벽 석굴암에서 일출을 봐야 한다는 선생님의 독촉에 학생들은 졸린 눈을 비비고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일출 시각에 억지로 맞춰 석굴암 앞에 다다랐다지만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도, 햇빛을 받아 번쩍인다는 석굴암 부처도 학생들 기억에는 없다.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1973년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2차선 포장도로가 개통하면서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두 시간 만에 후딱 돌아보는 관광 코스로 전락했다. 그러나 석굴암은 원래 걸어서 올라가던 곳이다. 불국사 정문 주차장과 석굴암 주차장을 잇는 산길이다.
2.2㎞에 이르는 산길은 ‘석굴암 가는 길’, ‘불국사길’, ‘석굴암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차량 출입은 금지됐고 오로지 사람만 오르내릴 수 있다. 불국사 정문 앞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오르면 석굴암 입구에 다다른다. 찻길이 있는데 왜 걷느냐고 묻는다면, 부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어차피 고행을 담보로 하는 여정이다. 그래도 1시간이면 족할 길이다.
석굴암 가는 길과 영국 찰스 윈저 왕세자에겐 인연이 있다. 1992년 한국을 방문한 왕세자는 자동차를 타고 석굴암 앞까지 왔다. 석굴암에서 감동을 받은 그는 “석굴암에 닿는 길이 찻길밖에 없느냐”고 물었다. 석굴암 부처가 고행 끝에 만날 수 있는 평화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질문이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잇는 숲길을 알아낸 그는 이후 일정을 취소하고 불국사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석굴암 입구 왼편으로 이어지는 토함산 산길도 걸을 만하다. 토함산 정상까지 완만한 산길이 1.6㎞ 이어진다.
세계적 감염병이 우리 사회로 침투한 지 수개월째. 국내외 아름다운 걷기 길을 찾아 이곳저곳을 누볐던 일이 한바탕의 꿈처럼 아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디 이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독자 여러분과 함께 ‘쇼생크 코로나’를 탈출해 여행의 자유를 다시 누릴 날을 꿈꾼다.
양보라 여행전문기자는…
단연코 여행의 재미는 소비에 있으며 온갖 살 것이 넘치는 메트로폴리탄이야말로 궁극의 여행지라고 믿어 왔다. 인생의 분기점을 넘은 것인지, 자연으로 파고드는 여정이 즐거워졌다. 이제 막 걷기 여행의 매력에 눈을 뜬 초보 트레커다. 걸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국내외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를 소개할 예정이다. 중앙일보와 월간지 트래비 여행 기자로 글을 써 왔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0호(2020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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