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공인호 기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면서 내가 속한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디지털 유목민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공간에서 솔직한 감정 표현보다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간접 화법에 더욱 익숙하다 보니 ‘진짜 나’를 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과연 이모티콘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스마트폰 속 SNS는 현대인들의 교류와 소통의 장(場)으로 각광받으며 급속한 성장과 진화를 거듭해 왔다. 타인과의 손쉬운 교류와 소통은 가능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감시의 시대, 즉 파놉티콘(panopticon) 구조 안에 살아가고 있다.
파놉티콘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가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언급한 건축 양식으로, 감시원은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감시원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구조다. 죄수 입장에서는 별다른 감시가 없더라도 늘 감시받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상황에 처해지는 이른바 ‘시선의 내면화’를 겪게 된다.
늘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고 급기야 홀로 있는 시간조차 감시받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SNS 사회는 파놉티콘과 무척 닮아 있다. 이 같은 상호 감시 사회에서는 상대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여과되지 않은 채 인터넷과 같은 공유 공간을 떠돌며 다양한 폐해를 낳고 있다.
다양한 가면을 쓴 현대인
매년 대한민국 사회 트렌드를 예측해 온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멀티 페르소나(Multi Persona)’를 2020년 새롭게 부상할 새 트렌드로 소개했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에서 유래한 단어로, 오늘날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지칭하는 용어로 활용되고 있다.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이에 대해 디지털 사회에서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갈수록 SNS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성격과 취향, 취미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선택적으로 계정을 늘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페이스북의 경우 오프라인 인맥을 관리하는 용도로, 트위터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인스타그램은 취미와 취향을 공유하는 용도로 활용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문제는 디지털 문명의 가속화로 인해 ‘진짜 나’와 페르소나의 괴리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직장 안과 밖에서는 물론, 카카오톡과 유튜브에서의 정체성이 다르고 인스타그램에서는 또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형태다.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디지털 허언증’ 역시 정체성의 괴리에서 오는 부작용이다. 이 같은 정체성의 혼란은 현실에서의 무력감과 함께 비교열위의 자신을 발견하며 신경증과 우울증에 빠지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2018년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경증 점수(5점 만점)는 평균 3.28점이었지만, 신경증 점수가 낮은 1점대(매우 불안한) 사람들의 비율이 6.2%로 5점대(매우 안정적) 비율인 1.1%의 5배를 넘어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경증 경향은 정서적 기복이 심하고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데,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불쾌한 일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경향을 보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신의 속내와 감정은 외면한 채 살아갈 경우 자신의 진짜 내면을 드러내야 하는 뜻밖의 상황이나 트라우마에 직면했을 때 감정 조절에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역시 “SNS로 인간의 다원성은 확장됐지만 역설적으로 개인 정체성의 기반은 매우 불안정해졌다”며 “‘나다움’이란 무엇인가. 진짜 나는 누구인가. 다매체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마일마스크와 번아웃신드롬
멀티 페르소나의 폐해가 주로 젊은 층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스마일마스크증후군(smile mask syndrome)’과 ‘번아웃신드롬(burnout syndrome)’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중년층이 겪는 병증으로 꼽힌다. 스마일마스크증후군은 항상 웃는 얼굴로 상대를 대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슬픔과 분노 같은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는 심리적 불안 상태를 말한다.
주로 서비스업종의 콜센터 직원이나 연예인 등 감정 노동자들에게서 보이는 증상이지만, 최근에는 세대 간 갈등으로 ‘꼰대’ 취급을 받지 않으려는 직장 상사들의 방어기제가 가면성 우울증으로 발현되고 있다. 특히 586세대로 통하는 이 시대의 중년층은 과거 직장 안팎에서 수직적 위계질서의 중압감을 견디며 살아 왔지만, 관리자급으로 성장한 지금은 수평적 조직문화에서 극심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 좀 더 유연하게 사고하려 노력하지만 좀처럼 밀레니얼 세대들과의 간극을 좁히기가 쉽지 않다. 최근 밀레니얼 세대들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다룬 <90년대생이 온다>가 국내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도 우리 사회의 세대 간극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1세기의 최대 위험’으로 꼽은 번아웃신드롬 역시 중년층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번아웃신드롬은 ‘탈진증후군’이라도 불리는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일에 탕진한 나머지 진짜 자신의 삶을 위해 쓸 수 있는 기운은 고갈된 상태를 일컫는다. 최근 국내 기업들 사이에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지만 ‘욜로(YOLO)’ 트렌드에 익숙한 젊은 층과 달리, 조직과 단체 우선주의에 기반한 마키아벨리즘 리더십에 익숙한 중년층에게는 여전히 고단한 삶이 더 익숙하다.
이런 번아웃신드롬은 심각한 감정 기복을 거친 뒤 결국에는 어떤 감정도 느끼기 힘들어지며 만사에 무관심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특히 성실함과 유능함을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번아웃에 노출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굳이 디지털 시대의 해악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의 가정교육과 학교 교육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만 초점이 맞춰졌을 뿐, 자기 자신의 진짜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는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디지털 공간에서 중년층들은 일종의 강박을 느끼는 것 같다. ‘꼰대’라는 핀잔을 듣지 않기 위해, 직장 안팎의 중압감에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다소 과장된 스마일마스크의 이모티콘 뒤에 숨은 모습이 꼭 그렇다.
지금과 같은 연말연시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설계하는 일을 반복하곤 한다. 특히 디지털 격변기라는 시대적 환경은 현대인들의 결핍과 조급함에 기름을 끼얹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SNS를 탐색하며 나 홀로 정체되는 것은 아닌지, 좀 더 나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끝없는 갈망이 심장을 짓누른다.
이와 관련해 심리학 전문가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이러한 거친 마음과 좌절감, 괴로움에 대처하는 근본 대책이라고 조언한다. 현대인들은 시시각각 급변하는 디지털 트렌드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군중 속 고독을 느끼는 것도 ‘나다움’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정여율 작가는 자신의 책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에서 이를 ‘에고 인플레이션(ego-inflation) 시대’라 표현하며 “나를 지키는 것이 최고의 지상명령이 된 시대,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하고 나로 끝나는 시대가 와 버렸다”며 “자존감의 의미가 과대포장 되고 나의 경계를 넓혀 나 자신의 가능성을 확장하기보다는 내가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나를 방어하는 일에만 급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대인은 ‘나’라는 단어를 도처에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고에 중독된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해석보다는 표현을 중시하고 경청보다는 과시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창조성과 자율성, 공감 능력과 연대감이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그는 ‘마음 챙김’에 대해 나 자신의 진짜 속내인 ‘셀프(self)’에 목소리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생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보다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에고와 셀프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에서 공감과 상호작용의 키워드로 활용하는 ‘감사하는 마음’은 개인의 자존감과 행복감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울한 사람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을 향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의 시선은 타인을 향한다는 의미다.
진정한 나, 진짜 행복을 찾아서
스마트폰 시대, 다양한 형태의 매스미디어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국내 서점가에서는 철학, 심리학, 에세이, 명상 등 인문학 관련 서적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진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내면의 수요가 반영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많은 심리학 전문가들은 자신의 단점과 상처를 이겨낸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의식 깊숙한 곳에 단련돼 온 ‘회복 탄력성’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회복 탄력성은 일상의 행복보다 불행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 본연의 취약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면의 자원이다.
회복 탄력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보다 내면의 희열, 즉 블리스(bliss)를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꽃을 가꾸고, 여행하는 일 역시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은 블리스다. 특히 독서와 명상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고독과 함께하는 명상도 과도한 정보 노출과 과잉 유대관계에서 자신을 잃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훌륭한 치료제가 되고 있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 노출돼 있는 현대인의 상당수는 소통과 공감, 자기 성찰의 부재에서 비롯된 단절감을 겪고 있는데, 이런 사회 병리 현상은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수반하며 알코올과 약물, 게임 등의 중독 증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명상은 지난 2000년 이후 스트레스로 인한 각종 질병의 보조 치료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6호(2020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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