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유항아리, 유리판에 인그래빙(engraved) 기법과 금속 프레임, 104.5×103.5×6cm 32kg, 2019년
백유항아리, 유리판에 인그래빙(engraved) 기법과 금속 프레임, 104.5×103.5×6cm 32kg, 2019년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이상민


[한경 머니 기고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이상민 작가의 작품엔 가을의 청아한 공기와 투명한 하늘이 담겼다. 볼수록 마음속 깊이까지 개운해진다. 이처럼 눈과 마음을 동시에 씻어내 줄 수 있는 작품은 흔치 않다. 처음엔 무심결에 서서히 빠져들었다가도 쉽게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끌림, 이것이 이상민 유리조형 작품의 매력이다.


유리 재질은 그 자체로서 남다른 매력을 지녔지만, 미술 작품의 소재로 다루기가 워낙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열을 가해 소성(塑性)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완제품으로 경화된 유리판을 가공한다는 것은 매우 예민한 과정이다.


이상민 작가의 작품은 예견된 무리수를 극복하는 도전의 결과다. 유리가 지닌 원형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극히 일부분에 자신의 조형적 흔적을 남긴다. 물론 이 과정은 수작업으로 완성된다. 표현하고 싶은 소재의 형상을 10mm 두께의 유리판에 도안으로 옮긴 후 다이아몬드 날로 수천, 수만 번 반복 작업을 거친다. 스스로 고행을 자초한 수행자의 정신이다.


시간, 장소(공간), 본질, 새로움. 이 작가의 작품에서 뽑아낼 수 있는 키워드들이다. 시간과 장소는 외부와 내부의 관계성이기도 하다. 그는 ‘시간에 대한 호기심과 공간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작품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시간과 공간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이다. 삶은 반복돼 쌓인 일상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삶 속에서 평범함과 비범함은 상대적이듯, 시간과 장소성 역시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지되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백지장 앞뒷면의 간극’과도 같은 개념들을 유리 작품으로 정의하고 있다.


유리는 마치 물이나 공기와도 같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결에 그 존재감에 대해선 무감각해진다. 유리는 유리 자체보다 유리로 인한 ‘무형의 경계’로 숨겨졌던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마도 그는 유리의 이러한 속성으로 ‘본질과 새로움의 인식’에 대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과연 본질이란 무엇일까. 새롭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이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궁금증과도 연결된다. 그렇게 보면 이 작가의 관심사이기도 한 시간과 장소성, 본질과 새로움 등은 결국 하나의 결로 통하는 셈이다.


“이전의 작업들에선 지극히 개인감정을 담아내는 것으로 한 작가로서의 삶을 드러내는 데 치중했다면, 현재의 그릇 시리즈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과정은 작가적 삶을 근간으로 주변인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는 측면에서 큰 공통점이 있어요. 2011년경 대만 고궁박물관을 탐방하면서 수많은 소장품을 보며 ‘시간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계기가 있었죠. 이런 경험은 자연스럽게 한국미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이미지를 생성해보고 싶은 욕구와 맞닿게 됐습니다.”


이 작가는 “현실의 본질에서 또 다른 새로운 현상을 통해 신기루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탐구하고 있다”고 작품의 변을 전한다. 그가 좇는 신기루 같은 존재감은 무엇일까. 그의 말처럼 지금의 그릇 시리즈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과정’이라면, 현실에서 보이는 현상과 상상에서 보이려고 했던 가상이미지를 한 몸에 담아낸 것은 그의 유리조형 작품이다. 이처럼 실상과 가상 사이의 풍경에 대한 고민들이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구심점이자 정신적 요체다.

백자청화운용문호(白磁靑畵雲龍文壺), 유리판에 인그래빙 기법과 금속 프레임, 91×139×6cm 42kg, 2019년
백자청화운용문호(白磁靑畵雲龍文壺), 유리판에 인그래빙 기법과 금속 프레임, 91×139×6cm 42kg, 2019년
지금의 그릇 시리즈가 구상성을 띤 작업 방식이었다면, 이전의 작품들은 다소 추상성이 강했다. 일명 ‘물수제비’라고 부르는 형상으로 물의 파장이나 물웅덩이 효과를 표현했다. 투명한 유리판을 수면(水面)으로 가정한다면, 움푹 파인 비정형의 유기적인 형상들은 공존하는 또 다른 존재감을 상징한다. 고요하게 잠든 물결을 순식간에 치고 달아난 새 한 마리의 여운을 목격한 것처럼, 그의 이전 작품들은 묘한 긴장감과 생동감을 자아냈다. 그 역시 지금의 작품처럼 ‘있고 없음’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과 탐구의 과정으로 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그릇들은 여느 평범한 것이 아니다. 하나같이 유명 박물관에 소장돼 있거나, 전문 서적에 소개된 도자기 형상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특히 마음에 든 도자기의 형상을 변형 없이 온전하게 옮기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작업실에 가보면 벽면에 도자기 사진을 복사하거나, 그 위에 여러 작업 계획들을 빼곡하게 적어 놓은 장면이 쉽게 목격된다. 그것들은 작품들을 위한 기본 밑그림 역할을 한다. 고민 끝에 엄선한 도자기의 사진 이미지를 원하는 크기로 확대 복사는 하더라도, 기존의 형상에서 인위적으로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이는 실체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그 위에 가공의 허상을 덧입히기 위함이다. 마치 현재는 과거가 덧쌓인 결과인 것처럼 그만의 방식으로 시간성을 표현하는 조형 어법이다.


일상에 놓인 작품들 중에서 빛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그의 작품만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또 있을까 싶다. 그의 작품은 철저하게 빛에 의해 그 존재감이 좌우된다. 빛이 없다면 아예 보이질 않는다. 그저 유리판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주 적은 빛이라도 있다면 그 존재감은 깨어나기 시작한다. 빛의 양이나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생명성은 얼마든지 유연성을 발휘한다. 2차원 평면에 갇힌 3차원을 만난 것처럼 신비롭기까지 하다.


전시장에서 이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예외 없이 작품 바로 앞까지 다가가 손가락으로 눌러본다. 겉면이 편평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고개를 좌우로 아무리 흔들어봐도 보일 듯 말 듯 그 형상의 비밀은 쉽게 찾지 못한다. 그가 꾸준히 고민해 온 ‘시간, 장소(공간), 본질, 새로움’에 대한 의문을 하나의 작품에서 구현해내고 싶다는 바람이 성사되는 순간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그가 형상을 차용한 도자기나 작품의 바탕인 유리판도 돌이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존재감도 궁극적으론 하나의 뿌리로 통하는 셈이다. 국내외에서 두터운 팬을 형성 중인 이 작가는 올해 미국 마이애미아트페어를 준비 중이다. 작품 가격은 1m×1m 기준 1400만 원이며, 매년 0.5% 정도 상승하고 있다.


아티스트 이상민은…




1966년생. 프랑스 스트라스브르(Strasbourg) 고등장식미술학교와 국립 스트라스브르 마륵블록 인문대학원 조형예술학에서 오브제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그동안 23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으며, KIAF(한국), 아트센트럴(홍콩), 시애틀아트페어(미국), 아트마이애미(미국), SOFA(시카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특별기념전, 2017 크로스장르전(경기도미술관), 한국조각가협회-KOSA 스페이스 운영위원회 초대전 등 100여 회 이상의 기획 단체전에 참여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주한이탈리아대사관, 일신방직,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로비(런던), 프랑스 아트프라이스(Art Prise.com)·파펜호펜(Pfaffenhofen) 교회·제르티니(Xertigny) 제철, 중앙대 본관 및 R&D센터, 한남 더힐 로비, (주)크라운해태제과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다. 또한 1999 일본현대미술전대상, 프랑스 1994 국제눈조각전 최우수상, 캐나다 퀘벡 프랑스 대표작가 출전, 유럽청년작가공모전 등에서 수상했다. 현재는 중앙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조소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작품 활동 중이다.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정부미술은행 작품가격 평가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계간조각 편집장, 201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 2019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4호(2019년 11월) 기사입니다.]