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바야흐로 ‘뉴트로 전성시대’다. 마케팅의 만능키로 유통업계를 점령한 것은 물론이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세대불문, 대한민국을 강타한 뉴트로의 참 매력은 무엇일까. 사진 한국경제DB
1980~1990년대 추억이 줄줄이 강제 소환되고 있다. 회식자리엔 파란 병 진로소주가 돌아왔고, 1990년대 가수 양준일은 데뷔 28년 만에 첫 팬미팅 무대를 밟았으며, 영어 간판으로 도배됐던 번화가에는 ‘00다방’, ‘00식당’, ‘00상회’ 등 복고풍 간판과 1980~1990년대 스트리트 패션이 거리를 수놓고 있다. 레트로(복고)의 재탕인가. 아니다. 뉴트로의 탄생이다.
[위에서부터) 가수 양준일, 참이슬 백팩, 진로이즈백]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인 뉴트로는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복고를 즐기는 행위는 끊임없이 되풀이돼 왔다. 특히, 경기가 좋지 않을 때마다 소비자들의 기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 마케팅은 흥행공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현재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와 Z세대(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의 뒤를 잇는 세대)가 열광하는 뉴트로는 기존 레트로 열풍과는 그 결이 다르다. 뉴트로 유행의 핵심은 ‘새로움’과 ‘즐거움’이다. 이 트렌드를 소비하는 주체는 과거의 것을 이미 경험한 중장년층이 아닌 1020세대다. 이전의 복고 열풍인 ‘레트로’가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과거의 것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과거의 것을 새로운 것으로 인식해 즐기는 것이다.
그 흐름은 패션업계에서 가장 먼저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출시된 휠라의 ‘디스럽터2’다. 20년 전 처음 선보였던 거칠고 투박한 운동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2017년 출시한 디스럽터2는 출시 1년 만에 국내에서만 100만 족이 팔리며 단숨에 10~20대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재까지 국내에서만 180만 족 이상이 판매됐고, 전 세계 판매량도 1000만 족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신발 전문 매체 풋웨어뉴스는 ‘2018 올해의 신발’로 디스럽터2를 선정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2000년대 이후 이른바 ‘국민운동화’로 군림했던 컨버스 운동화에 실증을 느끼던 밀레니얼 세대에게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색다른 감성과 멋을 선사한 것이 주요했다는 평이다.
이에 대해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트렌드의 핵심은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에 가까웠다”며 “얼마나 기존의 것과 다르고, 새로운지가 트렌드의 기준이었다면 지금의 ‘뉴트로’ 현상은 그와 다른 선상에 있는데 그 배경에는 더 이상 ‘완전히 새로운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즉, 자기 개성이 강한 밀레니얼·Z세대들에겐 자발적으로 트렌드를 찾아내는 개인의 능력이 중요한데, 새로움의 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기존에 경험하지 못했던 옛 감성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것.
강 연구원은 “2000년대 초반까지의 트렌드는 여전히 소수 트렌드세터에 의해 주도되고, 대중이 그것을 따라가는 형태였다면, 지금은 각자의 개성을 부각하는 개인들이 자신만의 맥락에서 트렌드를 발견하고 정의하거나 선언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며 “뉴트로는 트렌드가 형성되는 패러다임의 인식 변화와 트렌드를 만들어 가는 주체들의 인식 변화가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유희와 추억을 교감하다
비단, 뉴트로에 열광하는 것은 1020세대만은 아니다. 3050세대 역시 잊고 지냈던 추억들을 곱씹으며 향수를 느끼고 있다. 어른들의 음악으로 치부됐던 트로트가 부활했고, 1980~1990년대 유행했던 음악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흘러나온다.
JTBC 프로그램 <슈가맨>을 즐겨 본다는 박지민(47) 씨는 “시즌1부터 <슈가맨>을 가족들과 즐겨 본다. 10대 시절 좋아했던 가수들을 다시 만나고, 음악을 듣다 보면 잊고 지낸 추억에 흠뻑 빠지게 돼 즐겁다”며 “무엇보다 유년기 시절의 노래를 자녀들과 공유할 수 있어서 좋고, 젊은 친구들이 옛 노래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걸 보는 것도 재밌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그러면서 “가수 양준일의 경우 <슈가맨>에 출연하기 전부터 아이들이 ‘요즘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아저씨인데 아빠도 아느냐’고 물어봤다”며 “예전에 레트로는 특정 세대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다면, 현재 뉴트로는 기성세대가 미처 몰랐던 과거의 조각들을 1020세대들이 발견하고,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향유하는 방식은 달라도 본질이 같다면 세대 간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박 씨의 말처럼 뉴트로는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 다양한 세대를 끌어안는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을까.
그간 우리나라는 극심한 세대 갈등을 앓아 왔다. 청년들의 상당수가 기성세대를 ‘꼰대’로 폄하하고,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근성’이 없다며 혀를 찬다. 이에 대해 임홍택 작가는 저서 <90년대생이 온다>에서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기점으로 멈춰 버린 에스컬레이터와 이를 대신한 유리계단 위에서 우리 모두에게는 여유라는 단어 대신 조급함과 억울함만이 생겨났다”고 했다.
모두가 억울한 세상에서는 특별히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 사회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수년째 한국의 청년들은 장기간 저성장의 그늘 아래에서 살인적인 취업난에 허덕이고, 조기퇴직 후 안정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지 못하는 중장년층에게도 100세 시대의 미래는 암담하기만 하다. 이런 흐름 속에 상대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담보돼야 할 대화나 소통은 어쩌면 ‘그림의 떡’에 불과할 뿐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8년 10월 발간한 ‘노인인권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노인들 중 청장년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절반(51.5%)을 웃돌았다. 노인과 청장년 간 갈등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노인 비율도 44.3%에 달한다. 청장년 역시 10명 중 9명은 노인과 소통하는 걸 어려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니 세대 간 소통은 묘연할 뿐이다. 어쩌면 뉴트로가 한 철 유행이 아닌, 지속 가능한 메가트렌드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이 지점이지 않을까.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 전 세대가 공감하되, 각자의 개성을 향유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필요해 보인다.
강 연구원은 세대 간 가교로써 뉴트로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뉴트로가 세대를 잇고 단절됐던 대화를 이어가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이 한쪽 세대가 주도하는 방향으로만 간다면 그 대화가 지속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온라인 탑골공원’이나 ‘양준일 신드롬’ 같은 경우, 중장년층보다 1020세대에서 더 열광하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요.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 중장년층의 인생선배, 혹은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자, 이거 한 번 봐봐. 엄마, 아빠가 이렇게나 힙한 시간을 보냈다’라고 제안해서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거죠.
망망대해와 같은 인터넷에서 1020대가 우연히 발견하곤 ‘어, 의외로 멋진 구석이 있는데?’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렸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공통분모를 두고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얼마든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대안이 됩니다.
하지만 이걸 특정한 세대의 소유물이라 가정하고, 뭔가 가르치기 시작하거나 틀렸다고 지적하는 등 자신이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 대화는 지속되기 어려울 겁니다. 뉴트로가 누구의 소유이냐를 따지지 말고, 함께 공감하고 열광한다면 얼마든지 세대와 세대를 잇는 가교가 될 것이라 봅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7호(2020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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