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 사진 한국경제DB]중국 우한에서 촉발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 경제에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석유 수요가 급감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석유 시장점유율을 놓고 신경전을 펼치며, 세계 경제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안 룰렛은 두 사람이 회전식 연발권총에 하나의 총알만 장전하고 머리에 총을 겨누어 교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건 게임이다. 19세기 제정러시아 시대에 감옥에서 교도관들이 죄수들에게 강제로 이 게임을 시키면서 누가 먼저 죽을지 내기한 것에서 비롯됐다. 사용하는 권총은 6연발 리볼버인데, 죽을 확률은 17% 정도다. 게임이라기보다는 목숨을 건 도박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안 룰렛은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벌이는 무모한 모험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최근 세계 최대 산유국들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국제 석유 시장점유율을 놓고 증산에 나서면서 러시안 룰렛을 벌이고 있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이른바 ‘유가 전쟁’에 돌입한 것은 중국발 코로나19 사태 때문이다.
코로나19로 각국의 경제가 나빠지면서 올 들어 석유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실제로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인 중국의 경우 코로나19 사태로 지난 1월 중순 이후 석유 수요량은 평소 소비량의 20% 규모인 하루 평균 300만 배럴이나 감소했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제 석유 시장에서 발생한 최대 규모의 수요 감소 폭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3개월간 코로나19의 발원지인 우한을 비롯해 주요 도시들을 완전 봉쇄했고 주민들의 이동 금지라는 강력한 통제 조치를 시행해 왔다. 또 영화관을 비롯해 각종 공연장들과 식당, 쇼핑몰, 백화점, 호텔 등도 대부분 휴업했고, 학교를 비롯해 공장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고속버스와 고속철도, 여객기들도 운항을 중단하거나 감축했다. 이 때문에 석유 수요가 대폭 줄었다. 한국, 이탈리아 등 각국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시설이 폐쇄됐고, 각종 서비스업체들도 영업을 하지 못했고, 공장들도 가동을 멈추어야만 했다.
전 세계의 석유 수요는 이처럼 코로나19와 각국 경제 악화로 올해 상당히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HS 마킷은 올해 1분기 석유 수요가 역대 최고로 가파르게 감소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보다 감소 폭이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IHS 마킷은 1분기 글로벌 석유 수요가 전년 동기 대비 하루 평균 380만 배럴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미국의 골드만삭스도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올해 전 세계 석유 수요가 2009년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세계 석유 수요가 지난해보다 하루 평균 15만 배럴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컨설팅업체인 팩츠글로벌에너지(FGE)도 올해 석유 소비량이 하루 평균 22만 배럴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중기 전망 보고서에서 코로나19 확산으로 올해 세계 석유 수요가 2009년 이후 처음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하면서 올해 국제 석유 수요 감소치는 하루 평균 9만 배럴일 것으로 추정했다. IEA는 보고서에서 올해 석유 수요의 감소 이유는 지난해 석유 수요 증가분의 80% 이상을 차지했던 중국의 수요가 큰 폭으로 줄어들었고, 관광과 교역에서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IEA는 중국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 경우 하루 평균 73만 배럴까지 감소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히 석유를 지금까지 많이 소비해 온 중국, 일본,이탈리아, 한국 등 4국은 코로나19 때문에 경제난과 함께 경기 침체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이들 4국의 국내총생산(GDP)을 보면 2019년 기준으로 중국은 세계 2위, 일본은 세계 3위, 이탈리아는 세계 8위, 한국은 세계 12위다. 이들 4국의 전체 GDP는 22조9126억 달러로, 전 세계 GDP의 27%에 달한다. 또 이들 4국은 물론 각국이 코로나19 때문에 관광객들의 출입국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통제 조치를 취하고 있어 관광 산업도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주요 항공사들도 직항 노선을 중단하거나 감축해 왔고, 이에 따른 제트유 소비도 대폭 줄어들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코로나19가 계속 확산할 경우 전 세계 항공사가 1130억 달러의 매출 손실을 볼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우디 vs 러시아, 유가전쟁 장기화되나
원유 수요가 이처럼 대폭 줄어들자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14개 회원국들과 러시아가 이끌고 있는 비(非)OPEC 10개국이 지난 3월 4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OPEC+(플러스)회의를 갖고 석유 생산량 감산 문제를 놓고 논의를 벌였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대립했기 때문이다.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과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에너지부 장관이 별도로 만나 6시간이 넘는 마라톤 협상을 벌였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빈 살만 장관은 노박 장관에게 석유 생산량을 대폭 줄이자고 제의했지만, 노박 장관은 이를 거부했다. 사우디가 대폭 감산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보다 국제유가의 하락을 막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사우디로서는 코로나19로 석유 수요가 줄어든 만큼 산유량을 감축해 국제유가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자는 입장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산유국들의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국제유가를 보면 사우디가 배럴당 78달러,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68달러, 이라크가 59달러 등이다. 게다가 사우디 정부는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해 온 탈석유 신성장 계획인 ‘비전 2030’에 따른 재정 수요를 맞추기 위해선 세계 최대 국영회사이자 석유기업인 아람코의 주가가 하락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사우디의 제의를 완강하게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증산하자는 입장을 보였다. 러시아가 사우디의 감산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셰일오일업계가 반사이익을 얻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 때문이다. 러시아는 그동안 경쟁국인 미국 셰일오일업계에 타격을 가할 기회를 노려 왔다.
러시아는 그동안 감산이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의 배를 불린다는 주장을 해 왔다. 셰일오일은 시추가 까다로워 생산 단가가 기존 원유보다 높다. 러시아가 석유 생산을 늘려 유가를 낮은 수준으로 계속 유지하면 원가 경쟁력에서 밀리는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은 파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 셰일오일업계의 손익분기점이 되는 국제유가는 배럴당 40달러 선이다. 러시아로선 감산 대신 증산할 경우 국제유가가 더욱 하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국 셰일오일업계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고 사우디의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JS)도 “러시아가 이참에 미국 셰일오일업계의 숨통을 끊어놔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국과 유럽을 잇는 가스관인 노르트 스트림 2를 건설해 러시아산 가스를 유럽에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반대해 온 트럼프 대통령에게 상당한 불만을 보여 왔다. 러시아 국책 싱크탱크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의 알렉산데르 딘킨 소장은 “크렘린궁의 의도는 미국 셰일오일업계를 저지하고, 노르트 스트림 2를 방해해 온 미국을 응징하려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빈 살만 장관과의 협상이 깨진 이후 노박 장관은 “4월 1일부터 OPEC의 감산 여부와 상관없이 러시아는 증산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러시아 석유회사들은 단기적으로 하루 20만~30만 배럴을 증산할 수 있으며, 더 길게는 하루 50만 배럴 증산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현재 러시아의 산유량은 하루 1130만 배럴 수준으로, 필요하다면 하루 50만 배럴까지 증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사우디는 지금까지 감산하자는 입장을 바꿔 증산 카드로 러시아에 맞불을 놓았다. 아람코는 4월 1일부터 하루 생산량을 970만 배럴에서 27%나 많은 1230만 배럴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아람코는 또 아시아에 대한 4월분 아랍경질유 선적분의 공식 판매가격을 3월보다 배럴당 6달러, 미국에 대해서는 8달러, 유럽에 대해서는 8달러씩 내리겠다고 밝혔다. 사우디의 전략은 시장점유율을 늘림으로써 경쟁국인 러시아를 유가 전쟁에서 패배시키겠다는 것이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공급 과잉으로 국제유가가 급락하더라도 당분간 버틸 만하다는 입장이다. 러시아는 최근 몇 년간 원유 매출액 증가로 1700억 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조성했기 때문에 국제유가가 내려가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반면 사우디의 배럴당 생산 단가는 10달러 선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사우디로선 국제유가가 급락해도 다른 산유국에 비해 버틸 여력이 있다. 게다가 사우디의 의도는 러시아와의 유가 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미국 셰일오일업계를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또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인 사우디는 이번 기회에 시아파의 맹주이자 적대국인 이란에 타격을 가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정면충돌로 치닫자 국제유가가 급락했고, 미국 뉴욕 중시와 유럽 각국의 증시 등에서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다. 지난 3월 9일 뉴욕 증시에선 다우존스 30 산업평균지수가 7.8%나 떨어지면서 1997년 이후 23년 만에 ‘서킷 브레이커(거래 일시 중단)’가 발동되기도 했다. 영국 FTSE 100(7.69%), 프랑스 CAC 40 지수(8.39%), 독일 DAX 30 지수(7.94%) 등 유럽 주요 증시의 주가도 줄줄이 급락했다. 영국 FTSE 100의 낙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2년 만에 최대를 기록했다. 글로벌 증시의 주가 폭락은 중동 산유국들의 국부펀드가 국가 재정 악화를 막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신흥국을 비롯해 각국의 주식 매각을 확대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더욱이 사우디와 러시아의 유가전쟁은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국제유가 하락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지지 기반으로 셰일오일업체가 몰려 있는 텍사스의 지역경제가 초토화될 수 있다. 셰일오일이 미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 10여 년간 10% 정도로까지 커졌기 때문에 셰일오일업체들이 디폴트(채무불이행)나 인원 감축 등을 실시할 경우 경제에 상당히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앞으로 국제유가는 사우디와 러시아의 대결이 장기화할 경우 자칫하면 배럴당 20달러 선까지 하락할 수 있다. IEA는 시장점유율 경쟁이 장기화할 경우 사우디와 러시아 및 미국까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파티 비롤 IEA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국제 석유 시장에서 러시안 룰렛을 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무튼 유가전쟁과 코로나19는 세계 경제의 ‘더블 블랙 스완’이 될 것이 분명하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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