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 사진 서범세 기자] 중고 트럭 1대로 사채 빚에서 벗어나 연 매출 100억 원을 올리게 된 과일 장사꾼이 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늙는 것은 나의 잘못이다”라고 말한다. ‘역전의 명수’ 배성기 국가대표과일촌 대표가 전하는 희망 메시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기회가 왔다.” 서른을 바라보던 두 아이의 가장은 더 큰 미래를 위해 안정된 직장을 뛰쳐나왔다. 그 후 야채가게에 들어가 장사를 배웠다. 8년 후 ‘내 가게를 열겠다’는 꿈을 이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사업 시작 2년 만에 물난리가 나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 남은 건 사채 빚 1억5000만 원과 담보 잡힌 중고 트럭 1대. 마흔을 목전에 둔 가장에게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돈도, 학벌도, 인맥도 없는 그에게 남은 거라곤 장사의 기술뿐. 중고 트럭을 몰고 거리로 나섰다.
트럭에 올라탄 과일 장사꾼에게 시간은 황금 같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길에서 보내며 밤낮없이 과일을 팔았다.
그렇게 1년여를 꼬박 채웠을 때 빚을 다 갚았다. 3년이 지났을 때는 물류센터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100억대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그를 부의 길로 인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농산물 유통 회사인 국가대표과일촌을 운영하는 배성기입니다. 경기 시흥시에서 물류센터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들에게 트럭 장사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새로운 꿈을 펼치도록 돕는 트럭장사 사관학교 ‘국가대표과일촌’의 운영을 겸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업의 성과를 숫자로 말씀해주신다면.
“매출은 연간 100억 원에 달합니다. 오프라인 매장을 확대하고 있으며, 현재 6호점까지 열었습니다.”
-장사를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20대 때는 대기업에 다녔습니다. 내로라하는 항공사에서 근무를 했는데 당시 외환위기가 왔습니다. 구조조정 대상자는 아니었지만, 위기감을 느끼기엔 충분했습니다. ‘50대에 회사를 나가면 그때 가서는 아무것도 못하겠구나! 내 가게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방송에 한 과일가게가 나왔는데 일하는 게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습니다.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그곳에 찾아갔습니다. 그때부터 장사를 배웠습니다.”
-가족들의 반대가 심하지는 않았나요.
“당시 30대를 앞둔 나이였지만, 일찍 결혼해 처자식이 있었습니다. 18년 전, 월급이 30만 원에 불과했으니 매장까지 가는 차비를 제하면 거의 남는 게 없었죠. 아이들까지 있는 사람이 미친 짓이라고 반대도 심했지만, 처음에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막무가내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첫차를 타고 출근해 막차 타고 퇴근할 만큼 일은 고됐지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한번은 가게 사장님께서 ‘네 꿈은 뭐니’라고 물으신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객기입니다만, ‘사장님보다 하루 3만 원 더 파는 게 목표입니다. 농산물 시장에서 제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실제 꿈을 이루셨습니다. ‘내 가게’도 열었고요.
“그때가 2011년인데, 모아 놓은 돈이 많지 않아 마트 안에서 청과물 매장을 임대했죠. 주택가와 동떨어진 허허벌판 입지에서 매출이 40배 가까이 상승하는 등 성과가 참 좋았는데, 그해에 ‘강남역 물난리’가 터졌습니다. 시에서 물난리를 막겠다고 하수관로 개선 공사를 시작했는데 우리 가게가 5m 앞에 있었어요. 굴착기가 땅을 파고, 철골이 들어서면서 1년 반 동안 장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임대료와 인건비만으로 한 달 1000만 원이 그냥 빠져 나갔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빚이 빚을 낳았어요. 결국 사채까지 손을 댔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자 임대 매장에서 쫓겨나게 됐고요. 사채 1억5000만 원. 그때 제 나이 불혹을 앞뒀을 때였습니다.”
-눈앞이 깜깜하셨겠습니다.
“남자 나이 마흔이면 보통은 전셋집 하나 정도는 갖고 있을 때잖아요. 안정을 찾을 나이인데, 전 그때 집도 차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큰애 학습지 시켜줄 3만 원도, 작은애가 백일이었는데 새 옷 하나 사줄 돈도 없었습니다. 사채가 정말 무서운 게 이자가 이자를 낳습니다. 내일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제게 남은 거라곤 사채 빚, 그리고 중고 트럭 1대가 전부였습니다. 이마저도 할부로 샀는데, 할부금을 못내 언제 뺏길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자식이 있는데, 마냥 좌절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트럭 장사와 연을 맺은 건가요.
“이 트럭 1대로 다시 시작해보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장사 지겹지도 않냐.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되면 그건 안 되는 거다.’ 그래도 별 수 있나요. 배운 게 장사니까 밑바닥부터 다시 해보자. 그렇게 뛰어들었죠.”
-장사는 잘 됐나요.
“밥값은커녕 기름 값도 못 벌었습니다. 왜, 희망고문이랄까요. 그래도 잘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트럭 장사에 뛰어들었는데 너무 암담했습니다. 당시엔 정말 절망적이었어요.”
-기회는 언제쯤 찾아왔나요.
“그렇게 한 달 정도 같은 장소에서 과일을 파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습니다. ‘어제 참외 팔았지? 밥은 먹었어? 내가 잠깐 맡아줄 테니까 얼른 가서 밥 먹고 와.’ 장사도 안 되겠다, 모르는 아주머니에게 트럭을 맡기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일이 생겼어요. 제가 비운 사이 트럭에 사람들이 모이고 과일을 골라 사 가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해서 여쭤보니 ‘총각은 다 좋은데 웃지를 않잖아. 장사는 간이고 쓸개고 내놓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거야.’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장사가 안 되니까, 내 심정이 복잡하니까 나도 모르게 장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마인드를 잊고 산 거였죠. 그분이 떠나고 누군가 제게 저분이 노점상에서 시작해 빌딩 4개를 보유한 사람이란 걸 알려줬어요. 귀인을 만난 거죠.”
-단순히 마음의 변화 하나로 장사가 잘됐나요.
“그날, 바로 태도를 바꿨어요. 일이 안 되면 안 되는 이유를 찾기 바빴지만, 귀인을 만난 이후부터 어떻게 하면 내가 여기에서, 저 사람한테 물건을 팔 수 있을까 그 생각에만 골몰했어요. 잠도 안 자고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트럭에는 ‘눈 뜨면 장사 눈 감으면 취침’이란 글귀를 써 붙였습니다. 방법만 생각하자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피어났어요. 한번은 귤을 팔러 시내로 나가는데, 갑작스런 폭설로 도로가 꽉 막혔습니다. 졸음이 밀려와 잠깐 눈 좀 붙여야지 하고 굴다리 아래 차를 세웠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잘 때가 아니었어요. 다른 운전자들도 졸음이 온다면. 당장 머리에 귤을 두르고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귤을 판매했습니다. 원래 3망에 5000원인 것을 2망으로 팔았는데도 전부 다 팔 정도로 잘 나갔습니다. 어디에서 무얼 팔까 그 생각만 하니 방법은 계속 떠올랐어요. 밤 12시에 장사할 곳은 없을까. 모두가 깨어 있고 경쟁자도 없는 수산시장으로 가자. 트럭은 진입이 안 되니 리어카에 참외를 담고 과일을 팔았습니다. 새벽부터 열리는 의류도매시장에는 잡상인이 출입불가니까 보따리에 과일을 가득 숨겨 몰래 들어가기도 했어요.”
-장사의 신이 되셨군요.
“일이 너무 재밌었습니다. 많이 벌 땐 1000만 원 가까이 벌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통장 잔액은 늘 0원이었습니다. 사채 빚이 빠져 나가니 잔고가 늘 바닥이었죠. 그 생활을 한 1년 반쯤 했을까. 하루는 은행에서 잔고를 확인했는데, 30만 원이 찍혀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습니다. 직원이 왜 우느냐고 묻는데 답을 못했습니다. 내게도 잔액이 있다. 정말 빚을 다 갚았구나. 이제 돈을 모으자. 그렇게 3년 정도 하니 지금에 이르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부의 사다리가 끊긴 시대라고 말합니다.
“취업하기도 힘들고, 기회가 적어진 것도 분명 맞습니다. 쉽게 사다리를 찾을 순 없지만 절실하게 그것을 계속해서 찾는다면 성공할 방법은 분명 있습니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외려 불황일 때 더 돈을 잘 법니다. 절박함이 ‘방법’을 찾아낸 것이죠. 경기가 어려워도 돈은 어딘가에서 흐릅니다. 다만 보지 못할 뿐이죠. 돈이 흘러가는 곳은 반드시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면 부자 가능성이 높아지나요.
“트럭 장사에 실패했을 그 한 달간 저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자신이 없어져서 초심을 잃었으니까요. 하지만 될 때까지 하면 안 되는 건 없습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말처럼 말이죠.”
-저서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늙는 것은 나의 잘못이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저는 1974년,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당시 저희 부모님은 흔한 말로 공돌이와 공순이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업고 새우를 까셨습니다. 제가 사채 빚을 쓰며 망했을 땐 부모님께서 도와주실 여건이 있었지만 손을 벌리지 않았어요. 혹여나 내가 잘못 됐을 때 우리 애들 밥 먹일 단 한 사람이 부모님이었으니 절대 부모님까지 엮이게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제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더라면 아마 그때 쉽게 포기했을 겁니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트럭장사사관학교에 오는 분들은 다들 참 절실합니다. 이분들이 장사의 노하우를 배워 잘된 사람이 100명이 될 때까지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5호(2019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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